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운동이 일어난 실제적 상황은 로마제국의 보편주의(universalism)였다. 그런데 이 보편주의에는 정반대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민족적 종교와 문화를 붕괴시켰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전 세계 인류의 관념이 생겨났다는 의미다. 로마제국은 형식적으로는 각 민족의 종교와 문화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황제를 중심으로 전 세계가 통합되는 보편적 군주 지배를 전제로 한 것이다. 로마제국의 보편적 군주 지배 체제는 정치적일 뿐 아니라 문화적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교회의 제도뿐만이 아니라 교리 사상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 「“제1장_ 초대 그리스도교 사상 형성 배경”」 중에서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살”이라는 표현으로 떡이 실제적으로(physically) 그리스도의 살이 되었다는 것을 주장하려고 했다고 하기보다는 실재론적 표현을 통하여 성찬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이며. 이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특히 그의 고난에의 참여), 교회의 일치 그리고 사탄의 세력을 파괴하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의 성찬 이해에서 일치와 조화를 위한 성찬, 평화를 위한 성찬의 개념을 읽는다. 이그나티우스의 성찬 이해에서 후대의 상징주의나 실재론은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 「“제2장_ 사도 교부들의 신학”」 중에서
2세기 헬라 변증가들은 헬라 문화권에서 그리스도교의 인간 이해를 변호해야 했다. 그러나 변증가들은 인간과 동물의 구별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인간 이해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되었다. 변증가들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하게 창조하였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다. 즉, 타락하도록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자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타락하여 죽음의 종이 되었다. 그런데 믿음과 회개를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자유의 결단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인간의 자유는 빗나갈 수 없는 인간 자질의 요소로 나타난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선한 자를 보상하고 악한 자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게 하는 신적 계시다.
--- 「“제3장_ 헬라 변증가들의 신학”」 중에서
냉소적으로 말하면 이단은 다수가 수용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정죄할 수 있는 소수자들의 의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며 이단 정의를 교회정치적 교권주의적 시각에서 판단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그 말은 정통 종교적 교훈과 일치하지 않는 교리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그 점에서 그리스도교 이단은 그리스도교 정통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단을 그리스도교 정통 신앙으로부터 이탈이라고 정의하기는 쉽지만, 정통 자체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교회 역사에서 정통이 곧 그리스도교 진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정통 중에는 지역적인 것도 있고, 일시적인 것도 있으며, 오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이 참 신앙인인지 이단자인지를 판단하는 표준이 되는 규범이 있어야 한다.
--- 「“제4장_ 초기 이단들의 도전과 교회의 응전”」 중에서
캄펜하우젠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터툴리안에게 “영지주의는 인간의 내재적 영적 본질에 호소하는 파괴적인 혼합주의이며, 인간 자신의 영적이며 관념론적인 본성을 과대평가하려는 인간의 성향이며, 피조물과 신의 뚜렷한 한계를 말살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고 육신으로 자신을 구체적으로 계시한 실재의 하나님에 대한 허무주의적 적개심이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적 입장에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정립한 알렉산드리아학파에 동조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터툴리안의 입장은 실재론(realism)이요 현실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터툴리안의 신학 형성의 기초다.
--- 「“제5장_ 고(古) 가톨릭 시대의 반(反)영지주의 교부들의 신학”」 중에서
유대교의 정신과 헬라 철학이 상호 작용을 통하여 연합의 관계를 형성한 대표적인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이고 필로의 사상으로 대표된다. 이와 비슷한 상황이 2세기 말경에 같은 도시에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 교리문답학교를 중심으로 판타이누스, 클레멘트 그리고 오리겐에 의해서 헬라적 학문(철학)과 복음의 진리가 놀라울 정도로 결합하였다. 영지주의자들과 변증가들은 여기서 탁월하였다. 그리스도교는 문학 형식에 있어서 학문적이 되었으며, 이 운동은 동방 신학사에 있어서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동방 신학의 정점은 오리겐에 의해서 이뤄졌지만, 그 예비적 기초를 놓은 것은 클레멘트의 가르침이다.
--- 「“제6장_ 초기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신학”」 중에서
스토아철학의 무관심론에 반대하여 키프리안은 그리스도교인들의 특징인 인내를 격찬한다. 키프리안에 의하면 인내는 하나님과 공유하는 것이며, 미덕이나 덕행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고, 그 영광과 존엄도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 성격이 온화하고 참을성이 있으며 온순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아버지를 닮은 사람이다. 그는 불경스러운 신전과 땅의 우상들, 하나님의 존엄과 영광을 경멸하며 인간에 의해서 제정된 신성모독적인 예배 의식까지도 참을성 있게 견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의 바로 그 시간에서까지 그리고 그의 전 지상에서 보여준 그의 삶은 그리스도인들의 인내의 예표다.
--- 「“제7장_ 3세기 서방 교회 신학”」 중에서
알렉산더파가 성자와 성부와의 관계에 대하여 가장 강력하게 요구한 술어가 호모우시우스(동일본질)다. 이 술어는 아리우스의 지지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도 동의했다. 이 단어는 성서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철학 용어로서 그리스도교 역사상 성서 밖에서 채용된 단어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호모(homo)는 ‘똑같다’라는 뜻이고, 우시아(ousia)는 ‘본질’ 또는 ‘본성’을 뜻한다. 그러나 ‘우시아’라는 단어는 ‘존재’(being), ‘본질’(essence), ‘실체’(reality) 등 매우 다의적이고 복잡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호모우시오스’는 ‘동일본질’, ‘동일실체’, 동일존재, 더 나아가서 동일양태(type)를 의미할 수 있어 어떤 점에서는 모호한 단어다.
--- 「“제8장_ 4세기 아리우스 논쟁과 니케아신조”」 중에서
아타나시우스도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인간 영혼의 존재를 분명히 부정하지 않는 점에서 아리우스와 아폴리나리우스와는 다르다고 해도, ‘로고스-육체’ 그리스도론 형식이 대표적인 정통 형식이라고 하는 점에서 비록 온건하지만 그들과 다르지 않다. 그는 단지 그의 구원론적 입장에서 그리스도에게 로고스와 육체가 현저하다고 말할 뿐 로고스와 그의 육체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는다.
--- 「“제9장_ 아타나시우스의 신학”」 중에서
4세기 교부 중에서 니싸의 그레고리보다 더 신앙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위해서 광범위하게 철학을 사용한 학자는 없을 것이다. 그는 철학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가도록 가르치기 때문에 그것을 신부(新婦)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이교 철학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교 철학이 결실이 없다고 비판한다. 분만의 고통이 언제나 생명 있는 후손을 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지식의 빛에 들어오기 전에 유산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레고리도 철학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과 독립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성서가 모든 교리의 규범이고 표준이라고 한다. 그래서 성서의 목적에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만을 승인한다.
--- 「“제10장_ 세 카파도키아 교부들의 신학”」 중에서
일반적으로 테오도레가 안디옥학파의 전통에 따라서 비록 그리스도 안에 ‘두 아들’ 또는 ‘두 주님’이라는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두 본성의 일치보다는 구별을 더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안디옥학파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르면 그렇다. 그러나 테오도레는 동정녀 마리아가 ‘사람의 어머니’(Anthropotokos)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그 인간을 낳았을 때 그 인간 속에 이미 하나님이 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제11장_ 안디옥학파의 신학”」 중에서
그리스도의 인간적이고 육체적인 본성은 동정녀로부터 취한 것이고 그것은 신성과의 연합을 통해서만이 신적인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육체와 실제적인 인간 육체는 다르다. 그리스도가 ‘하늘의 사람’인 것은 신의 영(divine pneuma), 곧 로고스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육체(sark)와 실체적으로 결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육신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개념이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이해하는 아폴리나리우스는 그리스도를 ‘성육신한 하나님’(theos ensarkos)이 아니라 하나님과 ‘합쳐진 인간’, 즉 단순히 하나님과 우연하게 외형적으로 결합된 인간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논박한다.
--- 「“제12장_ 5세기 그리스도론 논쟁”」 중에서
칼케돈신조의 그리스도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특히 신조에서 그리스도의 품격에 관한 구절들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신조에는 ‘한 분 동일하신’(one and the same)이라는 구절이 세 번, ‘동일한’(the same)이라는 표현이 여덟 번 나타난다. 이것은 신조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의 통일이 ‘본질적 통일’이 아니라 ‘품격의 통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 분 동일하신’이라는 구절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키릴의 제2서신과 레오의 톰에서도 발견된다. 이와 같은 관념이 433년 재연합의 신조와 플라비안의 신앙고백에는 ‘한 그리스도, 한 아들, 한 주님’의 형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 「“제13장_ 칼케돈공의회(451)과 그 신조”」 중에서
제롬의 ‘불가타’의 가장 큰 가치는 그 당시 전해지고 있었던 여러 다른 성서 번역판의 구약 부분이 주로 70인역(LXX)에서 번역한 것들이었으나, 그의 ‘불가타’는 히브리어 구약 원전에서 직접 번역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타’가 라틴어권 교회의 표준성서가 되기까지는 적지 않은 비판도 있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70인 또는 72인의 학자들이 제각기 자기 몫을 번역했으나 조화와 일치를 이루었다는 70인역에 대한 전설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70인역이 히브리 원본만큼 영감으로 된 문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 「“제14장_ 4~5세기 서방교회의 신학”」 중에서
운명에 단순히 남아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이 비난을 받을 뿐이다. “넘어진 자는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넘어졌고, 서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서 있다.” 이렇게 하나님은 선택된 자에게는 자비로 그의 정의를 나타내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그들의 운명에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데, 이에 대해서 답변은 “내가 그렇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I so will)라고 할 뿐이다.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 겸손히 허리를 굽혀야 한다. 아담과 후손 사이에 불가분의 연관을 주장하는 어거스틴은 아담의 타락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 연관을 부인하는 펠라기우스는 어거스틴의 가르침이 숙명론이라고 비난하였다.
--- 「제15장_ 어거스틴의 신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