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heaven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특정 신앙 공동체에 들어갈 필요는 없다. 세속 집단이든 신앙 공동체이 든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천국에 대한 인상은 천차만별이다. “천국”이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특정 모습을 떠올리곤 한 다. 물리적인 하늘sky을 떠올리기도 하고, 죽음 이후의 삶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지복의 상태라 여기기도 한다. 그리고 이 연장선 에서 천국을 믿는다고도, 믿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이 책의 목적은 천국과 하늘이라는 말에 대한 한 가지 생각만을 강요하는 데 있지 않다. 천국이라는 말이 어떻게 들리는지는 법으로 규정 할 수 없다. 또한, 이 책의 목적은 여러 전통을 두루 살펴서 절묘한 교집합을 찾으려는 데 있지 않다. 이러저러한 믿음의 논리나 불신의 논리가 널리 퍼져 있다 한들 별로 문제 될 건 없다. 어떤 공동체, 특정 공동체에 소속된 개인이라도 자유롭게 천국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오히려 이 책의 관심은 누구든 특정한 방식으로 천국에 대해, 하늘에 대해 듣는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생각해 보는 데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교 교회가 좋은 소식, 즉 복음과 관련해 천국과 하늘을 어떻게 언급하는지를 찬찬히 살펴보려 한다. 또한, 이 책에서는 복음이라는 맥락에 맞추어 천국, 혹은 하늘과 관련된 성서 구절들을 읽으면 어떻게 될지 살펴보려 한다. 이 특별한 맥락이 조리개가 되면 그리스도교의 천국과 하늘에 관한 이야기는 어떤 차이를 빚어 낸다.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은 곧 하늘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것이다.
---p.17~18
천국이 지닌 심상의 변천사를 다룬 현대 연구서들은 주로 천국에 얽혀 있는 개념이나 언어에 집중한다. “상위 세계”upperworld,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일”,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 “인간 갈망의 충족”fulfillment of human longing 등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런 연구서들은 지식과 정보를 다양하게 담고 있어서 당시 시대상과 사고방식이 담겨 있는 서사들과 신화들을 자세히 설명해 준다. 그러나 복음의 소식에 따라 천국에 관한 생각들을 검토하고, 무엇이 천국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신실하게 임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이를 검증하는 건 교의학의 과제다.
---p.24~25
한 세기 전, 하늘에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가까이 왔다는 복음의 증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냐는 문제는 개신교 신학계를 뜨겁게 달구었다. 대다수 학자는 하느님 나라가 예수가 전한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데 동의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 혹은 통치라는 개념, 하느님 나라가 현재 하늘에서 와 이 땅의 “현실 세계”를 전복한다는 사고방식을 성서학자들은 초기 그리스도교 복음 선포의 특징으로 여겼을 뿐 신뢰할 만한 소식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한 대로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진단을 받아들인 신학자들은 하느님 나라가 하늘에서 임한다는 증언은 유명무실하다고, 적당한 퇴로를 찾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우선 성서학자들은 이 증언을 싸고 있는, 덕지덕지 달라붙은 외적 세계관의 껍데기는 모두 벗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껍데기 안에 담긴 알맹이, 인간의 내면과 영적인 면과 관련된 진리를 오늘날에 맞게 살려낼 수 있다고 믿었다. 천국, 혹은 하늘에 관한 소식은 하느님이 개인의 영혼에 오는 것, 그리하여 하느님이 신자들의 마음과 의지를 통치하는 것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이제 천국, 하느님 나라는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가 주장했던 “순수하게 내적인” 도덕적 자율권의 측면으로 이해되었고, 이 땅에서 하늘이 이루어진다는 소식은 한 사회가 “윤리 공동체”로 실현되고 있다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하늘나라의 ‘가까이 있음’에 대한 해석의 범주는 우주론에서 인간학으로 전환되었다.
---p.77~78
천국과 하늘에 대한 복음의 묘사는 다양하며 이 책을 시작하며 말했듯 하나의 시선만을 허용하지 않는다. 분명 성서에도 천국을 하늘, 내세, 지복의 상태로 언급하는 부분이 있으며 이는 고대의 전통과 유사성을 지니고 있고, 우리 의식 깊은 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역사 속에서 인류는 대체로 그런 방식으로 천국을 상상하곤 했다. 그러나 복음서의 증언에서 이런 상은 별다른 위상을 지니지 못한다. 대신 복음서는 생명의 소식이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 가까이 왔으니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선포한다. 여기서 그리는 천국은 죽음부터 시작되거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음은 하늘이, 천국이 이미 가까이 왔다고 선포한다. 이를 복음서는 하늘에서 땅으로 향하시는 하느님의 길로 표현하기도 하고, 하늘도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그분의 통치 아래 있으며 새 창조로 조정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아울러 천국은 현존하는 공동체 혹은 정치체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하느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나라로 제시된다. 즉 복음서가 말하는 천국은 바실레이아, 곧 그분의 나라로 성서의 여러 곳에서 묘사하는 천국에 관한 모든 소리를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맥락이자 틀이다. 이 소식에 따르면, 천국의 ‘가까이 있음’은 비유로 나타나고 묵시적으로 실현된다. 달리 말하면 우리 곁으로 온, 우리 가까이에 이미 둥지를 튼 천국은 비유의 형태로, 감춰진 채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천국은 이미 자리해 있거나 사라질 기존 질서의 무언가로는 포착할 수 없는, 이미 일어나고 있고 새롭게 다가올 일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전혀 다른 현실이다.
---p.262
바이스는 하늘의 임함을 전혀 기다리지 않는 현대인의 태도는 예수의 말을 처음을 들었던 본래 청중, (그의 표현을 빌리면) “원시 그리스도교”인들의 태도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예수의 자격을 의심하는 인물들(요한 6:42)은 바이스의 이런 추정에 이의를 제기한다. 근대라는 귀마개를 조정한다 해도 바이스가 말했듯 “우리 삶을 ... ‘마치 곧 죽을 사람처럼 살라’는 가르침 위에 세운다면 조금이나마 예수의 태도에 접근하게” 될 거라 단정할 수는 없다.26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로는 하늘에서 땅으로 임하는 것에 접근할 수 없으며 이를 예수를 반대하는 이들과 바이스의 동조자들은 모두 놓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할 때 했던 말로 요약된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가 19:44)
---p.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