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정통적인 의미에서 독서 경험은 경험이라 할 수 있을까? 독서로 훈련된 상상력은 현실에서도 상상력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 두 질문을 내게 던지며 그것에 답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음 활자의 부름에 반응했던 유년기부터 내가 광기에 사로잡혀 활자를 잃어버리거나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것은 계속 해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명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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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한창인 깊은 숲속 마을에서 겨자씨처럼 작고 불확실한 유년기를 어떻게든 살아 내려고 했던 나에게, 책은 현실로 이어지는 구름다리가 아니라 오히려 절벽 아래 어둠 속으로 베어 버리는 도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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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독서란 여러 지점으로부터 집중된 다양한 충격과 자극의 총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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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 장소를 여행했고 점차 자신을 변화시키기도 했지만, 기본적인 내 생활은 활자를 통해 파악된 세계와 현실 세계와의 대조 작업을 피하려는 태도로 일관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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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에 펼쳐진 어둠과 빛 속에 있는 사물을 현실 세계로 끌어내는 조작에 의해서 생명을 부여할지 말지를 결정하지만, 나는 단적인 가공과 현실의 대조 작업을 원하지 않는 상태였고,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든 나의 정신은 외국어라는 ‘또 하나의 활자, 또 다른 활자’의 학습이 필요한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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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활자 너머의 어둠에 존재하는 불안과 흡사한 새로운 불안을 느끼며, 판독 불가한 기호를 써서 타인에게 해석이 불가능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고독한 광인이 아닐까, 하고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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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자 균형 장난감도, 나를 쫓는 개도, 다름 아닌 활자에 존재하고, 활자 너머의 광활한 어둠과 활자 앞에 있는 나의 어둠 속에 깃들어 있다. 내가 아직 대학생이었을 때 선택해 버린 것은, 그러한 가공과 현실 틈새에 있는 뒤틀림을 피할 수 없는 직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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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 로렌스, 헨리 밀러, 노먼 메일러의 ‘성적인 것’은 로렌스처럼 확실한 빛이 뚜렷하지 않거나, 밀러의 경우에는 격한 생명력으로, 메일러의 경우에는 거대한 암흑에 맞서자마자 그대로 암흑에 흡수되는 에너지를 부정할 수 없는 ‘성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존 업다이크는 가능한 모든 상상력을 활용하여 ‘성적인 것’을 폄하시킨다.
--- p.83
나는 일찍이 문장을 활자로 쓰기 시작할 때부터, 타인이 쓴 활자 너머의 어둠에 어떤 위험하고 긴장된 존재를 발견했다. 때문에 나의 말을 구축하기보다, 타인의 말을 분석하는 일에 열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존재의 중심에 폭력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지금은 확실히 인정할 수 있다.
--- p.104
내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나는 사회를 외면하고 나의 내부에 잠재하는 어둠의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려고 했다. 또는 나 자신에게 적합한 내부를 구축하려고 했고, 의식화된 나를 초월하는 싹과 함께 어둠을 비축하려 했던 것이다. 이 어둠과 그 내부에 잠재된 실체를 분별할 수 없는 기괴한 착상은 처음부터 프로이트적인 것은 아니었다.
--- p.126
작가는 독자에게 더 이상 충실히 완성된 폐쇄적인 세계를 수용하기를 바라지 않고, 그것과 반대로 스스로 창조에 참여하는 일, 자기 손으로 작품과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을 통해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 가는 방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_알랭 로브그리예, 『누보로망을 위하여』
--- p.144
내가 생각하는 ‘거짓’이 아닌 진정한 사회 내 존재로서의 작가란 자기 내부의 어둠 속에 숨은, 또한 숨어 있을지 모르는 것을 말로 탐색하고 용량의 한계를 확대하여 그것을 위한 전모를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객관성을 갖추어 구축물로 만드는 제한적인 역할만을 담당하는 존재이다.
--- p.161
개인을 죽이고 집단을 모두 죽인다. 이를 위해 온갖 일들이 지혜를 짜내어 고안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점차 대량 학살 쪽으로 향하고 있다. 난징대학살에서 일본인은 장헌충과 그 부하들이 자행한 살육을 훨씬 능가했으리라. 아우슈비츠의 살육,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의 살육, 그 대량 학살의 방법과 규모에 있어 20세기는 역사상 정점에 서 있다.
--- p.183
돈키호테는 오직 나를 위해 태어났고, 나도 그를 위해 태어났다. 그는 행동할 수 있었고, 나도 그것을 쓸 수 있었다. _세르반테스
--- p.200
숲속 골짜기에서 떠난 그 순간부터 후퇴 불가능한 상태로 나는 완전히 나의 진짜 말의 토양으로부터 뿌리째 뽑혀 버리고 말았다. 나는 활자 너머의 어둠에서 상상력의 활성화 작용을 공급받아 생생하게 혈액이 순환하는 진짜 말을 발굴하기 위한 노력을 통해 뿌리 없는 풀의 불안에 맞서 살아왔다.
--- p.221
숲속 골짜기 꼬마였던 나 또한 이미 그러한 의미에서 충분히 완고한 인간이었고, 골짜기 마을의 시간을 뒤덮은 폭동 주모자의 환영을 따라 “황제여, 당신에게 상상력이 없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라고 절규하는 몽상을 계속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 p.229
도쿄의 대학 생활을 바탕으로 그 한가운데서 나는 소설을 쓰고 발표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소설의 주제는 숲에서 송두리째 뽑힌 것처럼 도시에서 살아가는 청년의 불안과 그가 뜨거운 마음으로 불러일으킨, 전쟁기에 체험한 숲속 마을의 기억이었다.
--- p.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