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도 반도체가 없어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반도체를 자체 제작한 자신만의 생태계를 만들어 경쟁사가 넘보기 힘든 위치에 올랐다. 엔비디아는 도산의 위기 속에서도 GPU에 소프트웨어를 지원해 AI 시대의 ‘승자’ 자리를 차지했다. 애플은 소비자용에서, 엔비디아는 기업용 시장에서 시장을 선도하고 있지만 결국 두 회사는 이미 경쟁을 예고하고 있다.
---「프롤로그」중에서
애플은 2007년 아이폰을 선보이며 스마트폰용 AP 반도체 시대를 열었다. 애플은 이미 AP 시장을 장악한 기업 대신 삼성전자와 ARM의 도움을 받아 반도체 시대의 새 장을 열었다. 심지어 애플은 AP를 직접 설계하며 팹리스 반도체 업체로의 변신까지 시도했다. 애플이 시도한 변화를 따라 퀄컴, 미디어텍, 삼성전자 등이 본격적으로 AP 개발에 나섰다. 인텔만이 과거의 성공을 견인했던 CPU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결국 철옹성 같던 인텔의 ‘반도체 제왕’이라는 왕좌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장의 흐름은 AP와 GPU로 넘어갔다.
---「1장 AI 모바일 칩 워, 애플과 엔비디아의 참전」중에서
아이브는 잡스가 애플에 복귀한 후 디자인을 중시하던 그와 뜻을 함께하며 아이맥, 아이팟, 맥북 에어, 아이폰을 연이어 선보였다. 모두가 새로운 애플 제품의 디자인에 감탄했다. 그런데 불과 20여 년 만에 애플은 디자인을 강조하던 회사에서 반도체 칩의 성능을 강조하는 회사로 바뀌고 있었다. 디자이너가 반도체 공학을 강조한 것이다. 결국 아이브는 애플을 떠났다. 잡스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었던 아이브의 사직을 공개하던 날 애플 주가는 1% 하락했다. 그뿐이었다. 이후 애플 주가는 파죽지세로 상승했으니 디자인보다 성능이라는 쿡의 선택은 ‘신의 한 수’가 됐다.
---「1장 AI 모바일 칩 워, 애플과 엔비디아의 참전」중에서
애플과 엔비디아는 하드웨어와 생태계를 결합하면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생태계를 연동시키고 있다. 애플은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AI를 모두 개발하고 적용하고 있으며 엔비디아 역시 쿠다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있어 이제는 하드웨어 기업과 소프트웨어 기업의 구분이 무의미해졌다. 그렇기에 인텔의 CPU가 주류였던 시대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무어의 법칙이 GPU를 활용하는 AI 반도체 시대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1장 AI 모바일 칩 워, 애플과 엔비디아의 참전」중에서
반도체 기업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을 부추긴 것이 애플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애플이 ‘애플 실리콘’을 자체 설계하지 않았다면, 큰 성공을 이루는 대신 실패했다면 다른 빅테크 기업들도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빅테크 기업들이 직접 칩을 설계하면 혜택은 반도체 설계를 제공하는 ARM에게도 돌아간다. 당연히 칩을 제조해줄 파운드리 업체의 몫도 늘어난다.
---「1장 AI 모바일 칩 워, 애플과 엔비디아의 참전」중에서
웨슐러의 말에 솔깃해 있던 버핏은 손자들과 패스트푸드 체인인 ‘데이어리 퀸’에서 식사하다가 아이들의 모습에서 애플 투자를 확신했다. 손자들이 아이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을 본 버핏은 웨슐러에게 지시해 본격적으로 애플 주식을 사들였다. 사업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는 버핏의 원칙은 일상에서 확인됐다. 소비자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애플이 미국의 식탁에서 빠질 수 없는 치즈와 케첩을 제조하는 크래프트(버핏의 투자 종목이다)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버핏은 햄버거를 먹으며 눈치 챘다.
---「2장 애플의 반도체 기술이 비즈니스 판도를 바꾼다」중에서
애플 실리콘이 성공한 원인은 애플이 설계를 잘하기도 했지만, ARM과 TSMC의 손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기초 설계는 ARM이 해주고 칩 제작은 TSMC가 해주는 생태계는 파워 PC 실패의 가장 큰 이유인 발열과 비용 문제를 해결했다. 어느 한쪽에 부담이 커지지 않는 구조였다. 마침 TSMC가 미세공정에서 인텔을 뛰어넘으면서 승부의 추는 애플 쪽으로 더 기울고 말았다.
---「2장 애플의 반도체 기술이 비즈니스 판도를 바꾼다」중에서
아이팟은 애플이 PC에서 벗어나 모바일이라는 더 큰 행보를 딛는 기반이 됐다. 아이팟의 성공 속에 애플은 조용히 아이폰 개발을 시작했다. 애플은 아이팟을 통해 모바일 기기에서 반도체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반도체 설계 능력이 없어 전문 기업과 협력했지만 이내 자체 개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뉴턴과 포털플레이어의 희생이 애플 실리콘의 시발점이었던 셈이다.
---「2장 애플의 반도체 기술이 비즈니스 판도를 바꾼다」중에서
라오는 “(AI 개발자) 모두가 엔비디아의 칩을 먼저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미 엔비디아의 AI 칩에서 작동하는 소프트웨어에 익숙한 개발자들이 굳이 다른 칩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개발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엔비디아 경쟁사의 칩을 사들이는 대신 엔비디아의 칩 공급을 기다리는 것이다. 엔비디아의 GPU를 대체하려는 대부분의 시도가 실패하고 엔비디아의 실적이 연일 시장의 기대를 초과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배경이다. 대니얼 뉴먼 푸처럼 그룹 애널리스트는 “놀랍겠지만 엔비디아의 고객들은 18개월도 기다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3장 반도체 업계의 새로운 공룡, 엔비디아」중에서
황은 당연히 TSMC 영업사원 중 한 명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황을 만나러 온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창이었다. 창은 수행원도 없이 홀로 엔비디아를 방문했다. 당시만 해도 TSMC가 대만에 이어 미국에 주식을 상장하며 급성장하던 때다. 엔비디아와 TSMC는 체급이 다른 기업이었지만, 창은 거리낌 없이 단신으로 황을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서 창은 황에게 사업은 어떤지, 필요한 웨이퍼는 몇 장이나 되는지 꼼꼼히 묻고 메모했다. 창의 모습이 너무 진지해 황은 자신이 말한 수치가 맞는지 다시 확인하기까지 했다. 황은 창이 신혼여행 중에 시간을 내어 엔비디아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3장 반도체 업계의 새로운 공룡, 엔비디아」중에서
잡스와 만나는 날, 손 회장의 손에는 아이팟을 전화기로 수정한 디자인 시안이 들려 있었다. 손 회장은 디자인 시안을 잡스에게 내밀었다. 손 회장이 훗날 인터뷰에서 두꺼비같이 생겼다고 설명한 시안이다.
“마사(손 회장의 일본 이름 ‘마사요시’의 애칭), 그걸 볼 필요가 없어요. 이미 우리 것을 가지고 있답니다.”
잡스는 이미 아이폰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잡스가 손 회장이 내민 디자인을 봤어도 맘에 들어 했을 리는 없다. 미니멀한 디자인에 집착하는 잡스가 손 회장이 들고 온 배 나온 두꺼비 모양의 디자인을 맘에 들어 했을 일은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4장 애플 실리콘의 출발점, ARM」중에서
궈타이밍은 애플과 TSMC가 연결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모리스 창 TSMC 창업자의 부인 소피 창이 궈의 사촌 동생이라는 인연도 한몫했다. 우연이지만 궈는 애플과 TSMC 사이에 사다리를 놓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다. TSMC 법률 고문을 지낸 리처드 서스턴에 따르면 궈타이밍은 삼성과 애플의 특허 분쟁이 벌어지자 애플과 TSMC에 서로 힘을 합칠 것을 권했다. 애플과 TSMC가 서로 필요한 관계임을 직감했던 것이다. 애플은 삼성이 아이폰의 특허를 침해했다고 여겼고, 삼성이 아이폰에 칩을 공급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으니 궈타이밍의 진단은 정확했다.
---「5장 애플?TSMC, 동맹 시장을 바꾸다」중에서
창은 애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로 애플의 지식재산권에 대한 철저한 보호였다. 애플은 TSMC가 약속한 지식재산권 보호에 대해 철저히 확인했다. TSMC에서 일하는 직원, 협력사, 고객은 모두 정보 비공개 협약을 맺어야 한다. 해킹을 통한 반도체 디자인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TSMC의 모든 팹 사이에는 강력한 파이어월(firewall, 방화벽)이 있다. 복사나 인쇄를 통해 반도체 디자인 정보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부 프린터는 금속 성분을 포함한 용지를 사용했다. 인쇄한 정보를 외부로 반출하면 금속탐지기가 적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서스턴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애플이 요구하지 않은 수준까지 보안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5장 애플?TSMC, 동맹 시장을 바꾸다」중에서
구글과 삼성의 협력은 대단히 중요하다. 구글과 삼성은 연합전선을 구성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생태계를 형성했다. 화웨이, 샤오미, 오포 등 중국 스마트폰 기업들이 급격히 성장했지만, 여전히 구글은 안드로이드폰에서 삼성과의 협력을 우선시한다. 구글 픽셀은 칩을 삼성에 의존했고, 삼성은 안드로이드 OS에 의존한다. 이러한 협력관계는 픽셀이 아니라 삼성 갤럭시 S24에서 빛을 발했다. 구글의 제미나이가 처음 적용된 것은 픽셀8 프로지만 소비자들의 시선을 제대로 받은 것은 갤럭시 S24였다. 삼성의 하드웨어와 구글 제미나이의 결합은 ‘온디바이스 AI 스마트폰’이라는 화려한 막의 장을 열었다.
---「6장 새롭게 도전하는 반도체 강국들」중에서
퀄컴은 애플과의 갈등에서 승리한 반도체 업체다. 모토로라, 인텔, 포털플레이어, 삼성도 애플과 갈등 끝에 결별했지만, 퀄컴은 오히려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애플을 위협하고도 여전히 애플과 거래하고 있다. 애플은 5년 넘게 모뎀 칩을 개발하고 있지만 퀄컴의 대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히려 퀄컴의 기만 더 살려준 꼴이 됐다.
---「6장 새롭게 도전하는 반도체 강국들」중에서
EUV 기술의 현실화를 위한 판을 깐 인텔은 정작 스스로 장비 도입을 포기하는 결정적인 오판을 했다. 첨단 공정 ‘메이드 인 아메리카’ 칩의 탄생은 그렇게 속절없이 지연됐다. 인텔이 뒤늦게 EUV 장비 확보에 나섰지만, 신속하게 ASML EUV를 도입한 삼성과 TSMC는 이미 한참 앞서갔다. 뒤늦게 ASML이 인텔에 적극적으로 EUV를 공급하는 것은 EUV 탄생에 기여한 인텔에 대한 배려인 셈이다.
---「7장 반도체 왕국 인텔의 몰락, ‘메이드 인 US 반도체’는 살아날 것인가」중에서
그로브는 흔들리는 겔싱어를 다잡기도 했다. 그로브는 스탠포드대학교 박사과정을 다니기 위해 인텔을 떠나려던 겔싱어에게 이렇게 말하고 486 CPU 개발을 맡겼다.
“너는 그곳에서 비행 시뮬레이터를 배우겠지만, 이곳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를 수 있다.”
---「7장 반도체 왕국 인텔의 몰락, ‘메이드 인 US 반도체’는 살아날 것인가」중에서
인텔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애플마저 인텔과 이별을 고한 후 2021년 인텔 이사회는 단 한 사람을 떠올렸다. 12년 전 내보냈던 겔싱어였다. 인텔 CEO라는 꿈을 간직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농장 소년 겔싱어는 꿈을 찾아 돌아왔다. 겔싱어가 인텔 CEO가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2022년 8월 미국의 ‘반도체 및 과학법’이 발효되었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고 미국 중심으로 반도체 산업을 재편하고자 하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이에 따른 미국의 자국 반도체 기업 밀어주기의 최대 수혜자는 인텔이었다.
---「7장 반도체 왕국 인텔의 몰락, ‘메이드 인 US 반도체’는 살아날 것인가」중에서
이미 한국 반도체 업계는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를 돌파해낸 적이 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의 협조 없이는 반도체 공장이 돌아가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쌓이고 축적된 경험이 어느 순간 우리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높은 수준에 올라 있음을 보여주었다.
---「8장 미래 반도체 산업의 지배자는 누구인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