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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희 | 아침달 | 2024년 03월 14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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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3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166쪽 | 220g | 125*190*12mm
ISBN13 9791189467579
ISBN10 1189467577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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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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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알기 위해서 무엇이 되기 위해서
선잠에 들었다 깰 때
가져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할 때
밤이 긴 곳에서 불면이 이어질 때
실패하기 위한 실패도 있다는 것을 들었을 때
이불 위에서 변기 위에서 초조할 때

핀란드나 아이슬란드나
먼 극지의 호텔에서 한밤중 손님을 깨워준다는
오로라 콜을
내 방에서 기다리지

정말 그러면
나도 그것을 볼 수 있을 것 같고
빛의 휘장을 따라
달리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 「오로라 콜」 중에서

예수승천대축일을 맞아
물놀이를 하러 온 몸들이 많았어요

랑헨의 계절은
벗고 뛰노는 몸들이 있어
여름으로 향해 가고

가슴을 드러낸 여자들과 남자들이
수면을 넘나들며 햇살을 끌어당겨요

모래사장 위에는
커다란 비치타월을 들고
어린아이의 몸을 닦아주는 사람이 있고
작고 젖은 몸이
반짝이고 있고
--- 「랑헨에서」 중에서

서로의 몸이 닮기 위해 꼭
가족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아간다

우리도 태어나기 전에는
춥지 않았었는데

그곳으로부터
한참을 떠나와버렸다
--- 「창문 없는 방」 중에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밥맛이 좋았지
가족이 많아진 게 오랜만이어서
동생이 없던 내가 동생이 다섯이나 생기고
할머니는 너무 오래 살았대
많이 낳고 또 낳아
나중에 우리를 다 못 알아봤지
--- 「내실」 중에서

아기를 버리고 달아나던 엄마들
기억을 모포처럼 뒤집어쓰고
경사진 길을 내려가던 모습

십자가를 등진 여자들의 그림자마다
빛이 드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문밖에서 주워 온 아기가 있고 안으로 와서 버려진 아기가 있고 아기들 중에서 유독 뽀송뽀송한 아기가 있고 그 아이에게 고추가 없으면 금방 새 부모를 만난다는 이야기 세상 오직 여기에서만 여자를 선호한다는 이야기
--- 「아기 침대 열두 개」 중에서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현재 이 순간에도 쓰고 있다는 사실 그것뿐이다 나는 지금 막 머릿속으로 시 한 편을 떠올리고 있다 그것은 자연스레 도약하고 있다 그것은 스스로 탈주하고 있다 그것은 저절로 완성되고 있다 다만 언어에 빚질 뿐 노래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던 것처럼
--- 「독자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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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치고 지나가는 빛의 휘장

오로라는 빛의 현상에 불과한데, 그 빛의 휘장은 왜 영혼을 치고 지나가는 걸까.
여기 한밤중 전화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 일어났을 때만 울리는 전화가 있다. 바로 ‘오로라 콜’이다.

전화를 기다리는 장소는 나의 방. 어쩌면 결코 오지 않을 것을 기다리는 것. 무의미한가? 올 것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것.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기다릴 때만 시작되는 태도가 있다. “무엇을 알기 위해서 무엇이 되기 위해서/선잠에 들었다 깰 때/가져보지 못한 것을 그리워할 때(「오로라 콜」)” 그런 불가능이 가능해지는 태도가 열리는 순간 만나게 되는 질문이 있다.

“꽃의 줄기를 해부했던/생물학자들의 밤은 얼마나 고요했을까(「꽃이 죽었다는 것을 언제 알게 되나요」)”
“새하얗고 새까맣고 새빨간 문장이라는 게 있을까(「태초에 마음이 존재했다」)”
“그러니까 진짜 마지막을/그 순간을 알 수 있을까(「종로」)”

이 질문들을 관통하는 것은 ‘지금 나는(혹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것을(존재하기, 쓰기, 죽기, 사랑하기) 수행하는가?’로 수렴될 수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것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일. 또는 이미 다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미 포기했지만 다시 포기해야만 하는 잔디 같은 것들). 오로라 콜을 기다리는 자세와 닮은 질문들이다.

숙희의 시 속 여성은 근래 다른 시들에서는 보기 드문 여성의 욕망과 절망을 보여준다. 희미하고 무성적인 존재가 아닌, 냄새나고 생동감 있는 육신을 가진 여성성.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기는 필요 없지./내가 도착할 곳은 부드러웠던 과거가 아니니까.(「이상형 이분법」)” “모든 착한 여자애들은 죽기 전에 지옥에 갔대(「지나가던 파랑이 검정을 흉내 내며 웃었지」)”라고 발화하는 마음은 어디서 도래했을까?

숙희의 언어에는 욕망이 드러나 있다. 비뚤어진 관계를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은 마치 가시가 많은 거울 같다. 그 안에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우리’, ‘이미 하나인 순간에도 어긋나는 중인 우리’가 끝없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요원함과 절실함의 척추를 꼬아 지어진 허방의 집 같다. 발밑은 까마득하고 머리 위는 충분히 캄캄하지 않은 도중의 집. 그런 집에 기거하는 나의(혹은 연인의) 이야기. 같이 있을 때 오롯이 혼자가 될 수 있는 비극이 가진 환희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 백은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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