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는 단순한 생존이나 성공이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부름 받은 자로, 보냄 받은 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자로 이 세상을 생각하면서 사는 목적은 이 정체성에 따라 반응하고, 책임지는(responsible)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시고 희생하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삶이 형성되어야 합니다. 성육신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하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어야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의 생각을 품고,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 「들어가면서」 중에서
그런데 생각하고 반성하고 따져 보고 물어보는 태도가 믿음과 반대되거나 믿음에 해롭다고 생각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믿음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행위가 생각 없이, 물음 없이 정말 가능할까요? 반례를 곧장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서 복음이 처음 전파될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보인 반응은 다름 아니라 바로 ‘질문’이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행 2:37).
--- p.19~20
회개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잘못을 인정하고 잘못된 생활을 떠나 새사람이 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크게 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 자체를 보면 ‘회개한다’는 말은 ‘생각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생각이고, 사고방식이고, 그에 따른 삶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 나타난 행동이 바뀌는 것만으로 사람이 완전히 바뀌지 않습니다. 생각, 가치관, 신념이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지 않고 바깥 행위만 바뀌기 때문에 실제 삶에는 복음의 능력, 복음의 열매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복음의 능력이 드러나려면 교회에 들어올 때 머리는 문밖에 떼어 놓고 가슴만 가지고 들어올 것이 아니라 가슴과 함께 머리도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 p.28
악마는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한 자신의 편으로 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책을 가까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편지에서 스크루테이프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언젠가 그가 맡았던 ‘환자’는 무신론자였는데, 대영박물관에서 책 읽기를 즐겼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책을 읽는 동안 환자의 생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못 하도록 마음속에 ‘점심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집어넣어 더 이상 반대편으로 가지 못하도록 시도했고, 덕분에 그 사람은 이제 지옥에 안전하게 와 있다고 말합니다. “책을 읽지 않도록 해라”,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해라”, 이것이 스크루테이프가 악마 웜우드에게 끊임없이 충고하는 말입니다. 생각하지 않으면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갑니다.
--- p.50
문화적, 지역적 차이뿐만 아니라 신앙의 차이도 생각의 방식, 생각의 방향과 관련해서 중요합니다. 유신론적 신앙인가? 무신론적 신앙인가? 유신론적 신앙 가운데서도 유대교적 신앙인가? 이슬람적 신앙인가? 아니면 기독교적 신앙인가? 어떤 신앙인가에 따라 세계와 삶과 자신을 보는 데서,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생깁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도 로마가톨릭 신앙인가, 개신교 신앙인가? 개신교 가운데서도 루터 전통의 복음주의 교회의 신앙인가, 칼빈을 따르는 개혁 교회 신앙인가에 따라 사고의 방식에서 차이가 드러납니다.
--- p.78~79
‘창의적 사고’ 못지않게 ‘공동체를 세우는 사고’도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소중합니다. ‘공동체적 사고’란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공동의 선’, ‘공공선’(common good)을 세우는 방향을 향해 살아가는 사고의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크게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된다든지, 남에게 빌린 돈은 갚아야 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이 싫어할 일은 해서는 안 된다든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도와준다든지, 나 자신의 이익보다 이웃과 공동체, 이 가운데서도 약자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든지, 이런 것들을 알고 행동할 수 있는 사고를 우리는 ‘공동체적 사고’ 또는 ‘공공선을 위한 사고’라 부를 수 있습니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공동체적 사고는 타인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고자 할 때 반드시 필요한 능력입니다.
--- p.104~105
우리가 홀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서로 돌보고, 서로 관심 갖고, 서로 세워 가도록 애써야 합니다. 비록 현재 만족할 수 없는 삶의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를 부르신 그 소망에 기대하고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읽고 생각하고 모색하고 숙고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자세를 한순간도 흩뜨려 놓을 수가 없습니다. 토론을 위한 토론, 논쟁을 위한 논쟁이 아니라 영적으로 서로 세우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 토론하고 논쟁해야 합니다.
--- p.158
신앙은 우리의 전인격적 행위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성의 활동만도, 감정의 활동만도, 또는 의지의 활동만도 아닌, 온 인격이 투여된 전인적인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식만을 내세우는 지성주의만, 또는 가슴의 체험과 느낌과 감정만을 강조하는 신비주의만, 의지의 결단을 내세우는 실천주의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지성과 신비와 실천, 이 셋 다 신앙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어느 하나 없이, 어느 하나를 배제하고서 온전한 신앙을 말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탁하고자 그분만을 궁극적으로 신뢰하려고 하는 의지, 좋아하는 감정, 그분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고 무엇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생각하고 아는 지식을 모두 한결같이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 p.194
바울은 한마음을 품어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기 일을 돌아보되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생각을 말합니다. 바울은 같은 생각을 품으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5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에서 ‘마음’도 생각을 두고 한 말입니다. 예수의 생각, 예수의 사고, 예수의 삶의 근본 태도가 우리에게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근본 태도, 사고방식은 겸손인데, 예수님의 겸손은 다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시고 심지어는 죽기까지 자신을 희생하여 내어 주신 것으로 실천되었습니다.
--- p.199~2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