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성들의 무감정함은 장애, 부채, 질병 등과 같이 사회적인 소수성의 지표로도 그려지지만, 이 표상에서 그녀들의 소수성은 뛰어난 역량의 원동력이 된다. 컴퓨터에 능숙하며 타인의 감정에 대한 반응 역량이 부재한 존재로 20대 여성을 표상하는 방식은 새로운 세대 페미니즘에 대해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이른바 ‘온라인 페미니즘’, ‘메갈’, ‘탈코르셋’ 등 몇 가지 클리셰로 환원하면서, 새로운 세대 페미니즘에 대해 이해하거나 파악하는 데 실패한 한국 사회의 특정 역사적 국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또 20대 여성들의 정치화에 대한 이해에 실패함으로써 “20대 여성들은 차별받지 않는다”, “오히려 20대 여성은 경쟁에서 남성보다 우위에 있다”는 식의 역차별론이나 이 연장에서 등장한 “20대 남성신약자론”과 같은 백래시에 휘말려 들어가 버렸다.
---「권명아 - 젠더 · 어펙트 연구 방법론과 역사성」중에서
「실성화미」의 ‘퀴어성’은 위의 연구자들이 주목한 ‘하층민의 섹슈얼리티’와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향토적 욕망’은 서구의 대표적 퀴어이론의 ‘진보성’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소설이 1990년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에 묘사된 ‘과도기적’ 신체는 여전히 본 주제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소설의 속성 때문인지 관련 논의는 ‘여성 간 욕망’의 표현 방식에 더 집중된다. 그러나 전술한 연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타이완의 민족 서사를 대표하는 향토든, 진보적 가치를 대표하는 1990년대의 퀴어 및 젠더 인권 담론이든 - 실성화미」 속 쇠퇴한 가자희 극단 내 동성 간 에로티시즘을 포괄하기에는 부족하다. 다시 말해, 계급의 문제는 여전히 타이완의 국가 건설 및 젠더 인권 서사에서 판단 유보 상태이며, 위에서 논의한 ‘계급’은 거의 민주화 이후의 ‘향토’와 동일하므로 그에 대한 식별 및 명명 작업이 시급하다. 이 작품을 레즈비언 소설로 분류하고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동성애적 욕망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동시에 가자희에서의 동성 친밀성의 역사적 특수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이를 퀴어 또는 향토적인 것으로 오인하는 것은 사실상 퀴어 읽기에서 ‘성 정체성’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첸페이전 - 타이완 가자희와 한국 여성국극 속 과도기적 신체와 정동적 주체」중에서
지역의 사회적-문화적 환경은 종종 낭만적 풍경의 형태로서 발견된다. 이 발견은 대개 관광을 통해 매개되지만, 영화와 드라마 등의 광학적 미디어 또한 마찬가지의 기능을 담당한다. 광학적미디어를 통해 해녀들을 사로잡은 생명정치의 전략과 전술은 감성주의적 형태를 취한다. 한국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와 일본의 드라마 〈아마짱〉이 여기에 해당한다. 두 작품은 소재적 관점에서 해녀를 다루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각각의 작품이 발산하는 감성은 다분히 이질적이며, 심지어 상반된다. 〈아마짱〉의 감성은 명랑한 것이고, 〈우리들의 블루스〉의 감성은 신파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 모두 토착적으로 풍경화된 해녀의 몸이 아니라, 해녀의 일을 통해 그 감성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행위적 현실에 뒤얽힌 감성주의적 관점에서의 비교를 요한다. 특히 그 일이 ‘칠성판’을 짊어진 채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감성주의적 관점은 생명정치적 관점과 분리될 수 없다.
---「권두현 - 크래프트의 실천지리 또는 ‘해녀’와 ‘아마’의 정동지리」중에서
설화 속 어머니의 신체는 개별적인 자연적 실체 내지 본질적 고유성으로서의 실재와는 거리가 있다. 어떤 신체가 더 중요한지 결정하고, 이를 기준으로 서사 안팎에서 가치 평가를 내리는 것은 다양한 신체를 산출하고 통제하는 규범의 강제에 의해서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필자는 설화에 등장하는 어머니를, 주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구현하는 인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에서 회의적인 입장이다.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에 따르면 “여성이란 본질도 아니며 본질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여성”은 형이상학의 담론으로부터 애초 배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질”이 형태화되는 과정에서, 즉 ‘어머니’가 서사 내에서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권력관계를 거쳐 사회적 신체로 구현되는 과정에서 형이상학의 지배적 담론은 어머니의 본질을 배제해왔을 가능성이 크며, 그리하여 엄밀히 여성적인 것-어머니의 실체는 명명될 수 없는 상태로 남게 되었다. 어머니의 본질적 성격이 파악되기 불가능하다고 할 때, 설화는 어머니의 실재와 인식 사이, 어떤 지점에서 어머니를 형상화하고 있는지 따라가며 살필 수밖에 없다.
---「강성숙 - 어머니의 신체와 연결성」중에서
당연히 그동안 사회를 지탱해 왔던 것은 개별 노동자의 영웅이야기도 행복한 미래에 대한 허황된 기대도 아니었다. 이들의 돌봄 서사는 마주하는 돌봄부정의에 대응하는 일종의 정동 능력으로서의 점점 ‘행복의 조건’들이 상실되는 것에 대한 분노 · 두려움 · 무기력함 · 피로의 신체적 역사임과 동시에 조율하는 정동적 부정의였다. 백신 접종 이후 감염병에 대한 위험은 눈에 띄게 낮아졌지만 돌봄의 잠시 멈춤으로 인한 실직과 돌봄수요자와의 신뢰의 상실에 대한 불안은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이를 견뎌내기 위해 연결 가능한 돌봄 관계를 유지 혹은 발굴하기 위한 개별 노동자의 분투로 이어졌다.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돌봄수요자의 취약성은 돌봄을 수행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야 하는 개별 노동자들의 취약한 의존성을 확인하고 공감하는 것을 넘어 상호의존이라는 횡단적 연결로 이행되었다. 인지증과 사는 노인의 돌봄은 언어 · 판단 · 이성 · 행동 등의 손상으로 인해 항상 갈등과 소외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체화된 몸의 기술, 즉 돌봄수요자의 필요와 요구에 부응하면서도 치마, 노래, TV, 춤 등 인간을 넘어 세상과의 새로운 관계를 확대하면서 기쁨과 긍정의 웃음과 해학으로 전환되었다.
---「정종민 - 비접촉시대에 돌봄노동자의 삶과 노동의 위태로운 기술로서 정동적 부정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