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한국 의료에 관해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을까? 당분간 어렵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의학, 사회과학, 인문학 분야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소통과 공감의 역사가 이런 책을 내기에는 아직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해서 의료사회학, 의료경제학, 의사학(醫史學), 의료지리학, 의철학, 의료인류학과 같이 두 분야 사이의 학제 간 연구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히 미약하기 때문이다.
---「원서 개정판 번역 서문: 의사의 지배에 대한 사회적 기원」중에서
권위에 대한 대부분의 개념은 행위에 대한 규제를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베버(Max Weber)의 고전적 정의에 따르면, ‘Herrschaft’(‘권위’ 혹은 ‘지배’로 다양하게 번역된다)는 사회의 법칙에 의해서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명령에 대해 사람들이 복종하게 될 개연성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언어에서 권위는 명령을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과학 논문, 종교적인 성전(聖典), 심지어는 한 권의 문법책에도 권위가 담겨 있다. (······) 권위는 또한 현실에 대한 특정한 정의, 의미, 가치판단이 얼마나 정당하고 진실한지를 나타내는 확률을 일컫는다. 나는 이러한 형태의 권위를 베버의 사회적 권위와 구별해 문화적 권위라고 부르고자 한다.
---「1권 서문: 의사의 지배에 대한 사회적 기원」중에서
가족의학 지침서가 중요한 까닭은 독창적인 생각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대중적인 발상으로 그 시대의 문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버컨과 그의 모방자들은 질병을 근본적으로 자연주의적이면서도 세속적인 방법으로 치료했는데 여기에 마술이나 마법에 대한 암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의 우주관은 유물론적이었다. (······) 그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질병이나 치료법은 절대 존재하지 않으며, 환자의 병인(病因)이나 치료에 어떤 초자연적인 혹은 불가사의한 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1권 1장: 의학과 민주적인 문화, 1760~1850」중에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도시마다 혼자 생활하는 사람들이 증가했다. (······) 하숙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새로운 상점들, 예를 들면 세탁소, 식당, 양복점 등이 등장했다. 보겔(Morris Vogel)이 지적한 대로, 병원은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생겨난 기관 중 하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민간 환자를 위해 맨 처음 세워진 병원들은 대부분 하숙하는 사람들과 아파트 거주민을 염두에 두고 설립되었다.
---「1권 2장: 시장의 확대」중에서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이 지닌 의의는 새로운 관계의 확립에서 찾을 수 있다.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은 과학과 학문적인 연구를 임상적인 병원 진료와 확고하게 결합시켰다. 지도의사의 진료실이나 환자 집에서 의학기술을 익혔던 도제제도와 달리 이제 전공의들은 교육을 받는 병원의 병동에서 진료활동의 전 과정을 참관할 수 있었다. (······)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은 과학을 역설했는데, 이는 의학의 기술적 관심과 같은 좁은 의미의 과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점이 바로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이 거둔 놀라운 성공의 비밀이었다.
---「1권 3장: 시장의 확대」중에서
병원조직과 재정의 변화는 병원 내부의 권력과 권위의 분배를 점점 바꿔놓았다. 기부자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줄어든 반면, 의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은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입원 문제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원래 자선병원에서는 기부자와 의사가 입원시킬 빈민을 선정하는 데 모두 참여했으나, 의료기관으로서의 병원이 크게 부각되면서 기부자는 입원에 대한 결정권을 상실했다.
---「1권 4장: 병원의 새로운 변화」중에서
국가별로 병원을 비교·연구한 글레이저(William Glaser)는 한 가지 종교가 우세한 나라에서는 어디서나 병원이 정부에 의해 경영되고 있음을 밝혀냈다. (······) 그러나 종교집단이 서로 경쟁하는 곳에서는 종교적인 세력을 보호하고 확대하고자 종교집단이 계속적으로 병원의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이를 통해 글레이저는 다음과 같이 일반적인 명제로 제시했다. “한 사회에서 종교 수가 많아질수록 병원의 소유권과 경영은 널리 확산되며 병원의 평균적인 규모는 점차 작아진다.”
---「1권 4장: 병원의 새로운 변화」중에서
1800년대 후반 세균학의 발전과 더불어 보건의 이론과 실천 및 보건과 의학과의 관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보건당국은 전염성 질환의 전파 원인과 방식을 정확하게 밝혀냈으며, 특정한 병을 유발하는 세균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 보건의 영역에 의학 분야를 포함하려는 것은 일부 보건운동가들에게는 필요하고도 바람직한 경향으로 비춰졌지만,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듯이, 개원의들은 보건 영역의 확장을 일종의 권리 침해로 간주했다. 의사들은 환자에 대한 공공기관의 치료, 결핵 및 성병 환자에 대한 보고 규정, 그리고 보건당국이 예방의학과 치료의학을 결합한 보건소(health center)를 설립하려는 것에 대해 저항했다.
---「1권 5장: 보건의 영역」중에서
노동자 의료사업은 일부 회사를 필두로 하여 미국 기업 내부의 ‘복지자본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노동자의 충성심과 ‘미국주의(Americanism)’를 확고히 하기 위해 기업주들은 교육, 주택, 사회적·종교적 프로그램 등이 포함된 복지서비스를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다. 기업의 온정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은 노동자들이 취해야 할 태도를 주입하고 노동자들을 회사에 복종하도록 만드는 정교한 조직망을 결성하고자 했다.
---「1권 6장: 기업으로부터의 도피, 1900~1930」중에서
사회보험은 피고용자는 물론 고용주로부터도 기여금을 필요로 했기에, 국가는 임금 결정 과정에서 고용주의 특권에 개입했다. 자유주의가 막대한 영향력을 떨치고 개인의 이해관계가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한 나라에서는 사회보험이 가장 늦게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회보험은 ‘자유주의’ 개혁으로서의 근대적 복지국가관과는 정반대로 독일과 같은 전체주의적이고 온정주의적인 정부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고, 그 후에야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영국, 프랑스, 미국에 도입되었다.
---「2권 1장: 개혁, 그 신기루」중에서
단체교섭과 사회보장은 뉴딜 사회정책의 두 가지 커다란 제도적 유산이었다. 사회보장법과 같은 해에 통과된 국민노동관계법[National Labor Relations Act, 일명 와그너 법(Wagner Act)]은 고용주들이 노동조합을 억누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방책들을 제한했으며, 선거 절차를 정하고, 근로노동자를 대표하는 권리를 얻은 노동조합이 경영자와 교섭할 수 있도록 했다.
---「2권 2장: 개혁, 조정의 승리」중에서
혹자는 이처럼 민간의료서비스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자본주의 사회의 전형적인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자본주의 사회들은 이와 반대되는 의료를 추구한다. 영국과 스웨덴은 국가가 국민건강보험을 국가건강보장제도(National Health Services)로 바꾸면서 시장모형에서 직접생산으로 전환했고 보건체계를 강력히 통제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추구하는 의료서비스제도가 다양하다는 것은 적어도 의료조직과 재정구조에서는 자본주의와 의료의 대응 관계가 단순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2권 3장: 지유주의 시대」중에서
이러한 지적인 변화는 전체 사회 속에서 의학에 대해 깊게 팬 양가적인 감정을 반영한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주치의에 대해서는 신뢰를 표시하는 반면, 하나의 계급으로서의 의사들에 대해서는 좀 더 적대적이다. 직업으로서 의학을 택하려는 욕구는 줄어들지 않았지만 의학을 직업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매우 큰 반감을 가졌다. 이러한 양면성은 환자의 권리와 여성운동에서 뚜렷했다. 이러한 권리와 운동은 의학적 권위에 대한 접근을 요구하는 동시에 의학적 권위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요구했다.
---「2권 4장: 미국 의료의 위기」중에서
의사들은 더 이상 기업의료의 성장을 끝까지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는다. 의사가 단독개원을 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며 젊은 의과대학 졸업생들은 공동개원을 더 선호하고 있다. 장기간의 전공의 수련 과정으로 이들은 더욱 집단지향적인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젊은 의사들은 직업 안(in)에서의 자유보다는 직업으로부터의(from) 자유에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집단개원은 더욱 규칙적인 시간을 제공함으로써 독립적 진료에서 생기는 사생활의 침범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다.
---「2권 5장: 기업의료의 등장」중에서
오바마케어(Obamacare)와 그 효과에 대한 의견은 당파적 소속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이 지속적인 거부감을 일으킨 다른 이유는, 오바마케어를 받는 시민들 중 많은 수가 과거 보험에서 혜택을 받던 건강보장의 일부를 상실했고, 계속해서 오바마케어가 계속 악화되고 있다고 비난했기 때문이다. 오바마케어는 최악의 보험 가입자들에 대한 보장기준을 높였지만, 양질의 보험 가입자에게 보장의 축소를 초래했다.
---「2권 에필로그: 연쇄 반응, 1982~2016」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