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어머니가 나의 거처를 어렵사리 수소문해 찾아오셨다. 그때 어머니가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하신 말씀이 아직도 예리한 비수가 되어 죽비소리로 다가온다. 어머니는 돈 3만원을 주머니에 넣어주시며 간곡한 부탁의 말씀을 하셨다.
“기왕 출가했으면 집 생각 말고, 서산 스님 같은 큰 도인이 되어 불쌍한 에미를 구제해다오.”
--- p.20
“지범 스님은 칠불사가 사람 만들었어.”
가까운 도반들이 지금도 나를 만나면 하는 소리다. 틀린 말은 아니다. 칠불사에서의 3년은 거칠고 도전적인 나를 한 생각 쉬게 했다. 화두 공부에 대한 정견을 세울 수 있었고 깨달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했다.
--- p.25
그 시절엔 참 별나게 살았던 것 같다. 정진 시간이 끝나도 좌복을 벗어나지 않았다. 스님들이 차담도 하고 휴식을 취하는 지대방에도 가지 않고 대중과 동떨어져 살았다. 오직 화두 하나로 온 산을 밤낮으로 포행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다만 공부 중 의문이 생겼을 때, 서옹 노사를 친견하면 만사가 형통이었다.
--- p.28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교보문고 창립자 신용호 선생의 말씀에 새삼 공감하며 나의 지나온 자취를 돌아보니, 책 읽는 즐거움이 있었기에 서울 한복판에서 푸르게 살 수 있었다. 서점에 가면 책의 향기가 내 삶을 청량하게 하며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된다.
--- p.32
경전을 공부해 경안(經眼)이 열리고 화두를 타파해 설사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중노릇이 끝난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다. 수행승의 사명은 무명과 번뇌에서 침몰해가고 있는 중생들을 건져내는 일이다. 그것은 시주와 공양의 대가로서 의무이자 책임이다. 이러한 책무를 등진다면 ‘놀고먹는 중놈들’이라는 소리를 면할 길이 없다.
--- p.34
80년대 중반 여름 결제 중, 고약한 냄새가 진동하는 다 떨어진 누더기의 허름한 차림으로 태백산 각화사로 만행을 갔다. 다들 외면하고 못 본 척하는데 키 크고 훤칠한 한 스님이 선뜻 다가와주었다.
“방사가 누추해도 함께 지냅시다.”
그 친절한 말 한마디에 내 인생이 바뀌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후로 운수와 방황을 접고, 탈선한 수행길에서 본래 위치로 돌아와 지금도 이렇게 수행하고 있다.
--- p.36
칡넝쿨이 높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다가 높이가 다한 곳에 이르면, 단지 푸른 허공만 홀로 드러나게 된다. 그 순간 일시에 본지풍광(本地風光)이 천하에 밝아 장부의 할 일을 마친다. 불조를 뛰어넘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 p.53
1990년 의성 고운사 고금당 선원의 동안거 백일 용맹정진에는 근일 선사를 조실로 모시고 법웅 선사가 죽비를 잡았다. 그때의 용맹정진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용맹정진에 들어가기 전 부산 만행 중 온천장에서 쓰러졌었다. 병원에 입원해 생사의 갈림길에서 사투를 벌이던 중, 오직 화두타파만이 생사를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죽어도 용맹정진하다가 죽어야겠다고 발심을 냈다. 내 삶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덤볐기에 생사의 강을 건널 수 있었다.
--- p.62
수행자에게는 학식이나 지식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따뜻하며 자비로운 행동이 필요하다. 지식은 때때로 자만을 가져오지만 자비는 언제나 덕성을 길러준다. 그러므로 살아 움직이는 자비로운 행동이야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실천하는 것이다.
--- p.87
부처의 삶을 사는 사람이 부처이다. 부처의 삶을 살지 않고, 그냥 부처가 되겠다고 죽을 때까지 화두를 붙들고 좌복만 고집한다면 절대 부처를 이룰 수 없다. 설사 그렇게 해서 부처가 된들 그 부처는 이미 죽은 부처나 다름없다. 중생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줄 수 있어야 한다.
--- p.100
종일 선방 좌복에 앉아 있다고 견성하고,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 앉아 있다고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때론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도 중요하지 않다. 성공의 핵심은 초인적인 집중과 몰입이다. 환경에 방해받지 않고 변수에 흔들리지 않는 집중과 몰입이다. 선방도, 직장도, 인생도 단지 오래 버텼다고 우등상을 주지 않는다.
--- p.151
요즘 너무 많은 지식과 정보가 흘러넘친다. 그러한 정보가 기회와 지혜를 충만하게 제공해줄 것 같지만, 오히려 혼란스러움만 부추긴다. 이런 혼란과 혼돈 속에서는 오히려 내 안에 정답이 있다. 지금까지 보고 듣고 배우고 익혔던 모든 인식과 업을 내려놓고, 내면의 울림에서 맑고 청량한 나를 만나야 한다. 우리는 충분히 알고 있고, 충분히 준비된 사람이며, 충분히 완벽한 사람이다.
--- p.201
남을 부러워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내가 머무는 곳이 아닌 다른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평화와 행복은 요원한 길이다. 스스로에게 감사드리며 만족하면서, 내가 서 있는 지금 이 자리에서 새가 울고 꽃을 피울 때 행복한 봄날이 걸어온다. 행복한 사람은 늘 현재를 산다. 회한에 젖을 과거가 없으며 근심 걱정의 미래가 없기에 인생 전체가 현재화되어 있다.
--- p.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