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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1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300쪽 | 348g | 130*200*18mm
ISBN13 9791193412237
ISBN10 119341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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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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끈적이는 방바닥에 귀를 바짝 붙인다. 고롱고로롱고로롱. 물소리보다 노랑이의 배 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워터파크의 기다란 미끄럼틀을 떠올린다. 노랑이와 내가 이 아래 하천 바닥을 미끄럼틀 삼아 바다까지 흘러가는 장면. 엄마가 있는 요양병원은 원래 바다가 있던 자리에 지어졌다. 그 땅 아래도 바다라면 이대로 거기까지 흘러가 엄마를 보고 오면 좋겠다. 가능하다면 이모도 함께. 이모도 아직 살아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치고.
---「오르내리」중에서

솨아아,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바람이 분다. 느티나무 이파리가 손을 크게 흔들자 매미가 운다. 할매가 준 화분의 깻잎이 흔들리고 내 등도 순간 선득하다. 이 바람은 곧 계단과 골목을 따라 구석구석 웅크린 집들을 방문할 것이다. 올라가입시다, 사람들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가다가 엄마가 있는 병원 창문에 잠시 기대겠지. 그리고 곧 바다에 닿는다. 올라가자는 인사를 바다에 남기며. 그러면 바다는 오래 기다린 것처럼 바람을 보낼 것이다. 산을 향해 오르는 축축한 짠 바람을. 올라가입시다. 모두의 인사에 대한 대답처럼.
---「오르내리」중에서

저, 이래 봬도 구름감상협회 회원입니다. 2004년에 영국에서 만들어진 구름옹호 단체거든요. 우리 협회 선언문에 그런 말이 있어요. 우리는 구름이야말로 대자연의 시이며 최고의 평등주의자라 생각한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란하늘주의를 만날 때마다 맞서 싸울 것을 맹세한다…. 종알종알, 거짓말인지 참말인지 은주는 꿈에 젖어 있는 표정으로 선언문을 암송했다. 수현은 은주가 가리킨 구름을 보며 분명 존재하는데도 결국 없는 것이라면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었다. 아, 그래서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면 나는 뜬구름을 잡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도망자의 마을」중에서

휴가를 오기 전에는 아침마다 상상했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한숨이 깊어서 지구는 곧 땅이 꺼져 멸망이다.’ 땅 꺼짐은 큰 싱크홀로 이어지고 이 깊은 구덩이들은 지구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구멍이 된다. 그 구멍 속으로 세상 나쁜 것들이 굴러떨어진다. 살인, 방화, 전쟁, 질병, 마약, 종교, 국가, 신념, 믿음, 희망, 대출, 야근… 이것들은 점이 되어 저 멀리 우주로 둥둥 흘러간다. 이 땅 꺼짐의 시작은 회사의 내 책상부터여야 한다.
---「점점 작아지는」중에서

수안은 옥자가 엄마지만 불편했다. 탁월한 선택만 하는 옥자가 뽑은 유일한 꽝이 자기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릴 땐 인정받으려 노력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흠 잡히지 않으려 애썼다. 수현이 결혼할 때 옥자는 살던 집을 줄여서 돈을 보탰고 아이를 낳았을 때는 병원 소속 약사인 수현을 대신해 육아를 해 줬다. 투석을 받으러 다닐 때가 되어서야 옥자는 모든 일을 쉬었다. 아픈 사람이 혼자 살 수는 없다며 가족과 친지가 등 떠미는 바람에 수안은 옥자와 살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둘을 돌보려고 일까지 그만둔 수현 앞에서 수안이 내밀 수 있는 거절 카드는 없었다. 일에 치여 살다가 평화를 찾아 부산에 내려왔는데 더 큰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뽑기의 달인」중에서

고무야, 나는 가끔 서울에서 처음 살았던 고시원을 떠올려. 창문도 없는 좁은 방의 사방 벽. 그곳의 방에서 팔만 뻗으면 닿던 그 벽들은 내 울타리였지만 동시에 함부로 만질 수 없는 남의 벽이었거든. 아버지의 집에서 살 때도 내 방이지만 내 방이 아닌 기분이 자주 들었는데 고시원은 다른 차원에서 내 방이 아니더라고. 그래도 그런 벽이라도 가지려면 돈을 벌어야 하니까 야근도 하고 주말 알바도 했던 거거든. 살아가야 하니까. 형편이 나아져서 원룸에 살게 되었어도 그런 상황은 똑같더라. 그런데 여기로 이사를 오고 나니 그렇게 고생스럽게 일을 했던 게 아득하다. 누워 있는 이 방의 사방 벽이 내 거라고 생각하면, 쫓겨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 벌써 마음이 부자다.
---「벽, 난로」중에서

사람 전으로, 쑥과 마늘을 먹기 전의 곰으로 돌아가고 싶다. 사람 따위 전혀 모르는 곰으로 살다가 곰으로 죽는 삶을 살아야지. 그렇게 못 한다면, 나는 만들어지기 전으로, 나라는 것의 씨앗이 발생하기 이전으로 돌아가겠다. 애초에 없던 사람 아니, 없던 곰이 되겠다. 겨우겨우 사람 모양으로 사람 구실 하고 살게 되었지만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벅차다. 지긋지긋한 하루에 빗금을 치며 오늘, 오늘을 보낸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떤 것으로도 태어나지 않은 상태, 그 시간으로 돌아가겠다.
---「비로소, 사람」중에서

우리 동네 여자들의 도망치기, 달리기 역사는 유구하다. 남자가 집을 두고 도망갔다는 소문은 들어 본 적 없다. 장기 외박이 존재할 뿐이었다. 여자들은 곗돈을 들고 도망가고, 불륜을 저질렀다고 도망가고, 노름판에 빠져서 도망가고, 지루박 춤 선생을 초빙해 춤을 추다가 들이닥친 남편을 피해 도망갔다. 대개는 돈이 무섭거나 남편이 무섭거나 자기 자신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경우였다. 그렇게 치면 우리 엄마 또한 유력한 도망 예정자다. 아빠는 하루가 멀다 하고 노름판을 쏘다니며 빚을 졌으니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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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일이 누군가를 부르는 일과 같다면 소설 또한 같을 것이다. 정말로 이정임 작가의 소설은 누군가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 같다. 저물녘에 들려오는 기척 같다. 가끔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길을 걷다가 문득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런 때 말이다. 무섭기는커녕 이대로 내 갈 길을 가도 되는지 돌연 망설여지는 그런 때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정임 작가의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누군가의 창문 앞을 지나가고 있는 듯한 느낌에 여러 번 사로잡혔다. ‘있는데 없고 없는데 있는’ 기척들로 가득한 길에서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표정들을 마주친다면, 우리 중 누구라도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이대로 내 갈 길을 가도 되는지, 잠시 멈춰 서야 하는 건 아닌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줄곧 그런 마음이었다. 일상의 기척들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이야기, 그 이야기들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마음으로 읽어 가면서 나는 이정임 작가의 소설이 오랫동안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로 남길 바랐다.

약속하건대, 멀어졌다가 가까워지는 마음이 오르내리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팟’ 하고 반짝이는 빛의 순간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작아지면서 멀어지고, 사라지면서 반짝이다가 다시 팟 하는 순간’을 기다리게 될 텐데 다행히 나는 다시 한번 그 순간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렇게 팟, 팟 반짝이는 여러 순간들로 채워진 삶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믿음이 바로 이 책에 있다.
-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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