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비판적 절망에 대한 급진적인 목소리들을 진지하게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희망 이야기는 전혀 진실되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희망은 쉽사리
단순한 낙관주의로 퇴행한다.
--- p.15
아마도 욥이 아주 솔직하게 자신의 절망을 품었기 때문에, 마침내 창조세계의 야생적 아름다움에 대한 위대한 우주론적 계시를 소용돌이 바람 가운데 받는 은총을 누릴 수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 불/가능성이 깨어져,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린다. 따라서 여호와(YHWH)를 희망하는 것은 함께 엮임을 느끼는 것―즉 하나님과 함께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함께 엮임을 느끼는 것이다.
--- p.16
우리는 독립적이 됨으로서 의존성을 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성의 역량을 강화함으로써 의존성을 탈피한다. 다시 말해서 독립적이 된다는 것은 ‘의존성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상호의존성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 p.21
필자가 제안하는 트랜스페미니즘이란 다음을 말하기 위함이다. 어느 페미니즘이 실현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그 페미니즘이 항상 여성성을 넘어선, 여성들의 운동을 넘어선, 또한 어떤 단일한 이슈나 관점 혹은 상황을 넘어선 운동이기 때문이다.
--- p.25
우리는 자신 안에 있는 이 거짓된 규범들로부터 자유를 얻어야만 한다. 푸코가 분명히 밝혀주고 있듯이, 권력은 근원적으로 외부에서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안에 내재화된 훈육하는 힘으로 행사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요점은 모든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엮는 것이다―마음으로 온전히 말이다. 즉 의식적으로 말이다. 관계는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중립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상호의존성에 대한 인식은 ‘해방하는 선’이다.
--- p.26
하나님은 위대한 베짜는 분이다. 희망의 연대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발견한다. 그리고 모든 피조세계를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 모두 말이다.
--- p.27
“지금-순간”(now-moment)이라는 개념은 은연중에 정치적이며, 그래서 이와 같은 순간에 즉 명시적으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는 이 순간에 신학이 지금-순간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밝히는 것은 의미가 있다. 신학은 이미 항상 정치적이며, 정치는 항상 이미 신학적이다.
--- p.3
나는 예외에 대한 대안은 시작, 곧 새 출발이라고 제안한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를 암시하지만, 무로부터의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우리 상황의 혼돈으로부터의 창조를 말한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 사이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정치신학에게 그것은 카이로스의 새로움이 놀이를 펼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 p.44
시작은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기표들의 차이를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들을 구별하고 분리하는 이원론을 중단시킨다. 혹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 다른 종교의 성육신 간의 이원론을 중단시킨다. 이를 위해 필자는 상호적 체화에 대한 성찰을 제안한다: 우리의 관계적 얽힘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육체가 되신 하나님. 얽힘은 이런저런 관계의 목조름이나 옥죔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신비한 상호의존성이다. 즉 세계의 살림이다. 시간상의 점들이 아니라 거미망의 교차점들이다. 크로노스 안에서가 아니라 카이로스 안에서 말이다.
--- p.48
그래서 나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전개하는 정치신학이, 그래서 무로의 종말론을 향한 직선적 시간표를 따라가도록 만드는 정치신학이 현재 시제의 잠재력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물질에 대한 어떤 대안적 이해가 가능할까? 계시록 초반에 말씀을 공표하는 묵시적 메시아가 그 단서를 제공한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만약 알파와 오메가가 한 사람으로 함께 육화한다면, 그것은 시간 자체의 본질에 대하여 무언가를 말해준다.
--- p.56
우리는 철저한 상호의존성 안에 있는 지체로서만 물화하기 때문에, 우리 각자 안에서 체현되기를 추구하는 로고스는 모든 사람, 모든 것 그리고 모든 다른 존재들과 우리의 상호의존성속으로 우리를 부른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심연으로부터 그리고 새로움으로 부르는 존재이다.
--- p.65
신의 로고스는 독재 권력이나 우주적 통제의 공식이 아니다. 이 로고스는 ‘포에시스’ 즉 유혹하는, 끌어당기는 그래서 모든 물질적 피조물들의 응답을 통해 물화하는 시학(poetics)이다. 그래서 신학을 말하는 대안적 방식으로 신시학(theopoetics)이라는 말을 예전보다 더 빈번히 듣게 되는데, 여기서 포에시스는 ‘만든다’는 의미이다. 신시학은 우리 모두의 상호적-육화들을 통한 하나님의 만드심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만드심은 단지 성공 대 실패의 이분법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신시학적 만들기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창조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창조의 모든 순간에 알파와 오메가로서 말이다.
--- p.66
‘상호적 육화’의 은유는 성육신이라는 상징에 반대되는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육신은 항상 기독교에 내재하는 잠재성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기독교의 고유한 통치주권적 배타주의들을 초월해 왔기 때문이다. 즉 성육신은 신성의 급진적 재분배 가능성을 제안한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늘과 땅”의 얽힌 물질성에 대한 인식을 제안한다. 성육신은 모든 육신과의 상호활동, 즉 모든 물질성과의 상호활동을 의미할 수 있다. 이러한 얽힘의 우주는 예수의 삶을 무한히 선행하며 초과한다.
--- p.73
성육신 교리가 땅(the earth)의 몸들, 곧 우리의 상호적 육화가 엮어내는 내재성으로부터 풀려나 분리되어 버리려 할 때, 우리는 그에 저항해야 한다.
--- p.76
구원될 수 있는 것을 포기하지 말고, 내버려 두어야할 것을 내버려두자.
--- p.88
나는 기후 변화와 연관하여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구절을 새로운 대기와 새로운 땅이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그때 이 새로운 대기와 땅은 위에서 아래로 하달되는 초월의 작업이 아니라, 집단적 변혁의 희망을 상징화할 것이다. 급진적 변혁의 희망 말이다. 우리 서로에 대한 그리고 모든 사물에 대한 우리의 내재적 관계들로부터의 초월의 희망이 아니라, 그 관계들 안에서의 초월의 희망 말이다. 유일한 초자연적 성육신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교리주의를 비워낸 치유사역의 희망 말이다. 그것이 우리의 상호적 육화가 담지한 몸의 연대를 강화하는 치유사역의 희망이다.
--- p.90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물론 신정론의 문제이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는가? 그리고 바로 거기에 권력과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문제의 신학적 핵심이 놓여있다.
--- p.93-94
이 절망에 대한 정직한 대답은 무엇인가? 어떤 종류의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과정신학은 그에 적절한 대안적인 목회신학과 정치신학을 제시해 주고 있는가?
--- p.96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의 느낌은 복음서에서 그리고 과정 신학에서 모두 다음을 의미한다: 특정 순간들에서 세계 내 실재하는 악이 너무도 완전하게 고난을 강화시키고 있어서, 더 나은 세계의 가능성이 사라져 버린 듯 한 상황. 그때 하나님의 능력은 그 자신의 선함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권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그 모순이 짧게 잘릴 때, 절망이 상처로부터 피가 되어 흘러내린다. 그렇다. 기독교 이야기에서 절망은 곧 며칠 내 치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p.105
‘신으로부터-버림받음’의 느낌이 일어나도록 놔두자! 아마도 그 느낌 없이 우리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어떤 특별한 순간에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세계를 포기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계가 그 순간에 하나님을 저버렸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역시 세계로부터 버림받았다면, 누가 우리와 함께 고난에 동행해 줄 수 있을 것인가?
--- p.106
그래서 창조세계 자체를 대신하여, 기독교적 공동체를 포함한 우리의 공동체들을 창조적 활동성으로 부르는 것, 즉 그 공동체들을 새로운 창조의 희망을 두드려보는 작업으로 부르는 일은 곧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이 ‘삶과 생명을 만든다’. 그 사랑이 절망을 치유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사랑이 최종의 해결책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랑이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 p.107
우리의 슬픔을 슬퍼하고, 우리의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느끼면서, 그리고 우리가 ‘신과-함께-연결되어있음’(godrelatedness)을 새롭게 느끼면서, 우리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 p.108
사실 밧모섬의 요한은 어느 미래의 사실들을 예고하고 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언자들은 사회적 패턴들을 읽었다: 사회적 패턴들은 매우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생각보다 오래 지속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대부분의 성서 예언들이 그렇듯, 일련의 비전들을 이야기한다. 그것들은 미처 생각해보기 쉽지않은 대안의 관점에서 문명의 패턴들을 비판한다.
--- p.121
요한은 그 패턴들을 바다와 땅의 두 짐승들로 꿈읽기하였다. 그것들은 로마제국의 세계 권력에 대한 암호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등장하는 바빌론의 큰 음녀(the Whore of Babylon)는 로마 시대 세계무역을 상징하는 코드이다.… 그리고 그 날선 끝자락에서, 지구 온난화는 요한 서신의 꿈읽기로 읽혀질 수 있다: 일곱 번째 봉인이 극적인 휴지기 이후에 열린다. 땅의 수목의 삼분의 일이 불타고 있고, 바다 생물의 삼분의 일이 죽어가고... 독수리가 비통해 한다: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계시록 8장) ‘땅에 사는 자들 즉 거주자들이란 지구행성에 사는 모든 생물을 의미한다. 단지 인간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대량 멸종에 직면하여, 그 고대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얼굴, 그 독수리의 얼굴은 이제 생태적 한탄이라 불리는 것을 이미 소리내어 울부짖고 있지 않는가?
--- p.122
사랑의 힘은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기 위해서 행동한다. 영감을 주고, 유혹(lure)하기 위해서 말이다. 신적인 유혹(the divine lure)이란 과정신학의 핵심개념이다.… 사랑은 통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를 위해 거기에 존재한다. 기도는 그 사랑을 향해 자신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이다. 그 기도가 보다 사랑이 풍성한 가능성의 실현을 덜 불가능한 것으로, 즉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
--- p.129
마주한 모든 것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변화될 수 없다.
--- p.130
희망, 그것은 가능성의 포용이다. 그러나 희망은 포용할 가능성들의 물화(物化, mattering)를 필요로 한다. 이미 물질화의 길을 발견하고, 보다 더 큰 성육신을 요청할 가능성들의 물화 말이다.
--- p.143
생태문명은 땅을 지향하는 존재의 맥락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 p.147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가 탈세계적 종말론과 인간 중심의 구원론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 p.160
인류는 지구를 떠나 도망갈 곳은 없다. 그러나 같은 장소를 다르게 살 수는 있다.
--- p.162
그래서 라투르는 “우리는 땅에 속해 있고, 대지의 것들 중의 대지의 것들이다”라고 강조하며 “자연에서 대지로 관심을 바꾸면 기후 위협 이후 정치적 입장을 얼어붙게 하고 사회 투쟁과 생태 투쟁 사이의 연대를 위태롭게 했던 단절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 p.162
파괴적 기후변화 속에서도 기독교의 종말은 파국적 결말이 아닌 실패에 대한 직면과 고통에 대한 공감으로 모든 것 들과의 공존의 가능성으로 우리를 이끄는 힘이어야 한다. 즉 우리는 서로에게 모든 것을 빚져 있기 때문에 세상에 우리에게 문제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육신은 예외적인 성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과 함께 만들기’(theopoiesis), ‘만물 중에 만물 되기’이다.
--- p.167
얽힘의 관계성 가운데 인종, 계급, 성의 교차를 숙고하고, 또한 생명파괴의 문명을 반성하며 대안적 생태신학 담론을 구성해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지하며 신비를 열어 놓아야 한다.
--- p.179
하나님은 하나이고 전체이며, 유일하고 신비한 존재로서, 이러한 알 수 없는 신비는, 오히려 ‘없는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다고 유영모는 말한다. 한님, 큰 님은 더할 수 없이 큰 님으로 그래서 ‘무’로 표현되기에, ‘없이-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 유영모의 생명신학은 지구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방향을 제시하며, 거주 불가능한 지구로 변하는 현재 상황을 반성하게 한다.
--- p.186
오늘날 우리는 “미래 없는 탄식이 아니라 탄식 없는 미래에 주목”해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없이 부활을 기대하고, 죽음과 출산의 고통 없이 쉽게 새 것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와 확신은 철저한 탄식에 의해 폐기되어야 한다.
--- p.206
하지만, 팬데믹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신앙적 태도는 탐욕스런 우리 삶과 세상에 대한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비판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에 대한 직접적이고 희망적인 확신이다.
--- p.209
우리는 ‘남자란 누구인가’ 혹은 ‘남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 속에서 찾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언어는 이미 구조화되어 있어서, 우리의 말은 이미 언급되지 않은 (찰스 테일러가 말하는) ‘사회적 상상’(social imagery) 속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쟁위주의 구조 속에서 남자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좌절당한 남성이 자신의 남성다움을 확인하고 과시하는 상대방, 즉 여성이 어떤 위치에 놓여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 p.212
소위 ‘남자’가 여성을 혹은 페미니즘을 알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존재한다. 그것은 비존재로 취급받는 여성들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신 스스로가 비존재의 자리로 내몰리면서도, 여전히 자기는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남자라는 허위의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스스로에 대한 진정한 성찰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시대는 남성이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할 것을 요청한다.
--- p.214
이 구조로부터의 해방은 단순한 남/녀의 이분법만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하다. 오히려 억압받고 차별받는 다양한 집단들이 서로 소통하고 연대하면서 각자의 접층에서 진정성 혹은 성스러움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통해서만 진정한 해방이 가능할 것이다.
--- p.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