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환원주의는 이제 완전한 이념으로 변신했다. 나는 그것을 ‘기후주의climatism’라고 부른다. 기후주의는 기후 환원주의에서 자라났지만, 더 만연하고 서서히 스민다. 동시에 더 교묘하고 떼어내기가 어렵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 기후주의는 기후 변화 개념을 사용하여 세상의 문제들을 ‘자연화naturalize’한다.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탈레반의 승리, 산불 관리,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람들의 이동―은 모두 기후와 관련된 일이 되고 있다(기후화climatize).
이런 사회적 결과의 ‘자연화’는 사람들이 과거에 생물학적 인종 이론을 이용했던 방식과 흡사하다. 인종차별주의 사고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흑인이기 ‘때문에’ 학습에 어려움을 겪고, 동아시아인이기 ‘때문에’ 수학을 잘한다. 기후주의 역시 이런 식이다. 어떤 나라들은 열대 기후대에 있기 ‘때문에’ 경제적 실적이 좋지 않고, 다른 나라는 기후 변화 ‘때문에’ 전쟁을 벌인다. 어떤 사람들은 기후 변화 ‘때문에’ 이주한다. 바깥이 덥기 ‘때문에’ 인종차별적 트윗에 ‘좋아요’를 누른다. 비가 너무 많이 왔기 ‘때문에’ 홍수가 난다. 기후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사이의 본질적인 공통점은 세계의 복잡성(인간의 차별성이든 사회생태적 복지든)을 이해하는 일을 편파적이고 불확실한 과학적 프로젝트(생물학적 인종 이론이든 기후 모형화든)로 쪼그라들게 한다는 것이다.
---「머리말」중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비유는 기후 변화의 공공 정치 담론에 결핍성을 더한다. 시간은 항상 모자라고, 행동은 항상 시급하며, 행동할 시점은 항상 바로 지금이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틀짜기는 정치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다. 기후 미래는 그때가 되면 어떤 정책 조치도 무용지물이 되는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라는 한계점 측면으로만 이해된다. 시간이 없다면, 탄소 배출을 막는 어떤 정책이든 도입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과를 폭넓게 고려하지 않고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시행’하는 일은 위험하다. 시간에 쫓기면 당연히 중장기적 사고는 불가능하다. 심리적으로 기한은 그 시점 이후의 미래를 상상하는 인지적 능력을 억제하는 힘이 있다. 또한 ‘종말’이 다가오는 상상 속에서 다른 대중 집단 사이에 공황, 두려움, 무관심의 정서를 유발한다.
---「제2장. 기후주의는 어떻게 생겨났을까?」중에서
기후주의 이념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만든 지지대에 크게 의존한다. 다시 말해 기후주의의 인식적?표현적 신뢰성은 기후 과학과 기후 과학자들의 주장에 의존한다. 이것은 기후주의가 특정 종류의 비판에 취약하다는 뜻이다. 기후 과학의 주장이 틀렸다거나 과장되었다고 판단되면, 전체 중 일부만이 그렇더라도 기후주의 전체 구조가 의심받을 수 있다. 반대로 기후주의 때문에 기후 과학이 정치적 압력을 받아 왜곡될 가능성도 열린다. 기후 과학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후 과학의 권위와 ‘진실’을 옹호할지도 모른다. 비평가나 일반 대중에게 과학의 찜찜한 불확실성과 해결되지 않은 모호성을 드러내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제3장. 과학이 기후주의에 빠지는 과정」중에서
기후 변화에 대한 종말론적 표현은 강력하다. 동시에 매력적이기도 하다.
(중략)
캘리포니아에 거주했던 당시 27세 틱톡 사용자 찰스 맥브라이드는 2021년 10월에 한 영상을 게시해 자신이 ‘기후 멸망론자’라고 밝혔다. 기후주의에 관한 암울한 종말론적 수사에 영향을 받은 기후 멸망론자들은 기후 변화를 늦추거나 멈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다. 맥브라이드는 “지구 온난화에 압도당한 느낌, 걱정스럽고 우울하다”고 털어놓으며, 팔로워 15만 명에게 이런 감정의 중독에서 벗어나게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싸워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게 있다고, 결국 우리가 승리할 수도 있다고 저를 좀 설득해 주세요. 비록 잠시뿐일지라도요.”
기후 변화를 둘러싼 종말론적 수사는 그것이 지닌 매력만큼이나 다른 여지를 배제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종말론적 수사는 어감의 차이나 협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서술적 구속을 생성할 수 있다. 게다가 거기에는 숙고와 논쟁이 들어설 담론의 장도 없다. 사실 그런 공간은 경쟁적인 이해관계와 목표들을 융화하는 어려운 정치적 작업을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종말론적 수사는 도덕적 이원론과 연관되기도 한다. 그것은 세계를 친구와 적으로 나누며 내부와 외부 그룹 사이의 경계를 강화한다. 이는 기후주의 이념이 지닌 네 번째 매력과 연결된다. 바로 도덕적 선 긋기를 약속한다는 점이다.
---「제4장. 거부할 수 없는 기후주의의 매력」중에서
기후주의의 문제는 지구 온도를 다른 목표보다 우선시하는 까닭에 이런 절충안을 찾는 일이 방해받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런 절충안을 논하는 것조차 패배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기후 변화 억제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과제이다.” 파리협정은 지속 가능한 발전과 빈곤 퇴치를 위한 노력의 맥락을 ‘인식’할 뿐, 무엇이 성공인지에 관해서 입장이 확실하다. 바로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에서 2도 사이 범위에서 안정화하는 것이다. 나는 기후주의가 주장하는 성공의 척도보다 더 포괄적인 척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속가능발전목표들을 파리협정의 기후 목표보다 우위에 놓을 필요가 있다. 지속가능발전목표들은 지구 온도, 탄소 예산, 탄소중립에 대해 과학적 설명을 제공하며, 이것은 종종 숨겨진 가치 또는 무언의 가치를 나타내는 대리자 역할을 한다. 기후주의의 추진력은 앞뒤가 바뀌어야 한다. “우리는 지속가능발전목표들을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그것은 지구 온난화라는 맥락을 인식하는 가운데 추진된다.”
---「제6장. 기후주의를 해독할 대안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