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사상을 펴는 『반야심경』에서는 특히 ‘오온(五蘊)’을 기본으로 하여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합니다. ‘오온’이 ‘공’한 줄만 알면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말씀하시죠.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일으키는 모든 분별 망상 속에 다 공한 이치가 들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생소한 단어들인지라 처음 접한 분들에게는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사고의 틀만 바꾸어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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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이 현상의 세계는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가 눈 깜짝하는 사이에 사라지기에 실체가 없다. 이와 같이 세상이 실체가 없음을 아는 것을 반야 지혜라 하며, 이러한 지혜를 통해 고통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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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경험보다 더 좋은 인생 공부는 없다고들 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반야(지혜)는 일상의 지혜를 넘어선다. 반야는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처럼 장애를 없애주는 지혜다. 또한 반야는 단순한 정보 습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탐(貪) · 진(嗔) · 치(癡) 삼독(三毒)으로부터 벗어난 지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혜는 통찰의 힘을 준다. 초기불교에서는 특히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과 그 소멸에 이르는 길인 사성제(四聖諦)를 바탕으로 한 지혜를 ‘반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늘 그 반야(지혜)의 길로 우리들을 이끌어주셨다. 여기 괴로움을 없애는 길이 있으니,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라고!
--- p.65~66
사실 외모만 보고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고, 팔다리는 긴지 짧은지 살펴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좀 더 깊이 파고들어가다 보면 ‘색’이라고 하는 드러난 모습을 통해 공을 체득할 수 있다. ‘색’으로 대표되는 인간의 육신은 인연에 의해, 또는 업보로 인해 생성된 연기적 산물이다. 지금 이런 모습이라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모습일 리 없고 과거 전생에도 이런 모습이었을 리 만무하다. 모습은 늘 같지 않다. 이것만 보아도 육신을 통해 ‘공’을 찾아낼 수 있다.
--- p.100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끊임없이 인과 연이 화합한 가운데 존재해 왔다. 소중하게 만든 인연은 다 상대를 향해 쏟은 시간과 정성이다. 부모의 결합도 인연이요, 나의 성장 과정이나 기타 환경 등도 인연의 결합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가 각자 받아들이는 매 순간의 느낌이나 생각, 의도나 인식 등도 어느 것 하나 고정된 것이 없다. ‘수 · 상 · 행 · 식’ 또한 인연의 결합에 의한 것이므로 무상하다. 수즉시공(受卽是空), 상즉시공(想卽是空), 행즉시공(行卽是空), 식즉시공(識卽是空)이라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원리이다.
--- p.132~133
모든 것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맑은 거울이 여기 있다. 이 맑은 거울에 어디 한번 자신을 비추어보자. 비친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나타난 모습들이다. 그것들을 공의 입장에서 바라보니, 더러움과 깨끗함을 초월해 있다. 다만 드러난 현상에 대해서 우리 마음이 구분 짓고 차별하면서 구속되고 있다. 우리들 스스로가 평가하고 분별함으로써 오히려 구속하고 구속당한다.
--- p.157~158
나는 꽃을 좋아한다. 아름답게 핀 꽃을 보고 싫어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사실 꽃은 그냥 꽃일 뿐이다. 환경이 적합하다면 때가 되어 피고 지는 것이지, 꽃은 누구에게도 잘 보일 생각이 없다. 그 꽃을 보고 ‘예쁘다, 별로다’ 하는 것은 보는 이의 분별심이 작용한 것이다. 그러니까 꽃이라고 하는 ‘색’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내가 꽃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아닌지가 문제다. 마찬가지로 원래는 세상 모든 것이 평등한데, 대하는 이들이 평등심을 잃고 흔들리기 때문에 차별이 생긴다. 모든 것은 분별심을 일으키는 사람이 문제다.
--- p.178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처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이 십이연기조차도 맨 처음에 나오는 무명에서부터 맨 끝에 나오는 노사까지 전부 다 없다고 한다. 왜일까? 공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모든 연기의 법칙, 즉 자연적으로 어떤 업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공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한시적으로 결합한 것들이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원인이 되는 것조차 없다. 죽음에 이르는 모든 것도 다시 무언가의 씨앗이 되기는 하지만, 그 모든 것들도 공의 논리로 보면 없다고 말한다
--- p.227
신발이 발에 딱 맞으면 신발을 신었다는 의식이 일어나지 않듯이, 삶이 괴롭거나 노여울 일이 없다. 얻을 것도 버릴 것도 없다. 하지만 신발이 지나치게 크거나 작으면 발에 계속 신경이 쓰이는 법이다. 작은 모래 몇 알만 들어가도 불편하고 짜증이 나는 것과 같다. 이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다. 딱 알맞아야 의식하지 않고 잊어버릴 수 있다.
--- p.256
모든 것은 나의 육근과 대상이 만나 나에게서 무언가 만들어진다. 모든 것이 다 공하다는 것을 내가 인지하고 있으면, 우리는 더 이상 걸릴 게 없어진다. 본래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에 걸림 없는 자유를 얻게 된다. 성품이 공한 줄 깨달으면, 그 어떤 것에도 방해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마치 저 조사스님들이나 부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 p.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