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진 거야.” 울고 있는 젠틸레스키에게 타시가 다가왔다.
비열한 얼굴을 쑥 내밀었다.
“너를 끝까지 괴롭혀줄게.” 타시가 속삭였다.
“죽어!” 젠틸레스키는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깼다.
“여보, 또 그 꿈이야?” 남편 스티아테시가 웅얼댔다. 젠틸레스키는 한참을 뒤척였다. 결국 작업실로 내려왔다. 붓을 쥐었다. 그림을 그렸다. 붉은색 물감을 거침없이 찍어 발랐다. 그사이 달이 지고 해가 떴다.
“또 그 장면을 그려?”
잠에서 깬 남편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려왔다.
“맞아. 영원한 복수를 위해서.”
젠틸레스키는 혼잣말을 하는 듯 목소리를 깔았다. 그럼에도 타시는 끈질겼다. 잊을 틈도 없이 꿈속에서 졸졸 따라왔다. 젠틸레스키는 그 악몽에 시달릴 때마다 이처럼 작업실로 내려왔다. 타시의 목을 쥔 그림, 그놈 목을 베는 그림, 그 자식의 피가 사방에 튀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 p.43~44, 「여성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죠_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중에서
갓 구운 빵을 꺼내오고 있는 마르게리타 루티Margherita Luti였다. 라파엘로는 루티를 봤다. 밤처럼 검은 눈, 풍성하고 윤기 나는 머릿결, 곧게 편 허리가 들어왔다. 라파엘로를 보는 루티의 얼굴도 포도주처럼 붉어졌다. 사랑의 종이 울렸다. 라파엘로가 테베레 강을 지나던 중 우연히 멱을 감던 루티를 봤고, 곧장 첫눈에 반했다는 설도 있다. 당시 둘의 나이 차는 열두 살로 추정된다. 열 살에서 열일곱 살 차이로 보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라파엘로는 다른 사람과 약혼했다. 상대는 마리아 비비에나Maria Bibbiena였다. 그쯤 라파엘로는 오래전부터 교황청의 유력인물인 메디치 비비에나 추기경Cardinal Bibbiena에게 “내 조카와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추기경과 깊은 우정을 쌓았던 라파엘로는 마지못해 그 강요 같은 제의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라파엘로는 루티를 포기하지 못했다. 라파엘로는 매일 밤 마리아가 아닌 루티의 손을 잡았다. 마리아와의 결혼은 3~4년씩 미뤘다. 그런 그는 1518년, 결심한 듯 루티 앞에서 붓을 들었다. 라파엘로는 루티에게 터번을 올려줬다. 한 손으로는 가슴, 한 손으로는 다리 사이를 가리도록 했다. 정숙한 비너스, 베누스 푸디카Venus Pudica의 자세였다.
“그대로 있어줘.”
라파엘로의 귓속말에 루티는 쑥스럽게 미소 지었다. 라파엘로는 춤추듯 그림을 그렸다. 라파엘로는 막바지쯤에 붓질을 망설였다. 그는 이내 마음을 굳힌 채 다시 붓을 댔다. 루티의 왼손에 루비 반지가 그려졌다. 루티의 팔에는 리본이 새겨졌다. ‘RAPHAEL URBINAS(우르비노의 라파엘로)’. 이 서명은 루티를향한 사랑의 맹세였다. 이 그림은 훗날 〈라 포르나리나La Fornarina〉(제빵사의 딸)로 알려진다.
--- p.108~109, 「천재적으로 재능을 훔친 천재_라파엘로 산치오」중에서
휘슬러는 지금 어머니를 캔버스에 담고 있다. 원래는 섭외해둔 다른 모델을 그리려고 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모델이 약속을 깨버렸다.
“아들아.” 그때 어머니가 말을 걸었다.
“날 그려도 괜찮다.” 담담하게 제안했다.
“풀어놓은 물감이 아깝잖니.”
휘슬러는 더는 못 들은 척할 수 없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제가 안정적으로 살길 바랐어요. 제 역량으론 택도 없는 목사, 제 실력으론 넘볼 수 없는 군인이 되길 바라며 몰아세웠어요. 알아요. 어머니도 희생했어요. 저에게 당신의 모든 걸 바쳤어요. 그런데 어머니. 저는 그게 싫었어요. 무조건적 희생, 밑도 끝도 없는 통제에 숨이 막혔어요.
[…]
〈회색과 흑색의 배치 1번〉. 휘슬러는 그림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다른 이가 보면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나의 어머니〉 따위의 제목은 생각한 적도 없었다. 휘슬러는 그렇게 끝까지 어머니와 선을 그었다. 훗날 이 작품은 그의 뜻과 상관없이 〈화가의 어머니〉 등의 제목을 달고 널리 알려진다. 그가 알았다면 불같이 성질을 냈을 터였다. 휘슬러도 어머니가 가엽기는 했다. 그는 그럼에도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다.
--- p.154~156, 「애증의 어머니를 탈피해 나비가 된 남자_제임스 휘슬러」중에서
1881년. 40대를 바라보던 르누아르는 돌연 이탈리아로 갔다. 후원금과 그림 판 돈을 긁어모아 고전의 본고장을 견학했다. 르누아르에게는 분명 전에 없던 여유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시절 이탈리아 유학은 부르주아의 특권으로 칭해질 만큼 만만찮은 일이었다. 프랑스 정부도 프랑스 내 최우수 예술가를 뽑는 대회의 특전으로 이탈리아 체류권으로 내걸 정도였다. 낯선 땅에 온 르누아르는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인 라파엘로 산치오의 작품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르누아르 그림? 예쁜데 거의 다 비슷하지 않아?”라는 말을 듣고 슬럼프를 느낀 차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르누아르는 라파엘로 또한 빛의 효과를 완벽하게 이해한 화가였다는 점을 깨달았다. 단지 추구하는 게 달랐을 뿐이었다.
르누아르는 이 불세출의 천재를 통해 자기가 인상주의에 묶일 필요가 없다는 걸 절감했다. 인상주의에 얽매이지 않으면 더 찬란한 그림, 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그해부터 인상주의 전에 작품 내기를 거부했다. 르누아르는 3년여 동안의 고민과 연구의 결과물로 〈목욕하는 여인들〉을 내놓았다. 여인 세 명이 목욕을 즐기는 모습이 눈길을 끄는 누드화였다. 등장하는 이들 모두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내지 요정 같았다. 붓놀림은 단정하고, 윤곽선도 뚜렷했다. 고전주의 색채가 인상주의 특유의 흐릿함을 억눌렀다. 르누아르는 이 그림을 전후로 인상주의의 울타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 p.236~239, 「꽃과 여인, 오직 인생의 환희_오귀스트 르누아르」중에서
중섭 가족은 1951년 봄부터 겨울까지 근 1년간 이 방에서 옹기종기 지낼 수 있었다. 배고프고 비루한 순간들이었다. 그러나 훗날 중섭은 이 시기가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하고 풍요로운 때였다고 추억한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허나 아름답도다”라는 시를 쓸 정도였다. 서귀포에 새롭게 둥지를 튼 중섭 가족은 한라산에서 뜯어온 부추를 씹어 먹었다. 그것마저 떨어질 때는 바다로 갔다. 게를 잡았다. 아이들은 놀이하듯 게를 잡고, 건지고, 쫓아갔다. 중섭과 마사코는 이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 순간만큼은 눈물겹게 행복했다. 이후 중섭은 가족과 떨어진 후 이때를 회상하며 〈그리운 제주도 풍경〉을 그렸다. 삶이 휘청일 때마다 꺼내 먹고, 또 꺼내 먹은 추억을 화폭에 담았다. 벌거벗은 아이들이 게와 씨름하듯 놀고 있다. 이를 보는 중섭과 마사코는 아무 걱정이 없는 듯하다.
중섭은 밝은 미래를 꿈꿨다. 소일거리도 하나둘 들어왔다. 이쯤 뭍에서 반가운 소식도 닿았다. 전쟁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었다. 중섭은 부푼 꿈을 안았다. 가족을 이끌고 다시 부산으로 갔다. 중섭은 땅을 밟자마자 절망했다. 소문은 가짜였다.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교착 상태였다. 중섭 가족을 맞이한 건 한파와 빈곤뿐이었다.
“여보, 괜찮소?”
중섭은 그쯤부터 마사코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마사코는 자꾸 기침을 했다. 입에 댄 손수건에 피가 묻어 나왔다.
“아고 리. 여긴 너무 추워요.”
마사코는 폐결핵에 걸렸다. 요 며칠 풀죽만 먹인 아이들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1952년, 마사코와 아이들은 일본으로 갔다. 요양을 위해서였다. 그쯤 장인도 사망했기에, 더더욱 가야 했다.
--- p.292~293, 「절절한 그리움 끝에 남은 사랑꾼의 엽서_이중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