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서 아주 작은 흔적 하나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지려면 얼마나 세심한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뭔가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사라지기 직전 전화 한 통, 가벼운 접촉 사고, 취소된 항공편, 마지막 순간의 행선지 변경 등등. 아주 작은 실마리, 이를테면 송곳이 겨우 들어갈 만한 틈새 하나면 모든 비밀을 풀기에 충분하다.
수증기로 뿌옇게 흐려진 유리창 너머로 검은색 타운카가 눈에 들어온다. 여자는 뒷좌석에 함께 앉아 있던 누군가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차에서 내리더니 종종걸음을 치며 공항으로 들어선다. 바로 그 순간 나와 몸이 밀착되며 여자가 입은 분홍색 캐시미어 스웨터가 내 팔에 스친다. 여자는 마치 어디선가 주먹이 날아올 거라 예견한 사람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다. 나는 여자가 멀찌감치 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숨을 길게 내쉰다.
이제 시작이다. 나는 가방 어깨끈을 당겨 메고 여자가 줄을 서려고 걸어가는 보안 검색대를 향해 간다. 도망자들은 늘 앞쪽이 아니라 뒤쪽에 신경 쓰기 마련이다. 여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겠지만 이제 곧 사라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한 줄기 연기처럼 차츰 옅어지다가 끝내 사라질 것이다.
--- pp.8~9
“미리부터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지금은 미투 시대야. 미국 사람들 대다수가 네 말을 믿어주고 적극 지지해줄 거야. 《폭스》나 《CNN》에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할 거야. 그 기회를 이용해 수시로 구타를 당하면서 살아온 결혼 생활을 청산하려 한다고 털어놓는 거야. 여론이 들끓으면 아무리 막강한 로리라도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어.”
나는 김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나도 한때 공개 석상에서 로리의 폭력 행위를 알려 비등해진 여론을 등에 업고 이혼을 밀어 붙여볼까 생각해본 적이 있어. 하지만 과연 내가 쿡 가문 사람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지. 소송만으로도 최소한 몇 년은 걸릴 테고, 온갖 구설수가 난무하겠지. 아마 소송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미쳐버릴지도 몰라. 설령 승소한다고 해도 내 인생은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되겠지. 나는 그저 자유를 원할 뿐이야. 남편으로부터의 자유.”
로리와 친해질 수 있다면 내가 절벽에서 뛰어내려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지켜볼 사람들을 너무 많이 보아왔다. 쿡 가문에 들어와 사는 동안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법칙이 여전히 진리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 pp.18~19
마조리 쿡은 협상력이 탁월한 인물로 유명했다. 그녀가 협상에 나서면 완고하고 보수적인 상원의원들도 마음을 바꾸고 협조하기 일쑤였다. 힐러리 클린턴이나 제럴딘 페라로보다 훨씬 앞서 대통령 출마설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마조리 쿡은 로리가 대학 1학년 생일 때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의 죽음은 로리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 구멍은 불안한 심리와 딱히 대상이 불분명한 원망으로 채워졌다.
“기자회견과 관련된 내용을 나에게 전혀 안 알려줬잖아.” 나는 퇴근을 앞두고 책상 정리에 열중하는 브루스에게 말한다. 브루스는 펜은 서랍에, 노트북은 가방에 넣어 집으로 가져가며 일언반구 대꾸가 없다. 브루스가 퇴근하자 로리는 의자에 기대앉으며 다리를 꼰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좋았어.” 나는 왼발을 까딱거린다. 내 불안한 심리가 은연중 드러나는 행동이다. 그 모습을 본 로리의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간다. 나는 왼발 뒤꿈치에 힘을 주어 가까스로 다리가 까딱거리지 않도록 한다. “센터 스트리트 리터러시에 갔었어?” 로리가 묻는다. 타이가 그의 목에 느슨하게 걸쳐져 있다. 나는 한때 사랑했던 남자를 바라본다. 로리의 눈가 주름은 우리가 한때 행복한 웃음을 나눈 흔적이다. 하지만 로리의 눈은 자주 분노를 담은 눈이 되고 있다. 로리의 음험하고 폭력적인 모습은 내가 한때 그에게서 느꼈던 호감을 지워버렸다.
“8개월 후에 기금 마련 파티를 열기로 했어. 다니엘이 녹취록을 작성해 내일 당신에게 보여줄 거야. 난 올해 열리는 입찰식 경매의 진행을 맡기로 했어.”
--- pp.36~37
“갑자기 출장 계획이 변경됐습니다.” 브루스가 말한다.
“디트로이트 행사는 사장님이 직접 가신답니다. 그 대신 사모님은 푸에르토리코에 가서 허리케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애쓰는 인도주의 단체 대표를 접견해야 합니다.” 방금 세상을 지탱하는 중심축이 기우뚱해진 느낌이 든다.
“갑자기 출장을 떠날 장소가 바뀐 이유가 뭐죠?”
“저는 사장님의 지시 사항을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사장님은 다니엘과 함께 이미 디트로이트로 떠나셨습니다.” 콘스탄스가 가방 지퍼를 다시 채우고 나서 브루스를 지나쳐 복도로 사라진다. “사모님은 오전 11시에 존 F. 케네디 공항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을 이용해 푸에르토리코로 가시면 됩니다.” 나는 도무지 현재 벌어지는 상황을 납득하기 힘들어 낮게 속삭인다.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가라고요?” “비스타 항공사를 통해 이미 항공권을 예약해두었습니다. 카리브해에 악천후가 예상되어 곧 항공기 운항이 끊길 수도 있습니다. 현재 예약 가능한 마지막 항공편입니다.” 브루스가 시계를 보고 나서 말을 잇는다. “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서둘러 복장을 갖추고 나오십시오. 오전 9시까지 존 F. 케네디 공항에 가야 합니다.”
브루스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나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는다. 위태로운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사방팔방으로 날아다닌다. 내가 그토록 기다려온 계획이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내가 어렵사리 준비한 4만 달러, 니코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증, 페트라의 지원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디트로이트에서 로리가 소포를 열어 모든 걸 알게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 pp.52~53
두 사람은 가방에 든 내용물까지 모두 바꿔치기했다. 클레어는 가방에서 찾아낸 NYU 모자를 써서 머리카락을 숨겼다. 그런 다음 스웨터를 벗어 이바에게 건넸다. “남편은 아주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고 반드시 추적할 거예요. 오늘 있었던 일들은 일초 단위로 끊어 검증할 테고요. 아마 나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공항의 모든 감시 카메라를 보려고 할 거예요. 우린 단순히 항공권만 교환해서는 쉽게 발각될 수 있어요.”
이바는 외투를 벗어 클레어에게 건네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후드 달린 카키색 외투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옷이었다. 지퍼와 안주머니가 잔뜩 달려있어 지난 몇 년 동안 즐겨 입었다. 클레어는 외투를 받아 걸치며 말을 이었다.
“푸에르토리코의 산후안 공항에 착륙하는 즉시 내 신용카드로 현금을 뽑아 다른 곳으로 떠나는 항공권을 구입해요. 뭐든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내 남편이 추적하거나 말거나 신경 쓸 필요 없어요.” 클레어는 발치에 놓인 이바의 더플백에 노트북을 집어넣었다. 그다음 욕실용품이 든 가방에서 여행 칫솔을 꺼내 외투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바는 이렇게 시급한 때에 클레어가 칫솔부터 챙기는 게 의아했다. 클레어는 지갑에 든 현금 뭉치를 꺼낸 다음 지갑을 다시 핸드백에 넣고 나서 이바에게 말했다. “남편이 신용카드를 정지시킬 수도 있으니까 서둘러 돈을 인출해야 할 거예요. 카드 비밀번호는 3710이에요.”
비록 돈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바는 클레어가 내미는 지폐를 순순히 받았다. 그런 다음 클레어에게 자신의 핸드백을 건넸다. 이바는 굳이 자신의 핸드백 안을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장 필요한 현금은 파우치에 넣어두었고, 나머지 자금은 먼 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바는 연분홍 스웨터에 양팔을 집어넣었다.
90분 후면 우린 각자 다른 항공기에 올라 하늘을 날고 있겠지?
이바는 일단 푸에르토리코에 내리기만 하면 감쪽같이 사라질 방법을 일백 가지 이상 알고 있었다. 우선 변장을 한 다음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떠난다. 그런 다음 항공기와 요트를 빌린다. 돈이 넉넉하게 준비되어있는 만큼 필요한 건 뭐든지 구할 수 있다.
--- pp.71~73
케이트 레인이 말한다. “존 F. 케네디 공항 대변인은 저명한 상원의원인 마조리 쿡의 아들이자 〈쿡재단〉 전무이사인 로리 쿡의 아내 클레어 쿡이 자선행사에 참가하려고 푸에르토리코 산후안으로 향하는 477편 항공기에 탑승한 것으로 확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은 이제 공항 외부의 현장을 비춘다. 카메라가 커다란 판유리 창 뒤로 보이는 제한구역을 줌인한다.
“비스타 항공사 대표들이 탑승객 가족들과 만날 예정입니다. 한편 플로리다 해안에서는 수색팀과 피해복구팀이 밤늦게까지 작업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NTSB는 4개월 전에도 477편 항공기가 이륙에 실패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테러 가능성을 배제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이 껴안고 울며 서로 위로해주는 사람들을 비춘다. 나는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 어딘가에 혹시 로리가 있는지 보려고 눈에 불을 켠다.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마치 내가 보내는 신호를 받은 듯 로리가 겹겹이 쌓인 마이크들 앞에 선다.
“로리 쿡 씨가 유족 대표로 짧은 성명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나는 텔레비전 화면에 나온 로리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본다. 고가의 청바지에 카메라발을 잘 받는 파란색 버튼다운 셔츠를 입고 있다. 내가 익히 아는 옷들이다. 로리의 얼굴에는 슬픔이 깃들어 있고, 눈은 붉게 충혈돼 있고, 퀭한 눈빛은 고통과 절망을 가득 담고 있다. 로리가 정말 참기 힘든 슬픔에 젖어 있는지 아니면 연기인지 가늠해본다. 로리가 표면적으로 내비치는 슬픔의 이면에는 분노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로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냈을 테니까.
--- pp.101~103
이바의 어깨 너머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시킨 덱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지금 너의 처지가 얼마나 곤혹스러운지 잘 알아. 울화통이 치밀어 미칠 지경이겠지. 지난 일을 돌이켜봐야 마음만 아플 테니까 가급적 빨리 잊는 게 좋아. 이제부터 너는 새로운 삶에 적응해야 하니까 내가 빨리 새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제법 쌀쌀한 가을밤이었고, 이바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되물었다. “네가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거야?”
“넌 기술을 발휘해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아마도 우린 멋진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거야.”
이바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어. 내가 알아듣도록 설명해봐.”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이 있는데 너에게 약을 제조할 장비를 마련해주고,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원료를 공급해줄 거야. 그 사람과 함께 일하던 기술자가 조만간 그만두기로 했나봐. 당장 새로운 기술자가 필요한 실정인데 너 정도면 최고라고 할 수 있지.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어. 약을 만들면 절반은 그 사람에게 제공하고, 절반은 네가 직접 파는 거야. 적어도 일주일에 5천 달러 이상 벌 수 있어.” 덱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버클리 학생들은 각성제를 필요로 하지. 약을 먹고 공부하면 절대로 낙제를 받지 않거든.”
아직 이른 밤인데 벌써부터 술에 취한 학생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바를 향해 가고 있었다. 덱스가 학생들을 몸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들은 너랑 달라. 학비와 용돈을 제공해주는 부모나 후원자가 있으니까.” 덱스는 갈 곳 없는 이바에게 구명 밧줄을 던져주었고,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이바가 물었다.
--- pp.119~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