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도는 교회를 사로잡아 온 관심사다. 복음 전도의 강조에는 분명 교회가 맞닥뜨린 심각한 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주류 교회는 교인 감소, 헌금 감소, 영향력과 중요성의 약화를 감지하면서 ‘생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러한 표면적 의제 이면에는 복음의 주요 주장에 대한 우리 문화의 저항이 우리 가운데 점점 커가고 있다는 인식이 있다. 이러한 저항은 세속주의의 형태를 띠고, 종종 무관심으로 표현되고, 흔히 그 대응으로 일종의 두려운 율법주의를 부추긴다. 하지만 세속주의의 힘은 결국 파괴적이고, 율법주의의 반응은 교회 편에서 적절한 대응이나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중략)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복음 전도의 실천을 위한 결정적 단서를 성경 본문 자체의 드라마와 역동적인 접촉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우리 편에서 본문에 대한 매우 다른 이해와 관계를 요구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성경 본문이 흔히 생각하듯이 도덕이나 교리를 위한 교과서도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역사 기록도 아니라고 가정한다. 오히려 성경 본문은 ‘본문 사용자,’ 즉 교회와 회당 안의 독자들에게 참여하라고 초대하는 창의적인 현실 모델의 표현이다. 본문은 ‘거기’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항상 ‘현재 시제’와 동시대성을 고수하기 때문에, 본문은 계속 살아서 독자들을 초대한다. 따라서 성경 본문은 단순히 (단번의 신적 계시나 저명한 인간 저자에 의해) 확정되고 고정되지 않는다. 성경 본문은 공동체에서, 특히 예배를 실천할 때, 또한 다른 여러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반복적인 사용으로 형성되었고, 또한 반복적인 사용을 위해 형성되었다.
---「들어가는 글」중에서
나는 복음 전도란 ‘본문을 다시 실천하여’ 우리의 본문으로, 또한 우리에게 전해져 우리 자신의 시간과 공간 안에 수용되고, 전유되고, 재연되기를 기다리는 ‘소식’으로 삼는 것이라고 제안한다. ‘본문을 실천한다’는 표현을 통해 나는 본문의 드라마를 즐기고, 주목하고, 참여하고,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복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따라, 모든 본문이 우리에게 유용한 모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본문이 동일한 변혁적 잠재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분명 ‘소식’에 대해 특정한 시각에서 특정한 종류의 표현을 하는 본문들을 선별했다. 나는 일부 본문의 발자취는 복음 전도라는 우리의 주제 및 교회 생활의 신실한 순간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고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래서 나는 그 방향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특히 복음을 표명하는 본문에 집중했던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의 관행에 호소한다.
교회에서 역효과를 낳는 ‘진보’와 ‘보수’ 사이의 기만적인 싸움에서 본문의 극적인 힘은 대체로 사라졌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표현적 개인주의’를 지향하는 자유주의의 오독 혹은 결국 자유 시장 정책 및 경제와 특징적으로 결합된 율법주의적 순응을 지향하는 보수적 성향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복음 전도는 ‘표현적 개인주의’나 율법주의적 순응으로부터 교회가 해방되고, 이 공동체가 자신의 존재의 모든 차원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삶을 반복적으로 잉태했던 본문의 드라마를 다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고 제안한다. 성경 본문은 우리의 목소리와 다른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 ‘본문의 실천’이란 본문의 목소리가 우리의 공동생활에서 온전한 발언권을 갖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들어가는 글」중에서
복음 전도는 드라마,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는 내러티브 진술이다. 복음 전도는 고립된 사건이나 단순한 결단이 아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드라마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각각의 등장인물은 적절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중략) 드라마의 사건은 현실을 바꾸어 놓았다. 갈등은 깨끗이 해결되고, 갈등은 믿을 만하게 전달되고, 갈등은 진지하게 전유된다. 경기 소식은 현장에 있지 않은 이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세 장면의 드라마는 완결되지 않았다. 각각의 장면은 틀림없이 끝없이 재현된다. 워싱턴 레드스킨스는 패배 상태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인 갈등이 일어나는 첫 장면은 항상 다시 반복되어야 한다. 한 번은 세인트루이스에서, 한 번은 워싱턴에서 해마다 승리를 다시 쟁취하고 다시 재현해야 하는데, 항상 ‘다음 해’가 있다. 게다가 조지 앨런은 세인트루이스에서 충분히 미움받는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그 미움도 다시 재현되어야 한다. 선수와 코치, 팬, 아나운서는 영웅과 하찮은 선수에 대해 오래 추억하거나 불평하는데, 영웅과 별 볼 일 없는 선수는 다시 반복해서 ‘재지명’되어야 한다. 매번 반복될 때마다, 경기 장면이 다시 완결될 때까지 결과는 계속 반복해서 위태로운 상황에 놓인다. 매번 완결될 때마다, 청중과 후원자들은 경기가 다음에 다시 벌어질 때까지 이것이 진짜 현실이라고 여긴다.
---「1장 완성되지 않은 세 장면의 복음 전도」중에서
지금까지 나의 주장은 전도의 분류학 비슷한 것을 추적하려는 시도다. (중략) 내가 이런 방식으로 주장을 펼친 이유는 두 가지 주요 논점을 고수하고 싶기 때문이다. 먼저, 복음 전도는 세 장면의 드라마로, 각각의 장면은 다른 장면과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의 일반적인 성향은 복음 전도와 관련된 모든 것을 두 번째 선포 장면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내가 모은 데이터는 이 극적인 순서와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특징을 보여 준다. 한편으로, 선포와 선포자는 첫 번째 장면, 곧 실제 갈등과 승리에 참여하지 않았고 현장에 있지 않았다. 갈등과 승리는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다른 곳에서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 삶 속의 전유는 선포를 통해 자동적으로, 선뜻, 쉽게 뒤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전유는 희생이 뒤따르는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이다.
둘째, 복음 전도의 전체 드라마는 정의상 미완성이고 그 모든 부분에서 반복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복음은 그 극적인 성격이 이해될 때 모든 것이 일순간에 확정되는 ‘불변의 계약’이 아니다. 복음은 끈질긴 악과 왜곡, 소외 앞에서 언제나 다시 해석되어야 할 계약이다.
이 드라마에 대한 각각의 해석은 다른 모든 복음의 재현만큼 긴급하고, 위험하고, 희생이 뒤따른다. 성경은 이 위험한 소식의 계속되는 재현이다. 교회 공동체는 이 드라마에 계속 참여하면서 이 드라마가 세상 속 삶에 대한 결정적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이 드라마를 하나의 이야기 전달로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의 증언과 우리 자신의 삶의 경험 둘 다에 비추어 볼 때, 그와 같은 축소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1장 완성되지 않는 세 장면의 복음 전도」중에서
복음 전도는 전통적인 교회를 지탱하는 안전한 교회 활동이 아니고, 사회적 현상 유지를 지지하는 의례적인 사업도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복음 전도는 세상과 이웃, 자신에 대한 변화된 인식을 낳고 그 세상에서 다르게 사는 권한 부여를 낳는 변화된 의식의 활동이다. 하나님이 승리하셨다는 소식은 변화된 삶을 의미한다. 즉 그 소식을 듣고 변화되어, 세상을 변화시키고, 노예를 해방하고, 언약을 맺고, 약속을 지키고, 정의를 명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개인과 공공의 삶을 점차 더 많이 가져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복음 전도 드라마는 일회적인 사건이 결코 아니라, 승리-선포-전유의 순서를 반복적으로 관통하는 내러티브다. 복음 전도 공동체인 교회는 이 드라마를 재연하고 전유하는 일에 끊임없이 참여하고, 이 위험한 대안적 세계로 재편입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복음 전도 드라마의 중심에 있는 주장의 실재는 우리에게 숨겨져 있어서 확실성을 추구하는 우리의 기술 능력을 거부한다. 기본적으로 성경의 신앙은 우리의 공동생활의 격을 떨어뜨리거나 예속하거나 분열시키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이기셨다고 단언한다. 죽음의 힘은 회복력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승리는 새로운 형식과 장소에서 끝없이 반복되고 재연되고 복제된다. 항상 새로운 승리의 결과로, 가장 창의적인 선포와 가장 용기 있는 전유가 우리의 책임으로 남아 있다.
듣고, 응답하고, 전유하는 드라마는 일차원적인 일반화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선포된 소식의 전유는 항상 구체적이고, 특수하고, 전복적이다.
---「나가는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