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무엇을 꿈꾸는가?
1898년 결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 ‘찬양회’로부터 2024년까지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 126년! 구한말 개화사상을 만나 시작된 한국 여성운동은 일제 강점기에 오히려 굳건히 성장했으며 해방 후 미군정과 한국전쟁이라는 혼란과 억압 속에서도 그 불꽃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한국 1898년 9월 1일, 양성평등기본법 제38조는 찬양회가 1898년 9월 1일 한국 최초의 여권 선언문 여권통문을 발표한 것을 기념하여 이 날을 여권통문의 날로 지정하고 있다.
여성운동은 1970년대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 여성주의02를 만나 새 좌표를 얻게 되었다. 1980년대 여성주의에 입각한 여성운동 단체들 이 조직되기 시작하고 1990년대에 만개했다. 이 전성기의 문턱인 1994년 한국여성인권플러스구 인천여성의전화가 탄생했다.
신자유주의 세계질서가 본격화된 2000년대 이후에는 여성운 동을 비롯해 사회운동 전반에 위기론이 확산하였다. 여성운동은 많 은 성과를 이루었지만, 페미니즘의 리부팅과 백래시는 롤러코스터 처럼 반복되고 있다. 일부 운동가들은 변화의 결과를 독점하여 기득 권화함으로써 짠 맛을 잃어버린 소금이 되었다. 이념은 있지만 사 회운동은 없는 시대, 아니 이념도 운동론도 없는 시대라 할 만하게 되었다. “개인적 관계를 넘어선 사회적 관계의 소통은 최소화하려 는”이 시대, 사회운동은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외면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운 세상을 꿈꿀 필요가 없게 되었는가? 정말 사회운동은 할 필요도 없고 할 수도 없는 것인가? 오히려 지금 여성주의는 페미니즘을 번역한 것이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란 말은 2010년대 이후 사용 되기 시작했으며 그 전에는 여성주의란 말이 주로 쓰였다. 종종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은 혼용되고 있으나 엄밀히 보면 여성주의와 페미니즘은 그 용법이 다르다. 페미니즘은 다 양한 갈래의 여러 이론들을 모두 포함하는 용어이나 여성주의는 성불평등한 사회구조와 그 속에서 형성된 여성의 경험에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여성의 관점으로 역사와 사 회를 재해석하고자 하는 관점을 말한다. 이 책의 1, 2장에서는 여성주의란 말을, 3장에서 는 실제 사용을 반영하여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란 말을 사용한다.
인천여성의전화는 2022년 한국여성인권플러스로 개명했다. 이 책의 1, 2부에서는 인천여 성의전화를 3부에서는 맥락에 따라 두 개의 단체명을 혼용한다. 이정동, 2022: 77
더 새 세상을 희망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한 어떤 형태로든 사회운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필요한 것은 사회운동의 혁신이다. 지금처럼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가 불분명하 여 위기라고 생각되는 이때가 바로 운동의 혁신을 생각할 적기다.
사회운동을 혁신하고자 한다면 첫째, 최초의 질문이 필요하다. 최초의 질문이란 “기존 분야에서 모범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과는 다른 규범을 제시하려는 뜻이 담긴 질문”을 말한다.
새로운 세상은 기존의 규범으로는 만날 수 없기에 보이지 않는 희망과 같은 것이다. 이 보이지 않는 희망을 희망하려면 최초의 질문이라 는 프레임 전환이 필요하다. 둘째, 최초의 질문을 하는 사람, 앙 트레프레너entrepreneur08가 필요하다. 사회운동은 사회를 변화시키 기 위한 집단 행동이다. 새로운 사회를 꿈꾸게 하고 사람들의 열망 과 실천을 끌어낼 수 있는 리더,그런 조직이 필요하다.
셋째, 본질 을 잃지 않되 그 본질을 시대에 맞게 전달할 콘텐츠가 필요하다. 콘 텐츠는 “본질을 표현하려는 몸부림”이요,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보이 (이정동, 2022: 191), “기업가 정신”이라 번역된 앙트레프레너는 일반적으로 “위험을 감 수하고 기존의 것을 창조적으로 파괴하는 혁신을 통해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냄으로 서 수익을 실현해내는 사람”, 그리고 “그런 태도와 행동, 정신적인 측면”으로 정의된다. (tistory.com) 게 하는 “번역”이다.
이런 역사와 시대 앞에서 한국여성인권플러스의 의미는 무엇 인가? 한국여성인권플러스가 30년이 된 것은 기념할 만한 일이지 만 기념으로만 끝나면 안 될 것이다. 무엇을, 왜 했는지, 여성운동을 한다는 의미는 무엇인지, 무엇을 희망하는지 물어야 한다. 이제 지 난 30년간 한국여성인권플러스가 해온 활동들을 꿰어 그 답을 찾 고자 한다.
이 책은 지역의 작은 단체인 한국여성인권플러스가 추구했던 ‘자기만의 이유’를 찾는 여정이다. 30년이라는 짧은 시간, 인천이라 는 특정 지역을 배경으로 활동했던 한 단체의 활동을 운동사라는 이 름으로 정리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운동사란 역사의 거시적인 흐름을 살피는데 더 적당해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존 의 사회운동사는 한국 전체 혹은 서울을 중심으로 기술된 것이 대 부분이다. 지역 개별 단체들의 활동은 부분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연대기적으로 기록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단체라도 사회운동을 한다면 당연히 자기만의 운동 철학과 운동 론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한국여성인권플러스가 실천한 여성폭력 근절 운동의 동학動學에 대한 기록이다. 즉 한국여성인권플러스가 당면했던 위기와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고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그러다 보니 당시에는 중요하게 여겨졌던 사업이 누락되기도 하고 소소해 보였 던 작은 활동이나 성명서가 부각되기도 했다.
이 책에서 거론되지 않았다고 해서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 책은 한국여성인권플러스가 당시의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 하고 해석하는 주체로서 실천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 어느 짧은 순간, 인천의 여성들이 자신들을 내리누르는 억 압과 차별을 이겨내고 한 걸음씩 내디뎌 만들어낸 발자취를 담아내 고자 했다. 거시 운동사 속에서 이런 기록이 없다면 살아 숨 쉬는 여 성들은 지워지고 실천도, 주체도 사라져버릴 것이다. 여성들의 이런 특수한 실천이 모여야 보편적인 역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한국여성인권플러스의 역사는 한국여성인권플러스가 중점 적으로 실천했던 과제를 기준으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993년의 준비위원회 시절부터 2002년까지의 창립과 성장의 시기,2003년부터 2017년까지 위기와 확장의 시기, 2018년부터 2023년 까지 도전과 도약의 시기가 그것이다. 세 번째 시기는 현재진행 중 인 시간으로 현재를 역사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아있 지만, 한국여성인권플러스가 현재 당면한 문제도 다루기 위해 이 시 간까지 포함했다.
창립과 성장의 시기였던 1990년대는 우리 사회가 억압과 권위를 벗어던지고 민주화되던 시기다. 시민사회 공간이 활짝 열리고 여성들에게 필요한 법과 제도가 만들어졌으며 여성들의 사회진출 과 성장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1995년 베이징 세계여성회의가 열려서 공적 사회에서의 폭력만이 아니라 사적 세계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모든 폭력이 여성 인권의 문제라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 었다. 이런 시기에 2, 30대 여성들이 인천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주의 에 입각한 인천여성의전화를 창립하고 가정폭력 · 성폭력 근절 운동 을 시작했다. 가정폭력 · 성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상담소를 여는 한 편 여성주의상담 지식을 생산했으며 지역 여성 조직사업도 하면서 빠르게 성장했다.
위기와 확장의 시기였던 2000년대는 ‘시민 운동의 위기’ 담론 이 압도했던 때다. 제도화된 기관들의 정부 의존도가 높아지고 여성 운동의 비판과 견제 능력이 약화되는 등 제도화의 역기능이 그 실체 를 드러냈다. 인천여성의전화는 이런 위기를 만나 가정폭력상담소 와 성폭력상담소를 접고 새로운 이슈로 떠오른 성매매 여성과 이주 여성의 인권 문제를 중점 과제로 삼았다. 성매매 여성 당사자 운동 과 이주여성 공동체 운동, 그리고 여성 문화 운동을 추진했다. 그 결 과 성매매 근절 운동은 별도의 단체로 독립하고 이주여성들도 자립하여 이주여성 당사자 운동 단체를 만드는 등 인천여성의전화의 영 향력은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가 되자 여성운동에 대한 엄청난 백래시가 몰려왔다.
온라인상에서 여성혐오와 성착취가 극심해졌다. 그러자 ‘넷페미’들이 자생적으로 등장하여 새로운 여성운동 주체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인천여성의전화는 성매매 여성과 이주여성 관련 사업을 독립시킨 후 새로운 과제를 찾지 못한 채 외부 세계의 변화에 대응 하지 못하고 내부적인 위기를 맞이했다. 기회는 인천여성의전화 외부에서 찾아왔다.
도전과 도약의 시대는 2010년대 후반, 2030 여성들과의10 만 남으로 시작되었다. 인천여성의전화는 2030과 함께 여성혐오 근절, 반성착취 운동을 시작했다. 이것은 기존의 운동방식과 아주 다른 낯 선 것이었고 기존 운동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 결과 한국여성의전화 와의 오랜 연대 관계를 해소하고 한국여성인권플러스로 개명했다.
이후로 한국여성인권플러스의 활동은 크게 두 축으로 진행되게 되 었다. 한 축은 30년 역사를 기반으로 제도 속에서, 제도를 견제하는 이주여성 인권 지원 활동과 성평등 거버넌스 활동이며 다른 한 축은 온라인상에서 싹튼 제도 밖의 2030과 함께 하는 여성혐오 근절, 반 성착취 운동이다. 그래서 2030과의 만남은 오래된 부대에 새 술을 담은 것과 같다. 역사 속에서 이런 만남은 그 사례가 아주 많다. 이런 만남은 서로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발전의 방향이 달라진다.
2030은 이 시기 등장한 2, 30대 여성을 지칭한다. 생물학적인 세대 개념인 2, 30대라 하지 않고 2030이라 한 것은 그 세대의 특수한 사회현상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즐겨 스스로를 2030이라 부른다.
이 책은 필자가 개인적으로 집필한 것이 아니라 한국여성인권 플러스 회원들이 공동 집필한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필자도 그 공 동 집필자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필자는 인천여성의전화 창립준비 위원부터 시작하여 현재까지 30년을
직 · 간접적으로 한국여성인권 플러스와 함께 해왔다. 필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하여 「총회보고서」, 회보 「물꼬」, 각종 자료집, 연구 · 기록물 등을 꼼꼼히 읽고 연락이 닿 는 대로 전 · 현직 회장과 활동가, 회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옛 회원들을 만나는 일은 이해와 재해석 그리고 화해의 과정이었다. 소 중한 기억을 나눠 주신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드린다.
최대한 자료에 근거하여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쓰고자 했지 만, 필자의 경험과 입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고 부족한 기록과 기억 의 틈새는 필자의 상상과 기억으로 메꿀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한다. 그런데도 집필 과정은 순례의 길이었다. 역사의 길목마다 당시 의 회원과 활동가들이 남겨둔 미래를 위한 메시지가 곳곳에서 기다 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필자는 쓰던 글을 멈추고 숨을 골라야 했다. 이제 한국여성인권플러스는 새로운 모험을 선택했다. 30년을맞이한 지금은 도약을 위한 ‘최초의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2023월 12월 31일
박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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