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는 자신을 낳자마자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에 대해서 기억이 전혀 없어서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젊고 잘생기고 다정다감한 부자 아버지가 세라에게는 세상에 단 하나 남은 혈육인 듯했다. 세라와 아버지는 언제나 함께 놀았고 서로를 아꼈다. …… 둘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단짝친구였다.
--- p.13
훗날 세라는 민친 기숙학교의 건물이 어쩐지 민친 교장을 꼭 닮았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겉은 번듯하게 모양새를 갖춰 그럴듯해 보이는데 속은 음험하다는 점에서 그랬다. 안락의자조차 딱딱한 뼈대를 숨기고 있을 것만 같았다. 복도는 모든 게 딱딱하고 반질반질했다. 구석 괘종시계를 장식한 볼이 빨간 달님 얼굴은 그 빨간 볼에 얼마나 광택 칠을 했는지 윤기가 과해 보일 정도였다.
--- p.16
“정말이야? 정말 놀이방을 혼자서 써?”
“응. 아빠가 민친 선생님께 방을 혼자 쓰게 해 달라고 부탁하셨어. 왜냐하면, 음, 난 이야기를 지어내서 혼자 말하면서 노는데,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이 듣는 게 싫거든. 사람들이 듣는다고 생각하면 그런 놀이가 잘 안 돼.”
--- p.56
“나는 이 세상을 다 합친 것보다 열 배는 더 아빠를 사랑해. 그래서 아픈 거야. 아빠가 멀리 떠나셔서.”
--- p.61
세라를 시샘하는 아이들은 세라를 헐뜯고 싶을 때마다 ‘세라 공주’라고 불렀고, 세라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애정을 담아 ‘세라 공주’라고 불렀다. 세라라는 이름을 빼고 대놓고 ‘공주’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세라를 따르는 아이들은 세라가 아름답고 위엄 있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민친 교장도 학교를 찾는 학부모들에게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떠벌리면서 그곳이 왕립 기숙학교와 같은 격이라는 인상을 넌지시 풍겼다.
--- p.121
“베키도 남아서 선물을 구경하고 싶을 거예요. 베키도 우리 같은 여자아이잖아요.”
민친 교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베키와 세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세라 양, 베키는 부엌 심부름을 하는 하녀란다. 부엌 하녀는, 음, 여자애가 아니야.”
정말이지 민친 교장은 부엌데기가 여자아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부엌데기는 석탄통을 나르고 난롯불을 지피는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
--- p.135
처음 한두 달 동안 세라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꾸지람을 들어도 묵묵히 견디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태도를 누그러뜨릴 거라고 생각했다. 어리지만 자존심 강한 세라는 자신이 밥벌이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동정에 기대려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세라는 어느 누구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키는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하녀들은 더 윽박지르며 못되게 굴었고, 요리사는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잔소리를 했다.
--- p.182
“여기가 다른 데라고 상상하면 견딜 수 있어. 아니면 이야기 속에 나오는 곳이라고 상상하거나.” 세라는 느릿느릿 말했다. 상상력이 발동하고 있었다. 시련이 닥친 뒤로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때는 마치 상상력마저 까무러친 느낌이었다. “여기보다 더한 곳에 사는 사람들도 있어. 샤토 디프의 지하 감방에 갇혔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생각해 봐. 바스티유 감옥에 있던 사람들도 그렇고!”
…… 세라의 눈이 예전에 알던 빛으로 반짝였다. 세라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래. 거기라고 상상하면 좋겠다. 난 바스티유 감옥에 갇힌 죄수인 거야. 여기에 아주 오래오래 있었고, 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민친 선생님은 교도관이고, 그리고 베키는…… 옆방에 갇힌 죄수야.”
--- p.195
딱딱한 침대에 거무칙칙한 누비 침대보가 깔려 있었다. 허옇게 회칠된 벽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자국이 선명했고 맨바닥은 차가웠다. 벽난로는 깨지고 녹슬었고, 낡은 발판은 다리 하나가 망가져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래도 방 안에 앉을 자리라고는 그거 하나였다. 세라는 발판에 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로티가 잠시 다녀갔을 뿐인데 상황이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누군가 면회를 다녀간 후에 홀로 남겨진 죄수가 더 사무치게 외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여긴 외로운 곳이야. 어쩔 땐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곳 같아.”
--- p.211
“이거 가져, 불쌍한 누나. 자, 이거 6펜스야. 누나 주는 거야.”
세라는 흠칫 놀랐다. 문득 지금 자기 모습이, 지난 시절 길가에 서 있다가 사륜마차에서 내리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불쌍한 아이들의 모습과 똑같음을 깨달은 것이다. 자신도 그 아이들에게 동전을 건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 아이의 얼굴에서 순수하고 따뜻한 진심이 느껴졌다. 그 돈을 받지 않으면 너무 크게 실망할 것 같아서 …… 세라는 자존심을 억누르고 뺨을 붉히면서 말했다.
“고마워. 넌 정말 착하고 친절한 아이구나.”
--- p.229
“난 곧 죽고 말 거야. …… 못 참겠어. 죽을 것 같아. 춥고 옷도 다 젖었어. 배고파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오늘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다녔는데,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혼나기만 했어. 마지막에는 요리사가 가져오란 걸 못 찾았다고 저녁도 주지 않고. 신발이 낡아서 진흙탕에서 미끄러져 넘어진 건데 사람들은 날 보고 웃어 댔어. 내가 흙탕물을 뒤집어썼는데 사람들은 그걸 보고 또 웃었어. 너 듣고 있어?”
세라는 에밀리의 멍한 유리 눈과 새침한 얼굴을 보다가 갑자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세라는 조그만 손으로 의자에 앉아 있던 에밀리를 사정없이 끄집어내 내동댕이치며, 격렬한 울음을 터뜨렸다. 한 번도 운 적 없던 세라였다.
“넌 그냥 인형이야! 인형, 인형, 인형일 뿐이라고! 넌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어. 네게는 톱밥밖에 없어. 심장이 없다고. 절대로 아무것도 느끼질 못할 거야. 넌 그냥 인형이야!”
--- p.241
“끔찍이 힘들 때, 그야말로 끔찍이도 힘들 때면, 난 내가 공주라는 생각을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해.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거야. ‘나는 공주야. 나는 동화 속 공주야. 나는 동화 속 공주라서 그 무엇도 나를 해치지 못하고 나를 속상하게 하지 못해.’ 그러면 정말 싹 잊을 수 있더라.”
--- p.294
‘다락방 소녀에게, 친구가.’
그 글을 읽은 순간, 좀처럼 울지 않는 세라가 책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누군가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어. 친구가 있는거야.”
--- p.363
“당신은 만만치 않은 짐을 떠안은 겁니다. 얼마 안 가 알게 될 거예요. 그 애가 정직하지도 않고 고마워할 줄도 모른다는 걸요. 넌 다시 공주가 된 기분이겠구나.”
마지막의 가시 돋친 말은 세라를 향한 것이었다.
세라는 고개를 숙이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무리 포용력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상상놀이를 처음부터 이해하기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 보잘것없는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에요. 못 견디게 춥고 배가 고파도, 공주처럼 행동하려고 말이에요.”
--- p.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