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복궁역은 많은 사람으로 붐비었다. 저마다 걸음을 재촉하는 시간, 2번 출구에서 세 사람이 만났다.
“이분이 문 작가님이세요.”
강조숙이 복지선에게 문방구를 소개했다.
“제가 사랑해마지않는 복지선 언니예요.”
“처음 뵙습니다잉. 문방구라고 헙니다.”
“흐흐흐…. 웃으면 안 되는데 죄송해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방구의 이름을 듣고는 복지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따, 초면에 인사험시로 아리따운 여자분 앞에서 뿡뿡거리겄소. 나, 그렇게 무식헌 사람 아니어라우. 앞으로 잘 봐 주시요잉.”
문방구가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세 사람이 향한 곳은 드림정이었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서 쭉 걷다 보니 우리은행 효자동지점 건물이 눈에 띄었다. 오른쪽으로 우리은행을 두고 한참 들어간 골목 끝에 기와집이 한 채 있었다. 정문에 〈드림정〉이라는 간판이 보였고, 돌계단 다섯 개를 올라서 일행은 안으로 들어갔다. 드림정은 감동문학 김정란 주간이 운영하는 정육식당이다.
“아이고, 강 부장님, 문 작가님 어서 오세요.”
김정란이 강조숙과 문방구를 보자 반색하며 맞이했다. 조촐한 방에 세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자리를 잡았다. 강조숙과 복지선이 벽 쪽에 나란히 앉고 문방구가 두 여인을 보고 앉아 삼각형을 이루었다.
“오늘 만나서 겁나게 반갑구만요. 한 잔 어떠싱가요?”
불판에 삼겹살이 노릇노릇해지고 지글지글 고기 익어가는 소리가 수백 개의 파열음으로 식탁을 채우고 있을 때, 문방구가 복지선에게 맥주 한 잔을 권하였다.
강조숙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빙긋 웃고 있었다.
강조숙과 복지선은 교회에서 만났다. 강조숙은 수년 전부터 문학 활동을 해온 터라, 맥주 한 잔쯤은 자연스럽게 마시었다. 그러나 복지선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더구나 둘의 만남에는 술이 필요 없는 만남이었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그들 사이에 문방구의 개입으로 복지선이 술잔 받는 장면이 강조숙에겐 흥미롭기만 했다.
“누가 이 언니 업어가는 사람 없을까요?”
어느덧 술기운이 얼굴에 홍조를 만들 즈음, 강조숙이 오른손으로 복지선을 가리키면서 두 눈은 문방구를 향하여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이 말의 심오한 뜻을 문방구가 알아들을 리 없었다. 강조숙과 복지선은 20년지기다. 천호동 모 교회에서 만난 지 어느덧 20년이 되었다. 강조숙은 복지선보다 세 살 아래였으나, 서로 공대하며 임의롭게 지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언제 어디서 수다를 떨어도 좋은 사이요, 어떤 화두로 이야기꽃을 피워도 뒤탈이 없고 나중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봄바람이 동쪽에서 불어도 좋고, 남쪽에서 불어도 훈훈한 것처럼 그들의 만남과 그들의 이야기는 늘 아기자기하고 소소한 케미가 있었다. 딱히 정하진 않았지만, 서로 상대에게 부담스러운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았고, 그저 일상에서 지지고 볶고 데치고 튀기며 지냈던 소소한 이야기를 소재로 해도 그들의 이야기는 얽히는 일도 없고, 막히는 일도 없고, 부딪히는 일은 더더욱 없어서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언짢은 적이 없었던, 궁합으로 말하자면 찰떡궁합, 그 이상이었다.
남녀의 만남은 처음엔 솜사탕처럼 달고 맛이 있어도 자주 만나다 보면 때때로 의견 충돌로 불꽃이 튀기도 하고, 그로 인해 삐치고 토라지고 어르고 달래고 지랄을 하는 게 다반사인데, 그들 사이에는 그 어떤 이물질도 끼어들 틈이 없는, 그야말로 죽이 척척 맞는 만남이었다. 그렇다고 두 사람의 성격이 비슷하거나 같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성향이 다르기에,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데 딱딱 들어맞고 성격이 정반대인데 바람처럼 자연스럽고 멋들어지게 조화를 이루는 것에 놀라운 아이러니가 있다 할 것이다.
단 하나, 강조숙이 내심 안타까워하는 건 복지선이 혼자라는 데 있었다. 일찍이 남편을 딴 세상으로 떠나보내고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사는, 그런 그녀를 생각할 때면 가슴이 쓰라리게 아프곤 했다. 그래서 오늘, 일부러 문방구를 만나는 자리에 그녀를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은연중에 속으로만 앓던 말 “누가 이 언니 업어갈 사람 없을까?”를 토로했던 것이었다.
2
“문 작가님, 하남에 같이 가실래요?”
커피숍에서 편집회의를 마치고서 강조숙이 물었다.
“하남이요?”
“네, 지난번 드림정에서 만났던 지선 언니가 하남에서 빵집을 하고 있어요. 그 언니 보러 같이 가요.”
“그랑께, 시방 중매허시는 거요, 나를 장개 보낼라고? 오메, 그런 기특헌 생각을 허신다요? 나는 꿈에도 생각을 못 했는디.”
“좋잖아요. 문 작가님도 혼자이시고 지선 언니도 혼자인데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서 마음 맞으면 사귀고 사귀다가….”
“사귀다가 그다음에 머시다요?”
“사귀다가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냥 계속 사랑하는 거죠.”
“그러고 봉께 꿍꿍이속이 있었구만이라. 갑자기 복지선 씨를 데리고 나타나서 먼 일잉가 했당께요.”
“문 작가님! 제가 그 언니 20년 동안 봐 왔어요. 정말 괜찮은 여자예요. 남자 보는 눈은 여자보다 남자가 더 잘 안다고 하잖아요. 그건 맞는 말이에요. 여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 알아요. 그 언니, 여자가 봐도 진짜 좋은 여자예요. 아직 젊은데 이대로 늙어가는 건 너무 아깝잖아요.”
“여자는 여자가 더 잘 안다는 말이 꽤 설득력이 있는디요.”
“저도 사람을 많이 겪어 봤지만, 지선 언니처럼 속 깊고 변함없는 여자는 정말 드물어요.”
“변함없는 여자라는 것이 머시다요?”
“음, 그러니까 사람 마음이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그러잖아요. 그런데 지선 언니는 변함없는 거예요. 여자라고 다 같은 여자가 아니에요. 지선 언니는 심지가 곧고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비바람이 몰아쳐도 흔들림이 없어요. 한 번 결심한 건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아름다운 성격이에요.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여자, 멋있잖아요.”
변함없는 여자란 그야말로 뼈 때리는 한마디였다. 그리고 변함없는 인격의 소유자라는 건 굉장한 인물 추천이었다.
“그럼, 복지선 씨한테 가 봅시다.”
천호동에서 하남은 그리 먼 길이 아니다. 천호역 근처에서 하남시로 가는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면 되는 곳에 복지선 씨가 운영하는 빵집이 있었다.
“어머, 어서 와요. 문 작가님도 오셨네!”
복지선이 문방구를 금방 알아보고 반기었다.
“언니도 보고 빵도 먹고, 이야기도 하려고 왔어요.”
“그래, 잘 왔어요.”
“언니, 여기 만두하고 찐빵 좀 주세요.”
테이블이 대여섯 개 있는 자그마한 빵집이었다. 손님은 없었고, 복지선과 그의 친정어머니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강조숙에 의하면, 복지선의 형제는 딸만 다섯이라 했다. 복지선 위로 두 명의 언니가 있고, 아래로 두 명의 여동생이 있어서, 복지선은 다섯 자매의 딱 가운데 셋째 딸이었다. 어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무척 강한 분이었는데, 딸만 줄줄이 둘을 낳았고 세 번째는 여러 정황상 아들이라는 확신이 들어서 마음을 아주 편하게 먹고 지냈고, 낳는 날까지 아들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바람 때문이었을까? 비록 딸로 태어났지만, 그녀는 줄곧 부모님을 모시고 아들 노릇을 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문 작가님, 어땠어요?”
강조숙이 빵집에서 나와 한참 걷다가 문방구에게 물었다.
“머시 어때요?”
“참나! 지선 언니 보러 갔잖아요.”
“만두도 맛있고요. 빵도 맛있고….”
“그리고요?”
“지선 씨는 소탈한 게 매력이드만이라. 자연체라고 헐까요. 전혀 낯가림이 없고라잉. 전에 만났을 때도 늘상 만난 사람마냥 너무너무 자연스럽드랑께요.”
“그 언니, 볼수록 괜찮고 만날수록 매력이 있어요. 성격이 진중하고 깊이 생각하는 스타일이에요. 끈기도 있고, 느긋하고 편안한 게 지선 언니 특징이죠. 상대편의 말을 귀 기울여 잘 들어주는 편이고, 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호기심도 많은 편이에요. 언제나 차분하게 대화하니까 처음 만난 사람은 언니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언뜻 보기엔 대개 편하게 보이지만, 아주 편한 성격은 아니죠. 어떤 일이 있을 때 생각을 많이 하고, 혼자 삭히는 성격이에요. 한마디로 표현하면, 외유내강형이라고 할 수 있죠.”
“근디, 어머니는 늘 같이 계싱갑소잉?”
문방구가 복지선의 어머니에 대해 궁금해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옛날 조선 시대의 유명한 인물, 퇴계 이황이 있잖아요. 그분 가정에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둘째 며느리가 있었대요. 그런데 둘째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 갑자기 죽어버린 거예요. 퇴계는 평생을 외롭게 살아갈 며느리가 심히 걱정스러웠지만, 그때는 유교를 숭상하던 시대였고, 유교적 규범 때문에 천하의 퇴계도 안타까운 심정으로 며느리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대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집안을 둘러보던 퇴계가 며느리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는 걸 발견한 거예요. 분명히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퇴계는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거죠. 점잖은 선비로서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며느리 방을 엿보게 되었대요. 조심스럽게 문구멍으로 들여다보니, 며느리가 술상을 차려놓고는 짚으로 만든 인형과 마주 앉아서, 글쎄 그 인형에게 말을 건네고 있었던 거예요.
「여보, 한 잔 드세요.」
그러고는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하염없이 흐느껴 울더라는 거죠.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서 퇴계는 청춘이 창창한 며느리를 재혼시키려고 작정하였고, 며칠 후 며느리에게 심부름을 시키고는 귀가가 늦었다는 걸 트집 잡아서, 조선의 법을 어겼다면서 친정집으로 내쫓았고, 나중에 그 며느리는 재혼했다는 얘기를 읽은 기억이 있어요.”
“어째서 그런 얘기를 허시요?”
“그러니까 지선 언니도 퇴계의 둘째 며느리와 비슷한 현상이 있었대요. 어느 날, 지선 언니 방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나더라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란 거죠. 이러다가 딸 하나 놓치겠다 싶더래요. 그때부터 친정어머니가 곁에서 지선 언니를 보살피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 일이 있었구만이라잉. 갑작시럽게, 사랑허는 남편이 저 시상으로 싹 가불믄 사람 환장해불것지라잉.”
마치 문방구가 복지선의 남자나 된 것처럼, 강조숙은 그녀의 신상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모든 걸 전수해주려는 듯 버스가 천호동에 도착할 때까지 쉼 없이 일러주었다.
---「행복한 사내」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