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만주국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1932년 3월 1일 중국 동북지방에 홀연히 나타나, 1945년 8월 18일 황제 푸이(溥儀)의 퇴위 선언과 함께 졸연히 모습을 감춘 국가, 만주국. 그 생명은 겨우 13년 5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기서 살았던 일본인에게는 오히려 국가의 종언이야말로 진정한 만주국 체험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소련군의 침공, 본국 귀환, 혹은 시베리아 억류* ─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 처참함을 경험한 뒤에야 비로소 개개인은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던가, 그 자신은 만주국에 어떻게 관계해 왔던가 하는 물음을 되물으며 다양한 만주국상을 그려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만주국의 다종다양한 형상의 편린들은 수많은 수기와 회상록 속에 아로새겨져 있어 지금도 우리들은 그것을 살펴볼 수 있다.
--- p.15~16, 「서장 만주국에 대한 시선」중에서
만몽이 일본의 생명선이라 불린 것은 그것이 식민지 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소련과 중국에 대한 국방상의 최전선으로 간주된 것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니까 만약 소련이나 중국이 만몽에서 압도적인 세력으로 일본을 구축(驅逐)하게 되면 일본의 조선통치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우려가 만몽에서 일본이 세력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되었던 것이다. 1924년 5월 외무성 ·대장성 ·육군성 ·해군성의 협정으로 작성된 〈대지(對支)정책강령〉이 “만몽의 질서 유지는 해당 지역에 대한 중대한 이해관계, 특히 조선 통치상 제국에 아주 중요하고 이를 위해 항상 최선의 주의를 기울”인다고 규정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타가키도 또한 “만약 러시아가 국경을 넘는다면 조선 영유는 시간문제”라고 하며 소련의 위협을 강조하면서 조선 방위를 위해서라도 만몽 영유가 불가결함을 역설했다.
--- p.49~50, 「제1장 일본이 살아날 유일한 길」중에서
이시하라는 22일의 방침안에 대해 “9월 19일의 만몽 점령 의견을 중앙이 일고(一顧)도 하지 않고, 또한 다테카와 소장조차 전혀 동의하지 않아 도저히 이를 수행할 수 없음을 알고 만곡(萬斛)의 눈물을 삼키며 만몽 독립국안으로 후퇴하였다. 최후의 보루는, 호기가 다시 찾아오면 곧 만몽 영토론이 실현되는 날이 있음을 기약하는 것이었다”라는 의견을 기록하고 있다. 만곡의 눈물을 삼키며 후퇴하여, 기회가 되면 숙원인 만몽 영유 실현으로 전환하기 위한 최후의 진지, 그것이 이시하라의 만몽 독립국안이었다. 1928년 이래 이시하라를 중심으로 관동군이 가다듬어 왔던 만몽영유론은 그것이 실시되기 직전에 육군 중앙의 거부로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p.81, 「제2장 만몽에 거주하는 각 민족의 낙토가 될지니」중에서
이처럼 만주국 정치를 결정했던 것은, 괴뢰국가 ·보호국화라는 국제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표면상으로는 현지 중국인의 자주적 발의의 의해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형식을 취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관동군의 지도하에 일계 관리에 의해 일본의 통치 의사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실현하는가 하는 요청이었다. 일만 정위이건, 일만 비율이건, 총무청 중심주의건, 내면 지도건 모두 국법상의 권한과 사실상의 권한이라는 양면성을 표상하면서도 그 어긋남을 호도하기 위한 미봉책이며 권모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러한 표면과 내면의 괴리라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주국으로 하여금 “영원히 우리 국책에 순응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일 ·만 관계의 기조가 되었던 것이다.
--- p.203, 「제3장 세계정치의 모범이 되려 함」중에서
이 증언을 소개한 오쿠라는 그것이 결코 중국인 측에서 나온 일방적인 견해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재만 일본인의 증언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신국가에 대한 불평의 원인으로는 아편 전매관?헌병?경찰관의 횡포, 일계 관리의 전횡, 자위를 위한 총기의 몰수 등을 들면서 “만약 지금 군대가 물러난다면 일본인은 전부 살해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 있으며 또한 군부 고관도 “지금 만약 일러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군 가운데 10개 사단 정도는 만주인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의 증언은 아마도 현지에서 일상적으로 타민족과 접촉하고 있던 사람들의 거짓 없는 실감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들 증언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중국인 고관이 든 것 대부분을 관동군과 일계 관리가 사실로 인정하고 있었다.
--- p.264~265, 「제4장 경방의 장책은 항상 일본제국과 협력동심」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