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16년 2월에 강원도 평강에서 강무 講武: 군사훈련으로서의 수렵대회를 했는데, 날은 차고 비가 내린 뒤라 사나운 바람까지 불었다. 사람들은 모두 가죽옷 안에 솜옷을 세 겹씩 겹쳐 입었고, 귀를 가리고 모자를 쓰고도 추위에 벌벌 떨었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홑겹의 옷을 입고 팔뚝을 걷어붙였는데도 손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서 보는 사람들이 남다르게 여겼다.
---「세조 총서(‘1부 재주 많은 둘째왕자’)」중에서
임금이 사정전에서 대신들의 조회를 받고 정사를 보았다. 임금이 말하였다.
“군주가 한 나라의 봉양을 받으며 깊은 궁궐에 편안히 들어앉아 있으면, 농사짓는 어려움과 백성들의 질고를 알 수가 없다. 이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이제부터 내가 나라 곳곳을 순수巡狩하면서 백성의 일을 살펴야겠다.”
임금이 우의정 강맹경과 승지들에게 순수하는 절차를 논의하게 하고, 즉시 병조에 전교하였다.
“올가을 추수가 끝나면 충청도와 경상도를 순수할 것이니, 제반의 일들을 준비하도록 하라.”
---「세조 3년(1457) 7월 8일(‘3부 세조의 꿈, 천자의 정치’)」중에서
함길도 도체찰사 신숙주가 군관을 보내 아뢰었다.
“신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길을 나누어 적을 토벌하고 그들의 소굴을 모두 없애고 돌아왔습니다. 전투에서 잡아 죽인 적이 430여 명이고, 불태워 없앤 집이 900여 채이며, 나머지 재산도 함께 불태웠습니다. 죽이거나 빼앗아 온 소와 말은 1천여 마리입니다.”
임금이 기뻐하며 승전보를 전한 군관에게 선물을 내렸다. 그리고 북정北征이 성공했음을 종묘에 고하게 하였다. 근정전에 나아가니 대소신료들이 하례하는 글을 올렸다.
---「세조 6년(1460) 9월 11일(‘3부 세조의 꿈, 천자의 정치’)」중에서
임금이 식례 횡간式例橫看*을 만들어 나라에서 쓰는 각종 경비의 기준안을 만들고자 하였는데, 오래도록 완성하지 못해 염려하였다. 이에 영순군 이부, 하성위 정현조에게 명하여 조정 관리들을 거느리고 가서 날마다 횡간의 일을 보고하게 하였다. 또 관리들을 궁궐에서 늦게까지 근무하게 하고, 외출도 허락하지 않았다. 임금은 비록 병환 중이라도 보고를 받았고, 보고가 끝난 후에야 귀가를 허락하였다.
---「세조 9년(1467) 11월 22일(‘4부 말보다 행동! 몸으로 뛰는 민생정치’)」중에서
임금이 승정원에 전지하였다.
“내가 직접 궐내 여러 관청의 비 새는 곳을 살피고자 한다. 대궐 서쪽에 있는 관청에서 사람들을 물러나게 하라.”
임금이 중전과 함께 젊은 종친들을 거느리고 여러 관청을 두루 살펴보았다. 이때 승정원에 있던 도자기와 상의원에 있던 면포와 비단을 밖으로 내어서 젊은 종친과 궁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조 10년(1464) 2월 10일(‘4부 말보다 행동! 몸으로 뛰는 민생정치’)」중에서
이시애의 반란이 진압되고 임금이 김국광, 윤필상에게 말하였다.
“중전이 일전에 말하기를 ‘이시애의 반역은 나라의 재앙이 아닙니다. 이번 일로 인해 군사들을 다시 훈련하게 되었으니 이 또한 나라를 강건하게 하는 과정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그 마음에 감동하였으니, 경들도 그리 알라.”
---「세조 13년(1467) 8월 27일(‘5부 인간 세조, 그리고 비극들’)」중에서
우리 세조께서 즉위하신 지 3년이 되던 해 9월에 왕세자가 병으로 졸하였다. 나이는 스물이었다. 의경세자의 휘는 이장李暲이고 자字는 원명原明이다. 세종 21년1439년 9월 15일 병신시에 태어났다. 옛 제도에 따르면 여러 왕자의 부인들은 장차 출산하려고 할 때 반드시 궐 밖의 사가로 나갔다. 그런데 정희왕후세조비는 특별히 세종과 소헌왕후의 사랑을 받아 왕세자를 궁궐 안에서 낳았다. 의경세자는 체격이 준수하고, 성품이 어른스러웠으며, 용모가 단정하고 우아했다. 세종께서 친히 안아 주시고 데리고 다니면서 다른 왕손과는 다르게 대하셨다. 세종 27년1445년 정월에 정의대부에 제수되었고, 도원군桃源君에 봉해졌다.
을해년세조 1년(1455) 윤6월 을묘일에 세조께서 즉위하시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세조께서는 서연관세자의 스승들을 선임하여 세자를 교육하는 데 모든 방도를 다하셨고, 세자 또한 학업을 즐기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또 하루에 세 번씩 서연관을 불러 강론하였다. 하루는 『서경』을 읽다가 「순전」舜典 편에 이르러 천체를 관측하는 기형璣衡에 관한 주석을 읽었다. 그러나 그 제도를 문자만으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여 즉시 서연관과 함께 간의대簡儀臺: 천문대에 올라가 혼천의渾天儀: 천문 관측기를 관찰하고 『서경』에 실린 것과 반복해 참고하면서 막히는 곳이 없게 하였다. 다른 글을 읽을 때도 모두 그러해서, 의심이 나면 반드시 묻고, 묻고 나면 반드시 다시 살폈다. 처음 세자가 병을 앓았을 때, 임금이 몹시 근심하였다. 세자를 즉시 궐 밖에 있는 사저로 피병시켰고, 성심껏 기도드리고 약재를 쓰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이에 세자의 병이 조금 나아졌는데, 임금이 몹시 기뻐하며 곁에서 간호하는 사람, 호위하는 군사들, 그리고 여러 관리들에게 한 계급씩 관작을 올려 주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다시 심해졌고 끝내 회복하지 못하였다. 임금과 중전이 크게 슬퍼하며 음식을 줄였고, 정무를 5일간 정지했으며, 저자도 5일간 파하였다. 대신들이 여러 번 수라를 드시라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으시고 30일간 소복을 입으셨다. 종친과 대신들 그리고 민간의 백성들까지 모두 슬퍼하며 눈물을 흘렸고, 추모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이 말하였다.
“우리 백성들이 복이 없구나. 세자같이 덕스러운 사람이 천수를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세조 3년(1457) 11월 24일, 의경세자 묘지문 중(‘5부 인간 세조, 그리고 비극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