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내가 문학을 오랫동안 동경했던 이유가 바로 그러한 되새김질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늘 늦되지만 과거의 어느 순간들을 약속처럼 되짚으며 등장하는 여러 작품들 덕분에 나는 당시엔 미처 알지 못했던 생경한 감정들,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급작스러운 사건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계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아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본래의 장면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는 문학 텍스트를 통해 세계의 작동 방식을 접했고, 재빨리 오가는 현실의 말 대신 시간의 마모와 퇴고를 거친 지면의 글들을 점차 신뢰하게 되었다. 그것들은 분명 세계를 비추는 굴절된 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보다 진실에 가까운 왜상이기도 했다.
그런 작품들조차 결국 누군가가 애써 읽지 않으면 영원히 독해되지 않는 공백의 상태에 놓이곤 한다는 사실이 괜히 안타까웠다. 그 빈칸을 어떻게든 채워 보고자 했던 서투른 애호의 마음들은 점점 내가 매혹되었던 감정의 이유를 해명하고 행간에 췌언을 덧붙여 그들의 언어와 나란히 함께하고 싶은 욕망들로 바뀌었고, 그렇게 문학 비평을 해 왔던 시간과 원고들이 하나둘 쌓여 어느새 이만큼의 뭉치가 되었다. 이걸 무어라 해야 할까. 그러니까 아마도 이건 반복된 세계의 또 다른 되풀이일 것이다.
---「서문」중에서
앞서 상영되는 재난의 미래와 그에 연극처럼 덧붙는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전미래(Le Futur Anterieur)’ 시제라는 개념을 잠시 끌어와 보자. 전미래 시제란 프랑스어에서 사용되는 시제의 명칭인데, 미래보다 앞서 발생하는 미래를 뜻한다. 알랭 바디우는 이 개념을 자신의 철학적 논의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 그는 주체의 실천적 가능성을 설명하는 용도로 이를 활용했다. 전미래에 무언가가 발생할 것이라는 주체의 믿음 혹은 선언이 새로운 진리 사건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진취적인 미래의 뉘앙스를 시인의 발화에서 전혀 읽어 낼 수 없는 것은 아니나, 앞선 시편들에서 이미 발생한 것으로 간주되어 상영되는 근미래의 주된 정서는 어쩔 수 없이 재난과 파국에 가까운 듯싶다. 참혹한 풍경을 전미래로 앞당겨 경험함으로써 이 세계의 시적 주체들이 얻게 되는 이득은 과연 무엇일까.
어림짐작을 해 본다면 예지몽과도 같이 구현된 세계의 반복 속에서 그들은 일종의 안도감을 얻는 것 같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상한 것을 너무나 많이 봐서 면역이 되었는지도 몰라”(「자각몽」). 이미 최악의 상황은 발생했다는 사실, 애초부터 나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어떤 주체들에게는 삶의 위안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당겨 와 선취한다기보다는, 파국으로 흘러가고 재현될 자신들의 미래를 지켜볼 뿐이다. 그것은 일인칭의 ‘내가’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삼인칭의 ‘나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가깝다. 그 속엔 대상에 불과한 나 자신을 그저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우울감과,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된다는 안도감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듯하다.
---「사회학적 재난과 미학적 주체의 대응」중에서
시나 소설을 창작하려는 이들뿐 아니라 평론을 쓰려는 사람들에게도 으레 매혹적인 전범으로 남았던 저자나 텍스트가 있다. 다소 치기 어린 학부 시절, 여러 고전 중에서 반복하여 읽어도 쉽게 마모되지 않는 매혹을 줬던 비평가는 내겐 아마도 발터 베냐민과 김현이었던 것 같다. 우울한 파리를 사랑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독일 철학과 유대주의 신학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았던 베냐민과, 역시나 말라르메와 바슐라르를 사랑했던 불문학자이긴 했으나 1960~1980년대의 한국문학을 비평하며 활동했던 김현 사이에서 어떤 공통점을 느꼈는지는 미지수이다.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당시의 내게 그들의 비평은 건조하다기보다는 다소 축축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건대 그것은 해당 비평가들의 분석과 문장이 지닌 어떤 단독적인 주관성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비평에는 이론적인 날카로움과 더불어서, 그들이 분석하는 시편들처럼 단숨에 소진되지 않는 모호한 매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원텍스트보다 베냐민과 김현이 바라본 해석적 틀과 시각을 통해, 보들레르를 접했고 한국의 시인들을 읽었다.
---「김수영의 시와 김현의 편파적 사심에 부치는 글」중에서
미국의 비평가이자 연구자였던 시모어 채트먼은 헨리 제임스의 후기 소설을 분석하면서 생각과 문체 사이의 상관관계에 관해 흥미로운 언급을 남겼다. 그의 분석을 빌리면 후기 제임스 문체의 특징은 ‘생각의 물질화’ 또는 ‘정신 활동의 주체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당신은 충분히 당당하지 못하다.(You are not proud enough.)”라는 내용의 문장이 그의 후기 소설에서는 대부분 “당신의 자신감은 충분하지 않다.(Your pride falls short.)”라는 식으로 변주되어 사용된다. 의미상으로는 양쪽이 거의 유사한 뜻을 지니고 있으나 본디 ‘당신’이 차지하고 있던 주체의 자리는 문체의 변화와 함께 ‘당신의 자신감’이라는 명사화된 주어로 대체되었고, 이처럼 추상적인 동사들이 부러 앞으로 배치된 제임스의 문장은 ‘무형의(intangible)’ 생각이나 마음들이 주체로 부각되는 일정한 경향과 맞닿아 있다고 채트먼은 이야기한다.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든 무의식 중에 발현된 것이었든, 유형의 인물들이 차지했던 주어의 자리는 후기 제임스의 문장들 속에서 이제 추상적인 무엇들의 몫이 되었고, 그때 인간은마치 텅 빈 그릇처럼 무형의 감정들이 담기는 용기의 일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니까 어떤 언어의 형식들은 그것을 발화하는 존재들의 형태 없는 마음 그 자체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사랑의 슬픔과 사랑의 그릇」중에서
이처럼 임국영의 소설들은 ‘세계’와 ‘관계’를 의도적으로 맞닿아 놓는다. 「코인노래방에서」의 주인공인 ‘나’가 좋아하던 ‘정우’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도 두 인물들이 팝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어서였고,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에서 만경이 수진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 또한 만화영화를 둘이 함께 시청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세계와 관계의 교차는 소설의 형식으로도 잘 드러난다. ‘보글보글’ 게임의 구조와 두 주인공의 관계가 교차되어 형상화되었던 것처럼, 「코인노래방에서」의 ‘나’는 연인이 부른 「비밀정원」의 노래 가사를 매개로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던” 비밀스러웠던 관계를 고백하고, 웨스트라이프의 「마이 러브(My Love)」의 가사와 당시 정우에게 느꼈던 감정을 교차하여 술회한다. 「어크로스 더 투니버스」의 경우는 보다 직접적이다. ‘투니버스’라는 제목처럼 만화로 구성된 세계관을 지닌 ‘만경’은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와 12간지의 상호 관계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세대의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만화의 관점에서 주변 인물들을 바라보고 스스로의 존재적 한계를 규정짓는다. 자신은 그 세계의 주연이 될 재능이 없다고 여기는 만경이 수진을 그토록 흠모했던 이유도 그녀가 “다른 인물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프레임과 작화”로 묘사된 주인공 캐릭터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앞서의 작품들이 그러했듯 만화 주인공의 대사와 등장인물의 상황을 교차시켜 서사를 진행해 나간다. 이는 소설의 형식적인 기법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사랑했던 세계와 인물들의 관계가 뗄 수 없을 정도로 얽혀 있는 탓에 드러나는 필연적인 겹침이기도 할 것이다.
---「그토록 사랑했던 세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