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딸과 대화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그녀를 만나러 가는 중이지만 아무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며 어쩌면 영원히 비밀로 남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두 개의 삶을 살았다. 하나는 의지만 있다면 확인할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는 삶, 상대적 진실과 거짓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의 지인이나 친구들의 삶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또 다른 삶은 비밀리에 흘러가고 있었다. 우연의 일치로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지만, 어쩌면 그에게 소중하고 흥미롭고 꼭 필요하며, 그가 진심으로 대하는 모든 것, 즉,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일어났다. 이를테면 은행일이나 클럽에서의 논쟁이나 ‘저급한 족속’이라든지, 아내와 함께 지인들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아 가는 일 같은, 진실을 숨기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만든 거짓된 빈 껍데기 같은 것은 모두 표면으로 드러났다. 그는 다른 사람들 역시 자기와 같은 삶을 살거라 치부하며, 눈으로 본 것을 믿지 않았다. 밤이 되면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듯이 인간은 누구나 진실된 인생, 가장 흥미로운 삶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은 비밀 덕분에 버틸 힘을 얻으며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교양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그토록 애쓰는지도 모른다.
--- pp.48~49
그는 그들의 사랑이 언제 끝날지 알 수는 없지만 막연하게나마 앞으로 꽤 오랫동안 지속되리라 확신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에 대한 안나 세르게예브나의 마음은 더 깊어졌고, 그녀는 그를 무척 사랑했으며, 언젠가는 이 모든 것이 끝날 수밖에 없다고 그녀에게 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말한다 해도 그녀는 그의 말을 믿지도 않았겠지만.
그는 그녀를 달래주고 농담도 할 요량으로 다가가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벌써 흰 머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이토록 늙고 추하게 변한 자신이 문득 낯설었다. 그의 손아래 놓인 그녀의 어깨는 따뜻했고, 떨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삶, 아직도 이토록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그의 삶처럼 시들어 생기를 잃게 될 그녀의 삶이 측은해졌다. 그녀는 왜 그를 이토록 사랑하는 것일까? 그가 만난 여자들은 늘 그의 본 모습을 보지 않았고, 그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상상 속에 등장시키며 살면서 그토록 간절히 만나길 원하던 사람으로 포장하여 사랑했다. 나중에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그랬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와 함께 해서 행복하지 못했다. 시간은 흘렀고 여러 여자들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사랑한 적은 없었다. 수많은 감정을 느끼긴 했지만 그 안에 사랑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하얗게 세기 시작한 지금에 와서야 그는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 pp.50~51
″사실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니까!″
중위는 미안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면서 속삭였다.
″정말이야, 나도 이해가 안 간다고! 나도 이렇게 끔찍한 여자는 난생처음이야! 예쁘지도 않고, 똑똑하지도 않은데, 그러니까 뻔뻔한 데다 특유의 냉소주의에 끌렸달까….″
″뻔뻔한데다 냉소적이라...참 정직하네! 뻔뻔함과 냉소주의가 그렇게 좋으면 더러운 돼지를 잡아다가 산 채로 잡아먹지 그랬냐? 돈이라도 적게 들었을 텐데, 2천 3백루블이라니!″
--- pp.75~76
“만족을 넘어서 행복해! 타냐, 사랑스런 타냐, 당신은 정말로 아름다운 사람이야. 사랑하는 타냐, 난 정말 기뻐, 너무 기뻐!”
그는 그녀의 두 손에 열정적인 입맞춤을 한 후에 말했다.
“방금 난 밝고 놀라운 천상의 순간을 경험했어. 하지만 이 말을 당신한테 하면 당신은 나를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내 말을 믿지 않을테니 당신한테는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이야. 이제 당신 얘기를 하자. 사랑스러운 타냐, 착한 타냐! 난 당신을 사랑하고 이젠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어. 당신이 나한테 잘해주는 것, 하루에도 열 번씩 만나는 것을 나도 모르게 기다리게 돼. 집으로 돌아가면 당신 없이 살 일을 벌써부터 걱정하게 돼.”
“참! 당신은 이틀만 지나면 우리를 잊을걸. 우리는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지만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잖아.”
“아니, 아무래도 내 결심을 말해야겠어! 타냐, 당신과 같이 가야겠어. 그래 주겠어? 나와 같이 가겠어? 내 아내가 돼 주겠어?”
“어머!”
--- p.142
그에게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방금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는 부드러운 손이 끌어안았던 목은 마치 기름이라도 바른 듯 느껴졌고, 낯선 여자가 입 맞췄던 왼쪽 콧수염 부근은 허브수를 뿌린 것처럼 가볍고 시원한 느낌이 났으며, 그곳을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시원한 기운이 더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상하고도 낯선 감정으로 가득 찬 데다 생경한 이 감정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는 춤추고, 말하고, 정원으로 뛰어나가서 큰 소리로 웃고 싶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등이 살짝 구부정한 것, 그 자신이 지루한 사람이며 주황색 구레나룻과 '애매한 외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다.
--- pp.176~177
“선생님이 지금 모방한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은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이미 2천 년 전에 멈춰있고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르침은 실용적이지도 않고 인생에 큰 도움도 되지 않으니까요. 그들의 사상은 평생 공부만 하고 온갖 사상에 탐닉하던 소수만 좋아했고, 대다수는 이해하지 못했죠. 부유함이나 삶의 편리함에 무심하라거나, 고통과 죽음을 경멸하라는 가르침을 대다수의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왜냐하면 그들은 평생 부유함과 편리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고통을 경멸하는 것은 그들의 삶 자체를 경멸하라는 소리니까요. 본질적으로 인간의 삶은 허기, 추위, 부당함, 상실과 죽음 직전의 햄릿이 겪은 것과 같은 공포로 이루어져 있죠. 인간은 평생 이런 감정 속에서 살아가죠. 이로 인해 괴로워하거나 그것을 미워하기도 하지만 경멸할 수는 없어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스토아학파 학자들의 가르침에는 미래가 있을 수 없고 보시다시피 사람들은 세기가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통증에 맞서 싸우고 느끼며 자극에 반응하는 능력을 발전시켜오고 있습니다만….”
--- pp.246~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