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4부로 나누어진다. 1부 “삼위일체와 인간”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과 근대성의 몇몇 사상적 패턴 및 실천 간의 만남을 탐구한다. 2부 “삼위일체와 종교 전통”은 삼위일체 교리가 오늘날의 몇몇 중심적인 교회 및 종교 간 문제들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한다. 3부 “삼위일체와 신론”은 하나님의 내적인 삶과 이것이 세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교의적 성찰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4부 “삼위일체와 역사신학”은 기독교 전통이 오늘날의 삼위일체적 사유에 제공하는 자원들을 비판적으로 탐구하는 데 집중한다.
--- 「서문」 중에서
단순한 결합과는 달리 친교는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전제한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 따라서 그리스도인들―그리고 확장하면 모든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방식과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 사이에는 유사성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본성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근본적으로 결정한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런 유사성 때문에 산상수훈에서 예수는 불가능하고 낯선 명령처럼 들리는 내용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처럼…되어라”―그리고 따라서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것처럼 행동하라(마 5:48).
--- 「1장 하나님처럼 되기」 중에서
재산은 항상 그것이 인간에게 자유를 제공해줄 것이라고 약속했다. 재산이 있다는 것은 생계를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거나 노예로 전락하거나 의뢰인이 되거나 운명에 무방비 상태로 남겨질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민사회의 역사에서 재산이 있는 사람들은 자유, 독립, 책임을 지닌다고 여겨졌다. 재산은 자유와 안전을 약속하는 한편 지배하려고 위협하기도 한다. 재산과 지배는 밀접하게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재산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고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부정하기 쉽다. 따라서 재산은 남을 지배하려는 위협이 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재산의 종류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생명에 대한 접근인 재산은 재산을 지닌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을 생명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배제할 힘을 부여하는 재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사람을 독립적으로 만드는 재산은 다른 사람들을 의존적으로 만드는 재산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자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소명을 실현하는 수단이지만 후자는 다른 이들의 인간성과 자신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수단이다. 재산은 생계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삶을 위한 힘과 생계로부터 배제되는 것으로서 죽음을 위한 힘을 모두 의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심오한 모호성을 지닌다.
--- 「2장 사회적 삼위일체와 재산」 중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간단히 말할 수 있다. 존중이 타자와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그리고 신뢰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경외는 생명의 모든 차원의 도덕적 지위와 가치를 기꺼이 인정하는 올바른 태도다. 그러므로 경외의 감수성과 선의 내용으로서의 화평 혹은 성화를 혼용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실천을 일으키는 감수성과 감수성의 기준과 목적으로서의 선을 혼동하는 것은 종종 슈바이처의 윤리학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인간은 생명에 대한 도덕적 감수성이 부족한 때도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사랑은 말할 것도 없이) 경외, 존중, 신뢰 같은 고상한 동기들뿐만 아니라 의무감 그 자체만으로도 그렇게 해야 한다.
--- 「3장 생명의 영과 생명 경외」 중에서
만약 신학자들이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신학은 신학이 필요한 곳에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러한 대화들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자기중심적으로 살고, 생각하고, 글 쓰는 것을 피하도록 돕는 실제적인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화하는 친구들의 범주가 우정에 관한 고전적인 모델에 따라 우리 자신들과 비슷한 사람들로 제한된다면, 그것이 비록 가능한 갈등과 오해, 혼란을 피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변화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는 것은 놓치게 만들 것이다.
--- 「4장 “‘친구’라고 말하고 들어오라”」 중에서
베스터만의 분석에 따르면, 창세기의 최종 편집자들은 이스라엘 주변의 이웃들과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 받은 세계의 기원에 관한 창조 이야기들을 차용했는데, 그 이야기들이 우주의 생성론을 제시하는 데 기여했다. 창세기 1-3장이 드러내는 창조 이야기들은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대대로 인간실존을 가능케 하는 힘”이자 홍해에서의 이스라엘 구원의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선결 조건인 모든 것의 근원인 하나님의 창조적인 축복을 강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범죄와 징벌 이야기들(예컨대 3장의 아담과 하와, 4장의 가인과 아벨, 6장과 7장의 홍수, 9:18-28의 노아의 아들들)도 모두 같은 기능을 한다. 그 이야기들은 다른 문화들로부터 차용되어 태곳적 시간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축복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강조하도록 편집되었다. 나아가 “죄, 죄의식, 반항”은 “이스라엘의 죄와 같이 하나님과의 오랜 만남 끝에 생겨난 어떤 결과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 자체에 내재되어 있고 따라서 모든 곳, 모든 사람에게 만연하게 나타나는 어떤 것”임을 표현하도록 편집되었다.
지혜문학의 창조 이야기는 풍부한 표현 혹은 자연스러운 놀이라는 내러티브 논리를 따라 전개된다. 하나님은 창조하는 행위 자체를 기뻐하는 존재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관계 맺기 안에서 인간들이 그들의 유한한 에너지를 사용해 그들 자신을 위해 피조물로서의 일상성 안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지혜롭게 반응하기를 원한다. 이는 어떠한 종말론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나 유한성이라는 일상성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물론, 이를 하나님이 창조행위 안에서 피조물들을 종말론적 완성으로 이끌어 가거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창조세계를 회복하고 구원할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러한 하나님의 관계 맺음은 하나님이 창조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해 다르게 이야기하는 다른 내러티브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들과 구분되어야 한다.
--- 「5장 지혜, 신학적 인간학, 현대의 세속적 인간학」 중에서
몰트만의 사고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 자체의 본성, 특별히 종말론적 기대 안에서 시간을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자이자, 신학자로서 나는 과거가 계속해서 진화과정을 통해 영향을 끼치는 양상을 신학적인 차원에서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진화하는 피조세계, 곧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가 함축적으로 표현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피조세계는 시간성의 열매를 통해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어두움, 곧 개별자들이 자신들의 유한성(transience)으로 인해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주어야만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창조세계에는 이와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종류의 시간시간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 시간은 현재 세계가 열역학적 법칙을 따라 개별자들을 다시 무질서로 돌려보내는 것과는 다른 형태의 시간성을 보여줄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시간시간이 현재 세계의 시간과 같이 단선적(linear)일 것이지만, 그 연속적인 실현은 구원받은 존재들로 하여금 신적인 본성의 풍성함을 끝없이 향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한한 존재들이 무한한 신적인 실재와 관계를 맺는다면 이런 방식의 영원한 과정에 대한 계시가 필연적으로 주어질 것이다.
--- 「6장 위르겐 몰트만과 자연과학의 대화」 중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기획연구를 바탕으로 출판된 세 권의 저서들에, 특별히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 나타난 몰트만의 교회에 관한 관점들은 이미 도전적이고, 유익하며, 나아가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후기 저작들에 녹아져 있는 그의 교회에 관한 견해들 또한 그러하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저항하면서, 그리고 그러한 저항을 정당화하는 신학을 전개하는 데 있어 그의 신학은 유익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역할을 감당했다. 그 당시 남아프리카공화국 내 모든 개신교 교단을 포함해, 모든 기독교 전통과 공동체 사이에 중요했던 교회의 일치를 위해 노력하는 데 있어서 또한 그의 사상은 직접적인 적절성을 지녔다.
--- 「7장 자유 안에서의 교회 일치」 중에서
인간의 죄와 유한함이 지속되는 한 우리는 결코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성령의 시대를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요한1서 4:1이 이야기하듯이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나 분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분별함에 있어 잠정적일 수는 있지만 기준이 되는 무언가기준이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 신학은 예수의 삶이 그러한 시금석을 제공한다고 이야기하는데, 필리오케필리오케 문구의 삽입자들이 바로 이러한 통찰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는 이미 예수의 이름으로 악행도 자행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삶과 그가 추구한 가치의 기준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있지 않은 운동들에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바탕으로 하는 운동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성령은 “그가 원하는 데로 분다”(요 3:8). 아무도 그 움직임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영은 생명의 주님이며 수여자이지 죽음을 주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 차이를 구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 「8장 성령의 길을 예비하라」 중에서
몰트만에게 그리스도의 사역 및 십자가 처형과 부활에 중심을 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는 기독교가 타 종교와 관계를 맺는 데 대한 그의 이해의 배경을 형성하고 그 방향을 결정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형태이고 삶을 긍정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의 종교들 역시 이 역사에 어떻게든 포함되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몰트만에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보편적 범위는 그리스도 사건의 독특성을 결코 감소시키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과 구원에 대한 기독교의 독특한 이해가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대한 수치스러운 특수성에 의존함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다원주의의 이데올로기나 무기력한 관용 교리에 일치시키기 위해 기독교 종교신학에서 이 추문이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들 사이의 참된 대화는 최소의 공통분모를 발견하는 것에 기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대화 상대들의 특수성과 온전성에 대한 인정과 존중에 의존한다.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십자가가 없는 기독교가 있을 수 있는가? 샤리아가 없는 이슬람이 있을 수 있는가? 성지가 없는 유대교가 있을 수 있는가?” 다원주의가 환원주의의 형태가 되고 이데올로기에 치우쳐 종교들의 특수성을 무시하게 될 때 이런 다원주의는 정직한 대화를 위한 진정한 시작이 아니라 그것을 실패로 돌아가게 만들기 때문에 몰트만은 이런 다원주의를 거부한다.
--- 「9장 삼위일체와 종교신학」 중에서
나는 기독교 종교신학의 적절한 목표는 종교들을 그것들 자체로 이해하는 것과 주의를 기울여 그 종교들에 경청함으로써 나올 수도 있는 진리의 증언에 열려 있기 위해 기독교 신학 자체 안에서 그 근거들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타 종교들을 존중하는 주의 깊은 경청은 그들의 주장에 대한 진정한 개방성, 즉 그런 주장들이 기독교의 증언을 긍정하는지, 기독교의 주장들과 모순되는지 또는 그것들과 다를 뿐인지를 미리 판단하지 않는 개방성을 요구한다. 종교적 타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종교 간 대화와 상호 검토를 통해 나올 수도 있는 다양한 가능성에 마음을 열도록 요구한다. 모든 종교가 거짓이라는 일반화가 타당성이 없듯이 모든 종교가 참이라는 일반화도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종교적 타자에 대한 진정한 존중은 타자의 주장들이 참이거나 거짓이고, 적실성이 있거나 적실성이 없고, 지혜롭거나 어리석을 수 있을 가능성을 열어두라고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종교적 타자가 거짓이라는 공허한 일반화들이 존중하는 자세가 아니듯이 타자 안에 필연적으로 진리가 존재한다는 공허한 일반화들도 (상당히 덜 위험할지라도) 존중하는 자세가 아니다.
--- 「10장 배타주의와 절대주의를 넘어서」 중에서
한편으로 현재의 지배적인 젠더 고정관념들을 교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개관할 때 몰트만은 젠더에 관한 계몽주의 견해와 낭만주의 견해 모두―평등 및 구별 안에서의 상호성에 관한 입장들―에 명시적으로 호소할 수 있다. 여기서 몰트만은 남성을 “지배” 또는 “남자다움”과 연결하고 여성을 “감성” 또는 “감정”과 연결하는 분리적인 고정관념들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격하하고 양성 모두에게 억압적이며, 세속 문화에 못지않게 교회의 전통에도 깊이 영향을 끼쳤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몰트만은 젠더에 관한 세속 이론들을 사용해서 부패한 문화와 교회에 맞서는 비판적 무기로 사용한다.) 다른 한편으로 몰트만이 어떻게 삼위일체 신관만이 신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소위 하향식으로, 따라서 “은유적으로”보다는 “문자적으로”) 이런 경향들을 교정할 수 있는지를 지적할 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젠더에 관한 특정한 세속적 견해들이 여전히 규범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남는다. 더욱이 몰트만 자신이 때때로 인정하듯이 단순히 (소위 “동방” 교회의 것이든 “서방” 교회의 것이든) 정통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것 자체로는 하나님에 관한 비가부장적 또는 비위계적 시각에 대한 보장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삼위일체론도 부패할 수 있다.
--- 「11장 삼위일체와 젠더에 대한 재고」 중에서
하나님의 완전성에 관한 피조물의 지식은 하나님에게서 나온다. 그것은 계시된 지식으로서 그 기원과 실현은 우리의 손을 벗어난다. 완전한 하나님은 계시자로서 자기의 모습 그대로 피조물에게 자신을 나타낸다. 신학적 이성이 하나님의 자기현시의 이런 움직임을 적절하게 따르려면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그 경륜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는 근거는 하나님이 자신 안에 성부·성자·성령으로 존재하는, 자유롭게 선행하는 완전성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피조물들에게 현시할 때 비로소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내재적 존재는 단순한 잠재력, 즉 하나님의 외부(ad extra) 활동의 경륜에서 현실화하는 “계시를 향한 존재”(being-towards-revelation)가 아니다. 계시에서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자신에게 현존하고, 자신에 의해 알려지는 모습대로만 자신을 피조물에게 현존하게 하며, 피조물에게 알려지게 한다. 계시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계시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의(in se) 완전성을 창조된 시공간에서 반복한다. (현대 삼위일체 신학에서 많이 무시된) 이 첫 번째 진술에 모든 것이 의존한다. 이 진술이 없다면 하나님의 활동들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표류하며 근거 없는 활동이 된다. 성육신 신학에서 육신이 되는되는 말씀의 영원한 신성에 관한 단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대목의 의도는 하나님의 활동으로부터 분리된 어떤 추상적인 신성을 제안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이 참으로 하나님의 활동임을 단호하게 진술하려는 것이다.
--- 「12장 하나님의 완전한 생명」 중에서
결정론의 색채를 다소 완화하고 그것을 자유와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종종 신적인 인과성과 피조물적인 인과성 사이의 비대칭성에 주목하는 아퀴나스 신학의 맥락에서 이뤄져 왔다. 신적인 차원에서 원인 개념을 사용할 때, 그 개념은 피조물 된 우리에게 명확하지만은 않은 유비적인 방식으로만 사용 가능하다. 인과관계에 대한 우리의 일차적 지식을 이끌어내는 우발적 사건들의 사슬 없이 하나님은 어떤 시공간적 연속성 안에서 하나의 연결고리로 축소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이 발생하는 사건들에 부재하거나 관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최종 목적을 보존하고, 확보하며, 실현하는 데도 하나의 인과적 역할이 요청된다. 이 역할은 피조물적 원인들의 우발성을 파괴하기보다 보장한다. 그러므로 신적 인과성과 피조물적 인과성을 이해할 때, 우리는 두 인과성 사이의 관계를 한 쪽이 더 많이 가지면 자동으로 다른 쪽은 적게 가지게 되는 제로섬 게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두 가지 형태의 인과성 사이의 유비적 관계는 상호배제가 아닌 상호수반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 관계는 등장인물들이 자유로운 선택, 기질, 상황 및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기반해서 움직이는 연극의 유비로 이해될 수 있다.
--- 「13장 하나님의 섭리와 행동」 중에서
지각이나 이성에 직접 접근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 성취되었고 현재 실행되고 있으며 미래에 실현될 실재들을 열어주는 신적 자기 계시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그 질문들에 관해 추측해왔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여러 세기에 걸쳐 그 질문들에 대한 다양한 답변이 제시되어왔다. 여기서 제시되는 것은 주로 재활성화된 성령 기독론에 기인하는 사변이다. 성육신 전의(ante incarnationem) 신적 영원성의 차원과 관련하여 삼위일체의 세 위격은 그들의 형상을 따라 지어지고 자율성을 부여받은 지적이고 사랑하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잠재적 창조세계가 실재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이 형상을 따라 지어진 존재의 핵심인 값없는 은혜를 수용하거나 거부할 수 있다는 예지를 항상 소유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적인 세 위격이 다양한 정도로 은혜를 유지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창조된 종족에게 자유의사로 그들 자신을 영원히 계시할 수 있었다는 통찰로 이어진다.
--- 「14장 삼위일체 신학에 대한 통로로서의 성령 기독론」 중에서
인간사에서 하나님이 정의를 시행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삶 내부의 정의를 반영한다. 인간사에서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삼위일체 내부의 사랑을 통합하는 정의를 반영한다. 따라서 서로 정의롭게 대우할 때 우리는 단순히 정의롭게 행동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세계 안에서 정의를 시행하는 것을 단순히 모방하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내적 삶을 반영한다.
--- 「15장 삼위일체에 정의가 존재하는가?」 중에서
문화가 없이는 자연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환경을 문화적으로 점유하는 것에 관해 본질적으로 수치스러운 점이 전혀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창조세계를 신학적으로 결합한 바실레이오스의 작업이 우리에게 보여주었듯이 환경에 대한 모든 접근이 죄책과 슬픔의 원인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축하와 칭송의 이유를 제시해줄 수도 있다. 우리가 인간이 지상의 생태에 끼친 영향이 순수한 복이 아니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우리는 그 점을 인정해야 한다), 자연과 문화 사이의 오랜 관계가 이미 결정된 극심한 재난이었던 것도 아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어느 때보다 자연에 관한 새로운 시학, 즉 창조세계라는 책을 볼 새로운 눈과 그 책을 읽을 새로운 해석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침묵과 내면의 고요함, 우리의 세상이 “표현 불가능하고 탐구 불가능한” 지혜의 문지방이라는 점에 대한 인정도 필요하다. 창조세계에 대한 몰트만 교수의 종말론적이고 기독론적인 접근법에서 우리는 그리스 교부들―그들도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 하나님, 그 리고 우리와 지구를 공유하는 지혜롭게 만들어진 피조물들 사이의 균형을 회복하고자 했다―의 유산에 빚을 지고 있는, 지배적이지 않은 새로운 방 식의 관점과 행동을 발견한다.
--- 「16장 종말론과 기독론」 중에서
던과 몰트만은 3세기 이상 떨어져 있다. 그들이 삼위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해설할 때 그들의 삶, 세계, 특정한 관심사에는 큰 차이가 있다. 던은 몰트만이 아우슈비츠 이후 십자가의 삼위일체 신학을 전개하리라고 예상하지 않는다. 던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하나님께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질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시인은 삼위일체의 친교라는 주제를 탐구하지도 않으며 사회적 삼위일체 교리로 잘 알려지지도 않는다. 던의 개인적 필요와 삼위일체로부터의 사랑의 자비에 대한 그의 소망이 우리가 검토한 여섯 편의 시를 지배한다. 그는 자신의 죄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자신의 필요에 몰두한다. 그는 관계 안의 세 위격으로부터 그리스도인과 인간의 삶을 질서 지우기 위한 근본적인 사회적 교리를 끌어내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던과 몰트만 둘 다 그들이 모두 증언하는 뚜렷한 기독교적 사업에서 삼위일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강력한 확신을 갖고 삼위일체에 관해 쓴다.
--- 「17장 존 던의 삼위일체 이해」 중에서
사무엘 클라크의 사례는 20세기의 저자들에게 성경의 내러티브의 틀 밖에서 취한 전제와 정의로 시작할 때 초래되는 위험들을 암시해주었을 수도 있다. 일반적인 용어인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지배를 지니는 단일성으로 정의되든 존재와 근원으로 정의되든 간에 이 단어로 시작하면 믿음과 예배에서 삼위일체가 너무 쉽게 종속되는 것으로 보인다. 덕은 전통적인 예전적 용법이나 이해로는 아닐지라도 자신이 삼위일체를 확고하게 믿는다고 주장한다. 클라크도 자신의 견해가 완벽하게 정통이라고 주장했지만 그의 예전적 제안들은 유니테리안주의자들에 의해 열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채택되었다. 결국 클라크의 사례는 토머스 마쉬(Thomas Marsh)가 지적하듯이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한다. “자신의 기도에서 인간은 자기의 신의 이름을 짓고 그 신에게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도의 구조는 여기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을 드러낸다. 즉 이 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는 진실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게 당신의 기도를 말해주면 내가 네게 당신의 신을 말해주겠다.’”
--- 「18장 삼위일체적 믿음과 예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