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는 사랑을 닮았다고 한다.
상대를 간절하게 생각하는 것도,
원하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도,
잠시도 잊지 못하고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것도.
무언가 간절하게 생각한다는 건 그 자체가 일종의 저주다.
--- p.7
기타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걸음을 내딛는 유키의 등에 대고 말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변하기 마련이야. 미스미도 예외는 아니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스미가 그렇게 많이 변했어요?”
유키가 상반신만 돌린 채 의미를 캐묻자 기타니는 “그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말을 빌리자면, 지금 미스미는 ‘얼굴이 없는’ 상태야.
--- p.20
“아무리 친한 상대라도 그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건 그대로 묻어두는 게 좋다고 봐. 네가 정 물어봐 주길 바라거나, 언젠가 어떤 이유로든 알아야 할 때가 오면 그때 물어볼게. 하지만 그게 아니면 굳이 상처를 들춰낼 필요는 없어.”
누구나 가족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나만의 비밀 한두 가지는 있는 법이다.
유키에게도 당연히 있다. 지금도 감추고 있는 비밀이.
--- p.49
“사야카를 이렇게까지 밀어붙이는 게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어. 사연도, 마음의 무게도, 아픔도 몰라. 하지만 보통 의지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나한테도 전해져. 바닥에 흩어진 이 그림을 보면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돼.”
한마디로 이 모든 건 눈동자로 감정을 나눌 수 없었던 두 사람의 소통이 어긋난 결과이자 오랜 시간 마음을 닫고 살아온 데에서 비롯한 필연적인 폐해였다.
하지만 수많은 스케치에서 그녀의 마음이 느껴지고, 들리고, 보였다.
--- p.81
인간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인간 자체를 두려워한다. 정작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인간을 믿지 못하게 만든 상대 한 사람인데 말이다. 이유는 제삼자에게서도 공포의 대상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야카의 경우, 그 공포의 대상이 자기 자신이었다. 한마디로 최악의 경우였다.
“말도 안 돼.”
‘얼굴이 없는 상태야.’ 유키는 언젠가 기타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p.105
“이것저것 보고, 즐기고, 슬퍼하고, 웃고, 울어. 그렇게 경험한 걸 모두 이용해서 그리는 거야. 나의 세계를 그리는 데 쓸데없는 경험은 하나도 없어.”
언젠가 도착할 목적지를 위해 다 희생하지 말고 다 이용하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금은 도망쳐.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끝까지 도망치는 거야. 시간은 얼마든지 걸려도 상관없어. 남한테 의지해도 좋아. 제대로 태세를 갖추고 철저하게 준비해. 그러고 나서 복수하는 거야. 감정만 앞세워 혼자 달려들면 싸울 것도 못 싸워.”
--- p.119
“신도가 한 말의 의중은 나중에 생각하자고. 지금 밝힐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지금 풀어야 할 문제, 라기보다 과제는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가?’야.”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가……?”
“그래, 어떻게 해야 할까가 아니라. 내가 상담할 때 종종 하는 말인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를 때는 타인이 하는 말은 일단 잊어버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는 거야. 무엇이든 상관없어. 집에 가서 자고 싶으면 자고, 푸딩을 먹고 싶으면 먹어. 하고 싶은 만큼 다 해야, 끝까지 다 해봐야 비로소 정말 하고 싶은 게 눈에 보여. 아, 한 가지 죽고 싶다 같은 건 안 돼. 그런 부정적인 생각은 빼고.”
--- pp.162~163
“난 이 일이 내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며 교직의 본분을 넘어서면서까지 고군분투했어. 어떻게 하면 이 녀석 눈동자에 빛을 밝힐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지. 하지만 뭘 해도 소용이 없어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네가 나타난 거야.”
그렇게 말하며 기타니 선생님은 날 가리키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p.219
“괜찮아. 괜찮아, 엄마.”
유키는 엄마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때 그에게 세상의 전부였던 엄마. 유키는 아름다웠던 과거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엄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지난날 그녀가 수도 없이 반복했던 말을 떠올렸다.
‘잘 다녀와.’
‘어서 오렴.’
엄마는 언제나 웃고 있었다.
서툴고 뒤틀린 사랑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옆에 있을 거야.”
그래도 단 하나뿐인 엄마였다.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