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하와이 마우이섬에서 고래를 처음 만났던 그날의 감동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그땐 촬영 허가를 받는 일이 워낙 까다롭고 돈이 많이 들어서 촬영감독이 물에 맘대로 들어갈 수 없었다. 유일하게 수중촬영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보트 뒤 데크에 엎드린 채 수중카메라만 물속에 담가 찍는 방법뿐이었다. 그러다 저 멀리서 혹등고래 두 마리가 카메라 앞으로 점점 가까이 다가왔을 때 숨이 막히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말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벅찬 감정이 온몸으로 가득 전해지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논리적으로 눈물이 난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그냥 그 순간부터 고래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생생한 감동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 주고 싶은 꿈이 생겼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 꿈을 펼치게 되었다.
고래를 처음 본 이후 틈만 나면 고래를 찾아 세계 여러 바다를 찾아 나섰다.
노르웨이에서는 범고래와 혹등고래가 같은 공간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장면을 담아냈으며, 멕시코에 있는 혹등고래, 귀신고래, 참고래를 찾기 위해 6번이나 다녀왔고, 혹등고래, 밍크고래를 만나기 위해 호주를 3번이나 다녀왔으며 혹등고래와 일각고래를 찾기 위해 북극을 수 없이도 누볐다. 그리고 통가 바바우(Vabau)라는 곳에는 5번이나 다녀왔는데 혹등고래를 촬영하기 위함이었다.
세계 바다를 돌아다니면서 고래를 촬영하는 열정은 아직도 식지 않아 지금도 아프리카 모리셔스에서 향고래 수중촬영을 하고 있다.
처음 SBS 이큰별 PD의 연락을 받았을 때, 느낌이 왔다. 이번엔 확실히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고래와 나〉를 열심히 촬영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지구 환경에 관심을 촉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더 많이, 자주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을. 지구의 환경오염에 대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늦출 수는 있다. 아주 작은 관심과 행동으로도 고래에게 닥친 위기, 지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계속 전하고자 한다.
나는 앞으로도 고래의 생태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계속 전할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수중 세계를 카메라에 담아 보여주는 것도, 고래를 촬영하는 것도 누군가는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계속하려 한다. 이런 마음 덕분에 지난 30여 년간 자연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었고 이는 앞으로 전 세계 바닷속 고래를 찾아 촬영을 계속할 동력이기도 하다.
〈고래와 나〉를 촬영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알게 되었다. 앞으로 대왕고래, 혹등고래, 향고래, 귀신고래, 참고래, 범고래, 일각고래, 흰고래까지 모두 촬영할 것이다. 카메라를 내려놓을 때까지 앞으로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모른다. 어쩌면 죽을 때쯤이 되어서야 끝이 날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나의 꿈은 더욱 선명해졌고 계속 도전할 것이다.
8년 전 고래 자연 다큐멘터리 제작에 도전해 보자는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 주고 지금까지 함께 해준 나의 단짝 임완호 감독 그리고 내 오랜 꿈을 현실 가능하게 해준 SBS 〈고래와 나〉 제작진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 김동식 (수중 촬영감독. 이학박사)
고래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2016년 11월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때 나는 남극 장보고 기지에서 약 350km 떨어진 Cape Hallett 이라는 아델리 펭귄 서식지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펭귄 조사를 진행 중인 연구팀에 합류해 있었다. 본격적인 조사에 앞서 우리는 Cape Hallet 인근의 또 다른 아델리 펭귄 서식지를 헬기로 조사하기로 했다.
11월이면 남극에도 봄이 찾아와 얼어있던 남극 바다가 녹기 시작하는 시기. 뉴질랜드에서 온 헬기 조종사는 이날 유독 해빙이 녹아 떨어져 나간 해안가를 저공 비행했다. 눈부시게 하얀 남극 대륙의 풍경에 빠져있던 우리와 다르게 그는 다른 목적이 있었다. 고래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남극에 막 도착했듯이 고래들도 남극해가 녹기 시작할 무렵 도착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Whales! Whales!’ 그가 헬기 조종석 왼쪽 창문을 보면서 소리쳤다.
‘어디? 어디?’ 운이 나쁘게 나는 맨 오른쪽 좌석에 앉아 있어서 왼쪽 창문을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촬영해보려고 애쓰는 동안 책임연구원 정호성 박사가 ‘착륙’ 사인을 헬기 조종사에게 보냈다. 헬기는 천천히 두께가 3미터가 되는 해빙 위에 착륙했고, 나는 정신없이 드론과 카메라, 삼각대를 메고 해빙 끝 지점으로 갔다. 주변은 너무 조용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촬영 준비를 하는 순간 바로 코앞에서 ‘푸우~’ 하는 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솟구쳐 올랐다.
‘범고래다!’ 누군가 금방 그 존재를 알아챘다. 송곳처럼 뾰족한 검은색 등지느러미가 수면을 뚫고 올라오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범고래와 마주했다. 남극을 10여 차례 다녀오는 동안 고래를 여러 번 목격했지만 바로 코앞에서, 그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범고래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2016년 11월 26일, 남극 대륙 해안가에 처음 만난 범고래 무리는 고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처음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Cape Hallett 에서 아델리 펭귄 조사를 마치고 장보고 기지로 돌아온 날부터 김동식 수중 촬영감독과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면서 범고래 촬영에 성공한 것을 자랑했다. 김동식 감독은 오래전부터 고래를 촬영해 온 경험이 많은 터라 서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둘은 이렇게 남극과 한국이라는 거리를 두고 메신저로 고래 다큐멘터리를 만들자는 결의를 하게 된다.
예산을 마련하여 본격적으로 고래를 촬영하기 시작한 것은 2019년부터다. 그 해에 두 사람은 혹등고래 어미와 새끼를 촬영하기 위해 남태평양 ‘통가’를, 혹등고래 멸치 사냥을 촬영하기 위해 미국 몬터레이만을, 브라이드고래의 멸치 사냥을 촬영하기 위해 태국을, 범고래의 청어사냥을 촬영하기 위해 노르웨이를 다녀왔다. 2020년 2월에는 귀신고래를 촬영하기 위해 멕시코를 갔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기 팬데믹이 발생하면서 고래 촬영을 위한 우리의 여정은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2023년 초, 팬데믹이 끝나면서 다시 고래 촬영을 시작하려던 참에 SBS 이큰별 PD가 찾아왔다. ‘감독님, 고래 다큐멘터리 만들고 싶어요.’ 해외 촬영 이 대부분인 고래 다큐멘터리 제작은 시간과 예산이 많이 필요하다. 고래 다큐멘터리가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터였기에 이큰별PD는 시간을 얻고 나는 예산을 더 확보해 오로지 고래 촬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이큰별 PD는 훌륭하게 ‘고래와 나’를 마무리하였고, 그렇게 나는 몇 년 동안 이어진 고래 촬영의 여정에 마침표 하나를 찍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여정이 남아있다. 귀신고래가 새끼를 출산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멕시코를 다시 다녀와야 하고, 범고래가 바다사자를 사냥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를, 혹등고래의 Bubble-net 사냥 장면 촬영을 위해 알래스카와 베링해를 다녀와야 한다. 고래 촬영을 위한 나의 여정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 임완호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