한국 근대사학이 성립되는 초기 단계에 한국사에 반영된 이러한 새로운 역사 인식체계의 흔적은 시대구분 명칭을 통해 그 편린을 남기고 있다. 한국 근대사학 성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의 각 시기에 붙여진 시대구분 명칭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대개 네 가지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상고上古(상세), 중고中古(중세), 근고近古(근세)와 같은 시간의 원근을 나타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귀족국가(귀족사회, 귀족정치시대), 전제국가(전제왕권, 전제시대), 전제군주국가(군주독재정치시대) 등 지배세력과 정치권력의 성격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원시사회, 씨족사회, 노예제사회(노예제국가), 봉건제사회(봉건제국가), 자본주의사회 등 유물사관에 근거한 것이고, 네 번째는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시대(고려왕조), 조선시대(조선왕조) 등 전통적인 왕조 중심 내지는 정치집단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에서 흔히 사용하는 시대구분 명칭들은 대개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섞이고 조합된 경우가 많다.
--- p.28, 「Ⅰ부 한국 고대사 인식과 연구방법론」중에서
한국 역사학계에서도 비교사학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봉건제도,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같은 주제들이 전국역사학대회의 공동 주제로 채택되거나 시대구분에 관한 학술대회 등은 모두 비교사적 관점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 같은 노력은 세계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한국사를 연구하고, 한국사 연구가 세계사의 체계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더욱이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밝히는 데는 비교사적 접근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것이다. (중략) 초기의 비교사적 연구는 주로 서양사, 동양사 또는 비역사학 분야에서 시도되었고, 비교 주제와 관점이 한국사에서 비롯된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비교사에 대한 관심이 지속되면서 한국사 연구자들에 의한 비교 연구의 성과들도 나타나고 있다. 비교 주제도 막부幕府제도, 노비제도, 17세기 자연재해 등 이전과 다른 새로운 분야들로 다양해지고 있다. 비교의 영역도 역사시대에만 국한하지 않고 유럽 청동기문화와 한반도 청동기문화의 비교 연구 등 선사문화 단계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 p.74, 「Ⅰ부 한국 고대사 인식과 연구방법론」중에서
이러한 논의를 보면서 떠오르는 의문은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는 방법론으로써 공동체 이론은 얼마나 유용한가, 공동체를 통해 고대사회의 단계별 변화상을 밝히고 발전 과정을 체계화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일단 공동체를 형성, 유지하는 핵심 요소가 무엇인지를 먼저 검토해야 한다. 핵심 요소란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토대이다. 공동체의 해체나 변화는 결국 각종 원인으로 인해 공동체를 받치고 있던 핵심 요소들에 변화가 생길 때 일어난다.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등장하는 것 역시 새로운 결집 요소와 힘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중략) 지금까지 한국사 연구자들이 주목한 것은 토지 소유 관계, 생산 형태, 혈족집단의 분화, 계급 분화 등이다. 다분히 경제사학자들의 공동체 기준을 취한 부분이 많다. 경제사학자들은 공동체의 유형과 변화 과정을 논할 때 토지 소유와 경작 형태에 초점을 맞추므로 사회학보다는 측정 기준이 일견 단순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준이 얼마나 효율적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 p.96, 「Ⅰ부 한국 고대사 인식과 연구방법론」중에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철기 제작 기술의 발달로 철기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공급량이 늘어나면서 나무 농기구가 점차 철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지역에 따라 다르겠으나 일반 농민들도 쇠괭이를 비롯하여 쇠날을 끼운 따비를 사용하게 되었다. 아직은 철기의 질이 강하기만 하고 질기지 못하여 잘 부스러지는 단점이 있었으나 철제 농기구가 나무괭이나 나무따비보다 효율적인 것만은 분명하였다. 잡초가 우거진 황무지 개간은 물론 논밭을 갈 때도 철제 농구를 쓰면 훨씬 깊이 흙을 일굴 수가 있어 손쉽게 풀이나 작물 뿌리를 제거하고 결과적으로 땅을 묵히는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게 된다. (중략) 정치적으로는 여러 읍락이 통합되어 지연공동체로서 양적으로 확대되고 질적으로 보다 강압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정치체들이 등장하였다. 북으로 남만주 일대와 압록강 유역을 무대로 고구려, 부여 국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한반도 중남부 지방에서도 수많은 읍락이 지역별로 통합되어 70여 개의 소국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서 한강 유역의 백제국伯濟國과 경주의 사로국斯盧國을 중심으로 여러 소국이 소국연맹체를 형성하여 백제, 신라 국가의 토대가 이루어졌다.
--- p.134~135, 「Ⅱ부 농업생산기술의 발전」중에서
현재까지는 통일신라시대까지도 휴한농법이 일반적이었다는 주장이 다수이다. 통일신라시대 휴한농법 단계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7세기 말(695, 효소왕 4년)에 작성된 신라 촌락문서村落文書이다. 이 문서에 나오는 전답田畓 결수結數와 인정수人丁數를 비교한 결과 정남丁男, 정녀丁女 1인당 경작 면적이 후대에 비해 지나치게 넓다. 즉 당시 청주 지역에 살고 있던 신라의 촌락민들은 10인 정도로 구성된 한 가호가 가장 적게는 9결結(하하연下下烟), 가장 많게는 21결(중하연仲下烟)에 이르는 넓은 농경지를 경작한 것으로 분석되었다. (중략) 11세기 고려시대에도 3년 이상 휴경하는 토지와 단기 휴경이 실시되던 토지, 그리고 연작이 실시되던 경작지가 공존하였다. 고려 문종 8년(1054)의 전품田品 규정에서 토지의 등급을 토지 활용도에 따라 상(불역전不易田), 중(일역전一易田), 하(재역전再易田)로 구분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12세기 고려 예종 대까지도 일역전, 재역전과 3년 이상 묵힌 진전陳田 개간에 관한 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휴한 극복을 장려하는 정부의 노력과 함께 여전히 휴한을 전제로 하는 토지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p.210~211, 「Ⅱ부 농업생산기술의 발전」중에서
대평리 지역에서 조사된 삼국시대 밭이 한결같이 고랑, 이랑 너비가 같은 것과 비교할 때 이러한 밭의 모습들은 청동기시대 경지 활용 방식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삼국시대 밭은 대평리뿐 아니라 다른 지역의 삼국시대 밭 유구도 고랑, 이랑의 간격이 거의 같다. 이것은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로의 변화의 방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그 속에는 많은 내용이 함축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를 들면 두 가지 이상의 작물을 섞어서 파종하거나 추가로 파종하는 비율이 줄고, 동일 포장 내에 여러 가지 작물을 다양하게 재배하는 방식에서 점차 벗어나서 한 가지 작물의 재배 단위가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철제 기경구나 쟁기 사용으로 기경이 쉬워지면서 고랑 파종이 점차 줄고 이랑 재배가 늘어나는 것 등이다. 만약 이러한 추세 파악이 틀리지 않는다면 대평리의 밭 유구 중에서도 고랑과 이랑의 너비 비율이 크게 차이 나는 것은 비율이 같은 것에 비해 오랜 방식에 속하는 것이고, 고랑과 이랑의 너비 비율이 같은 것은 상대적으로 발달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랑과 이랑의 형태는 기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재배 작물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고려도 아울러 필요하다.
--- p.252~253, 「Ⅱ부 농업생산기술의 발전」중에서
특히 백제 지역은 기후나 자연환경이 논농사에 아주 유리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초기부터 관개시설 축조와 논 개발 기사가 자주 나온다. 고고학적으로도 중부 지방의 철제 농기구와 작물유체 자료 분석을 토대로 백제 국가 형성기에 경기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수전 농경의 확대에 따른 전문화가 진행되었을 것이란 견해가 있다. (중략) 그리고 부여 궁남지에서 발굴된 목간에 “매라성 법리원에 있는 수전水田 오형五刑” 운운하는 구절이 적혀 있어 백제시대에 이미 수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모두 논농사가 백제 농업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전해 준다. 고고학자료상으로도 전북 지역 2~7세기 고대 취락의 각종 유구에서 출토된 작물 분석 결과에 의하면 쌀이 가장 많고(33%), 다음으로 두류(27%), 맥류(21%), 잡곡(기장, 조, 12%) 순서로 나타난다. 여기에 쌀 압흔이 확인된 유적과 유구를 추가하면 쌀의 비율은 더욱 높아져서 단일 작물로는 논농사의 비중이 제일 컸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 p.262~263, 「Ⅱ부 농업생산기술의 발전」중에서
경제 활동에서 식용 자원 생산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섬유 자원 생산이다. 신라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누에를 길러 명주실을 뽑고 대마를 재배하여 삼베를 짰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기록에 마한과 진한에서는 이미 누에를 길러 비단을 짰다는 기록이 있다. 『양서』 신라전에도 신라는 뽕나무와 마를 많이 심어 비단과 삼베를 짰다고 한다. 그리고 『주서』 백제전에는 백제는 명주실(견사絹絲)과 삼베(마麻)를 세금으로 거둔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신라에서도 삼베와 명주는 중요 징세 품목이었다. 통일신라시대 촌락문서에 의하면 촌락마다 논밭과 구분하여 1결 남짓한 넓이의 마전麻田이 별도로 표시되어 있다. 또한 삼베를 관리하는 마전麻典이라는 관부가 있었다. (중략) 신라 국가는 각 촌락마다 몇백 그루씩 뽕나무를 심어 기르게 하고 이를 관리하였다. 그리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영 수공업 공장에서 세금으로 거둔 명주나 생사를 원료로 삼아 비단을 염색하고 직조하였다. 비단 생산을 주관하던 관부로 염궁(染宮: 염색을 담당하는 곳), 금전(錦典: 비단 짜는 곳), 조하방(朝霞房: 조하문의 비단을 짜는 곳) 등을 두었다. 명주 생산과 관련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뽕나무, 산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을 기록하였는데 뽕나무 재배처로 기록된 곳은 양잠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곳이다.
--- p.340~341, 「Ⅲ부 백제, 신라 지역의 산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