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 약장수예요?”
순간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주변이 조용해졌다. 경멸로 여겨질 수도 있는 ‘약장수’라는 단어에 누구 하나 숨소리를 내지 않았다. 나도 숨을 고르며 이주삼을 바라보았다. (…) 이주삼이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언뜻 웃는 게 보였다.
“아저씨는 약을 파는 게 아니란다.”
친절과 관용이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마치 삼촌이 조카에게 말하는 듯했다.
“그럼 뭘 파는데요?”
소희 역시 이주삼에 대해 조금의 경계심도 없었다.
“아저씨는 돈 버는 기술을 판단다.”
--- pp.46~47
“그거, 보험사기 아닙니까?”
부족민 중 하나가 이의를 제기했다. 20대 후반의 남자 환자였다. 다들 이주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줘야 할 돈 안 주는 것도 사기요.”
(…)
“나는 조금 있다 검사를 받으러 갈 거요. 합의금이 어떻게 올라가는지 똑똑히들 보시오. 자기 몸값은 자기가 올리는 거외다.”
--- pp.49~50
차설록은 자기를 치고 바다로 추락한 상대를 꼭 ‘백작’이라고 불렀다. 언젠가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차설록이 이렇게 말했다. 백작은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고. 그것이 구전되어 업계의 전설이 되었다.
“백작이요?”
(…)
“호연이, 내 말 잘 들어봐. 차설록도 처음엔 백작이 죽은 줄 알았대는 거여. 근디 1년 후 누군가 백작의 사망보험금을 찾아갔다 이 말여. 자그마치 20억이란 거금을 말여.”
--- pp.90~91
애초 내 인생에 선택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선택’은 늘 불행을 가져왔고 나는 언제나 선택 ‘되어지는’ 쪽에 서 있었다. 그것이 편했고 또 잘못될 경우 책임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 p.100
내 몸값이 1억이나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걸 실행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다고 여기는 나의 용기가 놀라웠다. 물론 알코올의 힘이었다. 아버지가 산재로 돌아가셨을 때도, 홍 부장에게 사표를 강요받았을 때도 솟아나지 않았던 용기다. 용기도 관성이 있는 것이어서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자 탄력이 붙었다. 죽자. 죽어서 1억을 만들어주자. 돈을 좋아하는 기자를 위해.
--- p.111
“학교에 입학합시다!”
“학교?”
“지난번에도 언뜻 말씀드렸잖수. 일테면 보험금 제대로 찾기 양성소 같은 데유. 아, 형님도 알티 출신이니까 훈련소 같은 데 잘 아실 거 아뉴?”
“…….”
“학교가 뭐 국어, 산수만 가르치란 법 있습니까? 어려운 사람들 돈 버는 기술 가르치는 곳도 학교지, 안 그렇수?”
--- p.119
“먹어야 사기도 치고, 먹어야 싸움도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노재수 씨?”
--- p.145
“도저히 못 하겠어요. 원장님이 아르바이트로 생각하라고 그러셨는데, 무서워요. 매일 밤 자동차를 보고 도망치는 악몽을 꿔요. 죄책감도 들고요. 이거 남을 속이는 거잖아요.”
내가 그 청년을 이곳에 끌어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뜨끔했다.
“어차피 속고 속이는 세상이야, 안 그래?”
--- p.188
“노재수 씨는 살면서 몇 번이나 승부를 걸어보았나요?”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
“이제부터라도 저항하시기 바랍니다. 내 앞을 가로막는 죄책감, 두려움, 사회제도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래야 재수 씨는 거듭날 수 있고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 p.222
“더 큰 프로젝트를 하고 싶다? 목숨을 담보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목적입니까? 듣기로는 사모님하고 이혼도 하셨다면서요?”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마중근 원장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10억이면 징역형입니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말고 저항하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 p.291
“할 수 있겠수? 이건 지난번하고는 차원이 다른 얘기유.”
이주삼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어제의 내가 아니야.”
이주삼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최홍선 대리를 바라보았다. 최홍선 대리도 어깨를 으쓱하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원장님이 웬일인지 모르겠수. 10억 단위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고, 진짜로 불구가 될 수도 있어서 웬만하면 승인을 안 하시는데 말유.”
최홍선 대리가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오빠, 괜찮겠어?”
“죽기 아니면 살기죠.”
--- pp.294~295
“이번 프로젝트 이름은 뭐야?”
“‘앵무새 속이기’요.”
이주삼이 짧게 대답했다.
--- p.310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저기…….”
“응, 그러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내 말을 듣기만 해.”
차설록이 손바닥으로 내 볼을 툭툭 쳤다.
“이제부터 내 계획을 말해줄게. 난 이미 고구마 줄거리를 잡았고 이제 당기기만 하면 돼. 그러면 고구마들이 주렁주렁 딸려 나오겠지? 그 맨 끝에 백작이 딸려 나올 테고, 네 쇼도 막을 내리는 거야. 물론 넌 은팔찌를 찰 거고.”
--- p.3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