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한일 국교 협상과 반대 투쟁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당선자는 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다음은 취임 연설의 일부이다. (전략) 인간사회에는 피땀 어린 노력의 지불 없는 진보와 번영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격동하는 시대, 전환의 시점에 서서, 치욕과 후진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오늘의 세대에 생존하는 우리들의 생명을 건 희생적 노력을 다하지 않는 한, 내 조국 내 민족의 역사를 뒤덮은 퇴영의 먹구름은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적 자주와 경제적 자립, 사회적 융화 안정을 목표 대혁신 운동을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
국민은 한 개인으로부터 자주적 주체의식을 함양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자립·자조의 정신을 확고히 하고, 이 땅에 민주와 번영, 복지 사회를 건설하기에 민족적 주체성과 국민의 자발적 적극 참여의 의식, 그리고 강인한 노력의 정신적 자세를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불의와의 타협을 배격하며, 부정부패의 소인(素因)을 국민 스스로가 절대 청산해야 하겠습니다. 탁월한 지도자의 정치적 역량이나, 그의 유능한 정부라 할지라도 국민대중의 전진적 의욕과 건설적 협조 없이는 국가 사회의 안정도 진보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중략)
민주정치는 몇 사람의 지도자나, 특수 계층의 교양에 의해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각과 책임, 그리고 상호의 타협과 관용을 통한 사회적 안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국민은 질서 속에서 살며, 정부로부터 시혜를 기대하기에 앞서, 스스로의 의무를 다하며, 때늦은 후회 이전에 현명하고 용감하게 권리의 자위를 도모하기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또한 대국적 안목과 이성적 통찰로써 ‘초가삼간의 소실’을 초래하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질서와 번영 있는 사회에 영광된 새 공화국 건설의 기치를 높이 들고, 다시는 퇴영과 빈곤이 없는 내일의 조국을 기약하면서, 나는 오늘 사랑하는 동포 앞에 다시 한번 ‘민족의 단합’을 호소하는 바입니다. (중략)
나는 이 자리에서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제 문제를 일일이 논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경제 문제를 비롯한 난국 타개의 숙제는, 이미 공약을 통해 자청한 바 있으며, 신정부는 이를 위하여 능률적 태세로써 문제 해결에 임할 것입니다. 시급한 민생 문제의 해결, 그리고 민족자립의 지표가 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합리적 추진은 중대한 국가적 과제로서 여야협조와 정부 국민간의 일치단결된 노력으로써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운 목표를 향하여 인내와 자중으로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아가는 근로정신의 소박한 생활인으로 돌아가, 항상 성급한 기대의 후면에는 허무한 낙망이 상접함을 명심하고, 착실한 성장을 꾀하는 경제국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여기에 우람한 새 공화국의 아침은 밝았습니다. 침체와 우울, 혼돈과 방황에서 우리 모든 국민은 결연히 벗어나 ‘생각하는 국민’, ‘일하는 국민’, ‘협조하는 국민’으로 재기합시다. 새로운 정신, 새로운 자세로써 희망에 찬 우리의 새 역사를 창조해 나갑시다. 끝으로 하느님의 가호 속에 탄생되는 새 공화국의 전도에 영광 있기를 빌며, 이 식전에 참석하신 우방 친우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함과 아울러 동포 여러분의 건투와 행운 있기를 축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1963년 12월 22일 오전 5시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한국에서 온 광부 1진 123명이 도착했다. 이들은 북부 함보른 탄광과 뒤셀도르프 서쪽 아헨 지역에 있는 에슈바일러 탄광에 배정됐다. 파독광부들은 지하 갱도 곳곳에서 땀과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연금 저축 생활비를 제외한 월급을 고스란히 조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천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이다. ?이들의 수입은 한국 경제 성장의 종잣돈 역할을 했다. 이들이 국내로 송금한 돈은 연간 5,000만 달러로 처음에는 한국 국민총생산(GNP)의 2%에 달했다. 이들의 급여는 모두 독일 코메르츠방크(Commerzbank)를 통해 한국에 송금됐다. 이 코메르츠방크가 지급 보증을 서서 차관 도입이 이뤄진 것이다.
【1961년 12월 서독에서 상업차관을 얻는 데 성공했지만 은행의 지급보증 문제가 생겼다. 천병규 재무부장관은 홍콩과 런던에 가서 지급 보증을 해줄 해외 은행을 수소문했지만 국가 신인도가 제로였던 한국에 지급 보증을 해주겠다는 은행은 없었다. 기적적으로 성공한 차관 도입이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백영훈 교수에게 지급 보증할 은행을 찾으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백 교수는 유학 시절 사귄 독일 친구들을 만나러 다녔다. 당시 서독 노동부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던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슈미트가 찾아 왔다. 슈미트는 서독에는 광부와 간호조무사가 필요하다며 한국이 이들 인력을 파견하면 그 급여를 담보로 돈을 빌릴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백영훈은 즉시 신응균 주독 대사를 찾았다. 신응균 대사는 한국 정부에 긴급 전문을 넣었고 한국에서는 바로 모집공고가 났다.
?당시 서독 광부의 한 달 임금은 국내 임금의 7~8배에 달했다. 고임금을 받고 서독 같은 선진국에서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수많은 사람이 몰렸다. 한국의 실업률은 40%에 육박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로 필리핀(170달러), 태국(260달러)에도 크게 못 미쳤다. 한국은행 외환보유고 잔액이 2,000만 달러도 되지 못했다. 1차 광부 500명 모집에 2,894명이 몰렸다. 선발 자격을 2년 이상 경력을 가진 사람으로 내걸었는데도 도시에 사는 경험 없는 대학 졸업자들이 신청했다. 탄광을 구경도 못한 ‘가짜 광부’들이 서류를 가짜로 만들어 응모했다. 1963년 9월 13일자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신체검사에서 실격된 1,600명을 제외한 1,300여 명 중 절반이 광부 경력이 없는 고등실업자임이 밝혀졌다. 노동청 관계자에 의하면 이들 광부 모집에 응모한 가짜 광부들이 300원 내지 500원으로 가짜 광산취업증명서를 사서 제출했으며 이 증명서 중에서 유령 광산 20여 개소가 발견되었다. 노동청은 전국 광산지역에 감독관을 파견해 유령광산에 대한 조사를 할 계획이다. 실제로 1963년부터 1966년까지 독일에 입국한 광부의 30%가 대학 졸업자였다. 서독 루르 지방으로 파견된 광부들은 거의 대학 졸업자였다. 노동청은 1차 모집에 합격한 응시자들을 마치 고시합격자 발표하듯 각 신문에 명단을 실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의 경제 상황은 하루 세 끼를 쌀밥으로 먹으면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학교에 점심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학생이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보다 더 많았다. 정부 예산에서 미국의 무상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이전보다 줄어들었어도 50%는 되었다(1948년 건국 초기에는 한국 정부 예산에서 미국 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90%나 되었다). 미국의 원조가 없으면 군인, 교사, 공무원 등에게 봉급을 줄 수 없어 국가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61년 군사혁명이 성공하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즉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짜서 이듬해인 1962년 1월 5일 발표했다. 경제개발 계획은 1월 13일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연도별 경제성장 목표는 1962년 5.7%, 1963년 6.4%, 1964년 7.3%, 1965년 7.8%, 1966년 8.3%였다.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있어야 하는 데 무상원조마저 줄고 있었다. 외국자본 유치가 절실했다.
서독으로부터 얻은 차관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상 원조는 1963년 2억1,640만 달러에서 1964년 1억4,930만 달러로 대폭 줄어들었다. 1963년 대통령 선거로 민간 정부로 탄생한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 국교를 맺고 일제의 한반도 지배와 관련된 청구권 자금을 받아내어 그 돈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 미국도 이를 지원했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통합 전략을 동아시아 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1950년대부터 한일 국교 회복을 적극 권고했다. 이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도 마지못해 일본과 협상하기도 했다. 4·19로 탄생한 장면 정권도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적극 추진했다. 박 대통령은 주위 사람들에게 한일 국교 회복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