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예배 전쟁”이라고 부르는 혼돈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무엇이 우리가 드리는 대부분의 예배와 기독교 및 유대교에서 드려진 최고의 예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지를 무시하고 있다. 문제는 우리가 예배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예배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배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의 어느 편에 서 있든지 예배의 목적은 신자 개개인을 하나님과 관계 맺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분명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people of God)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일에서 예배의 필요성이다. 예배는 나 혹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거나 예배가 내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런 예배는 어떻게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새롭게 해 준다.
--- p.31-32.
특정할 수 없는 이른 시기부터 기독교 예배는 두 개의 중요한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말씀 예전”(service of the Word)이며, 두 번째는 “성찬 예전”(service of the Table)―다시 말하자면, 성찬식으로 알려졌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말씀 예전에 참석할 수 있었지만, 성찬 예전이 시작되기 전에 떠나야 했다.
--- p.113
만찬은 그 이름이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것, 즉 한 끼 식사였다. 식사를 위해서 각자는 능력이 되는대로 가져와서, 모두 그것을 나눠 먹는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바울이 염려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은 모이기는 하지만 나누지는 않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너무 많이 먹지만, 어떤 이들은 주리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후에 “사랑의 식사”(meals of love), 보통 애찬(agapes [아가페])이라고 불리는 공동 식사를 보게 될 것이다. 비록 바울이 그 식사를 언급할 때 애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위에서 인용한 구절 직후에 나오는 고린 도전서 13장 전체가 유명한 사랑장(agapes)으로서, 그것은 고린도 교회를 파괴하고 있는 악에 대한 그의 대답이다.
--- p.151
대단히 다양한 의견과 관례들을 인정하면서도, 초대교회가 성찬을 집단적 인 차원에서 이해했음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례가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성령님의 활동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에 합해지는 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또다시 동일한 성령님 덕분에 성찬식은 몸을 양육하고, 하나로 만든다. 이 행사의 중심은 개인이 양육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로서의 공 동체가 양육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약 세례가 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인다는 것이라면, 성찬은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들이 포도나무의 수액으로 양육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유대-기독교 교회는 자신의 십자가에 대한―그 신앙의 진정한 중심이었던 하나님의 어린 양의 희생에 대한―기억으로 살았다. 하지만, 성찬식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만 아니라 미래를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 약속된 미래는 성찬식이 수반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커져가는 일치였고, 모든 것은 성찬식에서 미리 맛보았던 어린 양―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혼인이라는 큰 잔치로 이어졌다.
--- p.155
따라서 교회 전체적으로 신약의 정경을 발전시키고, 성직 계급의 권위를 증진하며, 이단이라고 간주하는 견해들에 반하여 공동의 신앙을 확인하기 위해 세례의 신조를 제정하고, 그 외 많은 다른 방법으로 더 큰획일성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설교 자체는 종종 다른 목적, 청중, 그리고 상황 들을 반영하면서, 그런 획일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시기의 몇 개의 설교와 다른 문서들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한 가지 핵심, 즉 목적이 있다. 그 목적은 회중이 자신을 고대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향하여 한 몸으로 행진하는 광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일부로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 p.203
비록 교회는 이미 로마 제국 대부분에 있었고, 제국의 경계 너머까지 확장되었지만, 이 기간의 말까지 교회는 여전히 엄청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박해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배는 교회가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증하고 강화하는 주된 방도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억압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예배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자신들의 주님의 권능과 최종적인 승리를 믿는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동체는 증오로 반응하기보다는, 자신들을 제사장 같은 사람들이라고 이해했고, 황제와 그 들을 박해한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여전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모든 소망에 저항하는 소망을 품었다. 그들은 대 박해가 시작된 지 10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거의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p.297-298.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예배는 개인 신자의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하나님께서 그 신자에게 하는 대답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전체 백성이 하나님께 말하는 찬양과, 하나님이 그 백성에게 대답하는 것이다. 예배 목적의 일부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를 형성시키고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형성은 주로 개인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모양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창조하신 이 백성 안으로 우리를 접붙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참된 시민권이 이미 있는 최종적인 왕국을 위해 우리가 준비하는 것은 동료 시민으로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항상 기억되어야 하는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을 개인뿐만이 아니고, 혹은 개인이 주가 아니라, 지체 모두를 하나의 백성으로서 공동으로 만들고 강화시키는 것이다.
--- p. 426-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