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적 결과에 초점을 맞출 경우, 비록 이런 서술도 중요하긴 하지만, 전쟁을 불러온 폭넓은 위기, 여러 전시 충돌의 상이한 성격, 전쟁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맥락, 나아가 1945년에 교전이 공식 종결된 이후에도 오래도록 이어진 불안정한 폭력에 대한 너무나 많은 질문을 회피하게 된다. 무엇보다 2차대전에 대한 종래의 견해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일본 군부를 위기의 결과가 아닌 원인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들은 위기의 결과였다. 20세기 초 수십 년간 전 세계에 걸쳐 사회적 ·정치적 ·국제적 불안정의 시절을 낳고 결국 추축국으로 하여금 제국주의적 영토 정복이라는 복고적 계획에 착수하도록 자극한 더 넓은 역사적 힘들을 이해하지 않고는 2차대전의 기원과 경과, 결과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제국주의적 야망이 패배하고 나자 세계가 비교적 안정을 찾고 영토제국들이 최후의 위기를 맞을 정세가 서서히 조성되었다.
---「들어가며」중에서
나는 전쟁 시기에 대한 커다란 질문들을 제기하는 역사를 의도했고, 사람들이 그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얼개를 이해함으로써 개개인의 경험을 더 유의미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랐다. 이 책은 죽음, 테러, 파괴, 궁핍의 역사, 즉 코델 헐이 말한 ‘망연자실한 시련’의 역사이기도 하다. 피와 폐허는 혹독한 대가였다.
---「들어가며」중에서
근대적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시도와 제국을 획득하거나 확장하려는 시도의 연계는 1914년 이전에 아주 흔하게 나타났다. 심지어 동유럽의 유서 깊은 로마노프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도 발칸에서 제국 열망을 품었거니와 이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해외 제국을 공고히 하거나 건설하려는 국가들의 경우, 국가 건설과 제국주의의 연계가 명확했다. 그냥 국가가 아닌 ‘국가-제국(nation-empire)’은 영토 쟁탈전에 뛰어든 이런 국가들을 정의하는 용어다. 이른바 ‘제국주의의 국유화’는 1930년대와 폭력적 영토 획득의 마지막 물결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제국은 시민과 신민, 문명과 원시, 신식과 구식(1940년대까지 이 양극성이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국의 통제 아래 들어온 주민과 영토를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했다)의 대비를 부각시킴으로써 세계주의적 권력을 더 분명하게 규정하는 역할을 했다. 모든 제국주의 열강이 공유한 이 세계관은 피점령 영토의 기존 문화와 가치를 거의 전부 무시했다. 새로운 소비자부터 개종자까지, 제국이 제공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기대는 대부분 과장된 것이었다. 비르테 쿤드루스가 말한 ‘제국 환상’은 국가 간 경쟁을 부추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심지어 제국의 비용이 제국을 보유해 얻는 대개 한정된 이익을 한참 상회한다는 것이 분명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미개척 변방에 정착하거나, 황금이 넘쳐나는 엘도라도를 발견하거나, ‘문명화 사명’을 수행하거나, 명백한 운명을 실현하여 민족의 활력을 되살릴 수 있다는 강력한 환상이었다. 이 환상은 그 이후 50년간 ‘제국’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서론」중에서
일본, 이탈리아, 독일 측에 결정적인 요인은 영토였다.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인 여러 방식으로 행사하는 영토 통제권이야말로 제국의 핵심 요건이었다. 이 ‘영토성’ 원칙의 모델은 1930년대 이전 40년간 진행되었고 경우에 따라 여전히 진행 중이던 폭력적 영토 확장 및 평정이었다. 이렇게 더 장기적인 맥락을 고려해야만 도쿄에서, 로마에서, 베를린에서 국지적 침공전을 벌이기로 결정한 이유를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 이래 제국을 지탱해온 ‘인종과 공간’ 담론은 1930년대에 집권한 세대를 설명하는 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제1장 국가-제국들과 전 지구적 위기, 1931-1940」중에서
대중동원은 현대전의 총체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국가와 국민이 맺는 계약에 달려 있었다. 군대에서나 후방에서나 총력전을 위해 국가동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결코 진지하게 의문시되지 않았다. 총력전의 영향에 순응하지 않거나 그 영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국가는 저마다 전쟁 노력에 무언가를 보태도록 요구하는 선전을 퍼붓는 한편 전쟁에 기여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애국적이고 심지어 반역적인 존재로 몰아 고립시켰다. 예컨대 직무 태만으로 고발된 소련 노동자와 경영자가 그러했고, 동포들에 의해 사보타주 혐의로 FBI에 고발된 미국인 1만 8000명이 그러했다. 어느 나라에서든 총력전은 모두의 참여를 요구했지만, 국민들이 그 필요성을 스스로 납득하는 정도만큼만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1945년 미국 평론가 드와이트 맥도널드는 막 끝난 전쟁에서 드러난 시민과 국가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했다. “바로 이 영역에서 개인이 현실적으로 가장 무력하기 때문에 그의 통치자는 국가를 그의 목표의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그의 개성의 확장으로도 제시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다.” 총력전은 남자든 여자든, 청년이든 노인이든, 자유민이든 비자유민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공동의 싸움과 노동에 능력껏 이바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 시기는 그전에도 거의 가능하지 않았고 이제는 도무지 불가능한 독특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제4장 총력전 동원하기」중에서
학습곡선은 결과를 평가하고, 바로잡을 점을 확인하고, 노동력을 훈련시키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합국으로서는 초기에 연달아 재앙을 맞은 이후에 전세를 뒤집을 만한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 아주 중요했다. 연합국의 세 주요 국가 모두 초기에 일련의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추축 국가들은 1940년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했던 것처럼 군사력으로 적에게 신속하고 결정적인 패배를 강제할 수 없었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영국 제도를 침공할 수 없었고 북아프리카에서 저지당했다. 일본은 미국이나 영국을 침공할 수 없었다. 소련은 한입에 삼키기에는 너무 거대한 지리적 실체로 밝혀졌다. 추축 국가들은 모두 시간보다는 공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공간이 1942년에 그들의 진군 속도를 늦추고 결국 멈춰 세웠다. 연합국은 1942년에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본토를 침공할 수는 없었지만 이제 시간과 전 세계적인 세력권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군사능력을 재건하고 개선하는 방법을 알아내 전시 마지막 2년간 침공에 나설 수 있었다. 연합국의 군사조직은 조직이론가 트렌트 혼이 말한, 학습곡선을 그려갈 수 있는 ‘복잡적응계’가 되었다.
---「제5장 전쟁터에서 싸우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