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 억압의 흔한 징후 중 하나는 수평적 폭력, 즉 불평등한 조건에 대한 분노와 비난의 화살을 억압자가 아닌 다른 억압받는 집단으로 돌리는 것이다. 수평적 폭력은 주변화된 이들이 함께 더 많은 것을 위해 싸우는 게 아니라 작은 부스러기를 두고 서로 싸우게 만드는 데 유용하다. 소수 특권층이 권력과 자원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으며 자원을 한정하는 데 열중하는 사회에서 수평적 폭력은 현상 유지를 위해 사람들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도구가 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에서 수평적 폭력은 역사적으로도 오늘날에도 다양한 투쟁 전선에서 포착된다. 예컨대, 저소득 노동자들은 가장 주변화된 집단의 노동권을 강화하고 근로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모든 노동자에게 이롭다는 사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취업의 기회가 줄어들고 경쟁률이 높아지는 데 대해 이주노동자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증오의 화살을 돌린다.
--- 「한국의 독자들에게」 중에서
억압이라는 해악은 단지 시스템에만 존재하지 않고, 우리 각자의 내면, 우리가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리고 직장, 학교, 가정, 동네 등 우리가 영향을 주고받는 공간 내에도 존재한다. 우리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라고 여기는 만큼, 우리가 해로운 시스템과 공모하는 측면 또한 인식해야 한다. 그런 정직한 직시가 선행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와 함께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타인의 고통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변화는 우리의 권력, 권력과의 공모, 우리 자신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해 ‘우리 자신’을 자각해야만 가능하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우리가 항상 좋은 일을 행하는 것은 아니므로, 좋은 사람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양한 행동을 하며 다양한 집단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에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결정을 하는, 그냥 ‘사람들’일 뿐이다. 우리는 일차원적으로 절대적으로 선하거나 절대적으로 악하거나 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 ‘좋은’은 정체성이 아니라 형용사이며, 일상의 행동과 그 여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좋은 사람인가?’라고 묻기보다 ‘내 행동이 좋은 영향을 가지는가?’라고 묻도록 하자.
--- 「1장 ‘좋은 사람들’의 사각지대」 중에서
아시아 혐오 문제는 성차별주의, 동성애 혐오, 그리고 다른 억압의 형태들도 포함하며, 퀴어 이슈는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장애차별주의 등도 포함한다. 성차별주의만 해결하는 것은 나를 인종주의에서 해방시켜줄 수 없으며, 인종주의만 해결하는 것 역시 나를 동성애 혐오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는다. 1982년에 오드리 로드는 ‘1960년대로부터 배울 점’이라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결코 쟁점이 하나뿐인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단일 쟁점에 대응하는 투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 「2장 자기만의 이유 찾기」 중에서
살면서 내가 갖지 못한 특권에 대해 배우는 동안 나는 정보 통제가 미묘한 방식으로 만연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더불어, 세상에 어떤 종류의 일자리와 기회가 존재하는지에 관한 정보부터 계약, 가격 책정, 봉급에 관해 협상하는 법, 세금을 절약하는 투자 방법, 법적 권리와 대안에 대해 이해하는 방법에 이르는 정보들에 대해 공유를 차단하는 것은 불평등의 현상 유지를 지속시키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종류의 중요 정보가 소수 특권층의 배타적 권한 내에 존재하고, 나머지 사람들의 손에는 그것이 잡히지 않고 흐릿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모두는 각성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에 대한 접근을 통제당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어떠한 공간, 자원, 지식, 네트워크에 대한 접근권은 특권이 어떤 이들에게는 허락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허락하지 않는 가장 강력한 도구 중 하나다.
--- 「3장 자신의 이야기에 눈뜨기」 중에서
유색인들은 뒷전으로 하고 백인 소비자를 소구대상으로 삼는 상품 디자인에도 백인우월주의는 존재한다. 흑인 학자인 조이 부올라뮈니와 팀닛 게브루가 2018년 발표한 획기적인 연구에 따르면, 안면 분석 알고리즘이 백인 남성의 얼굴에 대해 거의 완벽한 인식률을 자랑한 반면, 흑인 여성의 얼굴은 35% 가까이 오인했다. 온라인의 한 기사 보도가 유머러스하게 다루기는 했지만(2017년 〈뉴욕 포스트〉 헤드라인에 따르면, “중국 사용자들은 아이폰X의 얼굴 인식 기능이 그들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아시아인들의 얼굴 인식률이 떨어지는 아이폰X의 페이스아이디는 모든 아시아인이 다 똑같이 생겼다는 비인간적인 편견을 계속해서 악화시킨다.
--- 「4장 우리 안의 백인우월주의」 중에서
백인우월주의에 젖어 있는 조직문화는, ‘강한 직업윤리’로 잘못 통용되는 백인성의 기준(예컨대 완벽주의, 질보다 양 중시, 객관성과 수치화 가능한 데이터에 기반한 적법성 등)에 부합하는 사람들, 행동들, 특징들, 신념들을 강화하고 그것에 보상을 주는 과정과 정책들을 만든다. 동시에 그러한 조직문화는 현 상태에 도전하는 사람들, 행동들, 특징들, 신념들은 처벌하고 배제한다. 이러한 예로 편향된 채용 관행을 꼽을 수 있다. 즉, 백인 엘리트 교육기관의 졸업생들을 다른 교육기관(가령 역사적으로 흑인 학교로 여겨지는 대학, 전문대학, 직업학교, 해외 교육기관, 온라인 대학 등)의 졸업생들보다 선호하고, ‘유색민족’ 억양을 가진 이민자들보다 백인 유럽권 억양의 이민자들을,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을, 돌봄 책임이 있는 사람들보다 부양가족이 없는 사람들을 우대하는 것 등의 행태이다.
--- 「4장 우리 안의 백인우월주의」 중에서
언제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조건, 정체성, 권력의 역학관계 등의 맥락이다. 그럼에도 DEI 컨설턴트이자 퍼실리테이터로서 나는 대개의 조직과 개인이 체계적 부정의 문제를 이해하는 일에서 얼마나 심각하게 맥락을 놓치고 있는지 수없이 봐왔다. 우리가 퍼실리테이터로서 발전해나가기 위해 중요하게 여기는 핵심 기술 중 하나는 어떤 갈등이든 그 근원을 밝힐 줄 아는 능력으로, 이는 맥락에 대한 이해를 요한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 여성이나 LGBTQ+, 혹은 유색인 직원들을 위한 모임을 꾸리려는 노력에 대해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왜 백인 남성 모임은 만들면 안 되는 거지요?” 이때 이 사람이 구조적 불평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세계가 이미 백인 남성 모임과 다를 바 없으므로 그런 모임을 만드는 건 우리 사회에서 불필요한 일임을 모르고 있다고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다.
--- 「5장 언제나 맥락을 살펴라」 중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해결책을 마련한다고 주장하는 공간에서조차 가장 주변화된 이들을 배제하는 패턴이 나타나곤 한다. 청년 구성원을 포함하지 않는 청년을 위한 비영리단체, 노숙 경험이나 집을 가지지 못한 경험을 해본 구성원이 한 명도 없는 노숙인을 위한 비영리단체, 대부분 미국 기반의 백인들이 이끄는 저소득 빈곤국을 위한 비영리조직을 포함해, 나는 비영리조직의 이사회가 조직의 핵심 서비스의 실질적 수혜자를 포함하지 않는 경우를 종종 봐왔다. 트라우마를 끝없이 반복해서 설명해야 하고, 수많은 질문들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다른 주변화된 정체성 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받는 등 생존자에게 끔찍하기로 악명 높은 성폭력 신고 절차는 법체계가 폭력으로 피해를 입은 이들의 필요를 중심에 두지 않는 식으로 설계되었음을 상기시켜준다.
--- 「7장 가장 주변화된 이들을 중심으로」 중에서
그 누구도 억압적 시스템 안에서 투쟁하면서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는 없다. 벽을 해체하는 동안 덜 마른 페인트를 최대한 만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할 테지만,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어쩌면 해체 작업 자체를 별로 하지 않은 사람일 수 있다. 이 운동에서 해악을 야기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하더라도 우리는 실수를 할 것이다. 물론 스스로 배우고, 맥락을 고려하고, 가장 주변화된 이를 중심에 두면서 해악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며, 때로는 완벽하게 행동하지 못하더라도 살아가면서 차차 배울 수가 있으리라는 사실을 숙지하며, 최선의 판단을 토대로 행동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해악을 야기하지 않으려는 데 지나치게 몰두해 개입을 요하는 상황에서 과잉해석으로 인한 무기력의 순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완벽성은 백인우월주의 문화의 명령이며, 우리는 이 불가능하며 인종주의적인 잣대로 우리의 행동 혹은 무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우리가 ‘완벽한’ 방법을 찾고자 불안 속에서 꼼지락대는 동안 억압의 시스템은 우리를 비롯해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죽인다.
--- 「8장 지적받을 용기」 중에서
해로운 문화에 펀치를 가하면 자주 다음과 같은 카운터펀치를 맞는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말아요. 농담이잖아요.” “에이, 그냥 가볍게 생각해요.” 그리고 몇몇은 피식거리며 웃는다. 그 순간은 빠르게 지나갈 것이고, 사람들은 순간적인 불편함을 필사적으로 잊고자 하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갈 것이고, 용기 낸 사람만 소외된 채 남겨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더 주목해야 할 것은, 용기 낸 사람을 재빨리 소외시킴으로써 나머지 사람들에게 향후에라도 현 상태를 흔들려는 시도를 포기하게끔 만든다는 점이다.
--- 「10장 패턴 깨부수기」 중에서
우리는 모두 우리 삶 속의 관계들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 운동의 기반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서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의 사람들에게 너무나 많은, 내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받았다. 그 사람들이 있기에 내가 지금 여기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있다. 그들은 형태와 기원은 다르지만 각자의 상처 덕분에 회복력 있는 관계와 치유를 향한 길을 가게 되었다. 내가 느끼는 감사한 마음은 거대하고 압도적이며, 나는 그 마음으로 이 운동과 그 사람들에 대한 약속을 스스로 지키고자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들의 안부를 묻고 그들이 실제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피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들에게 너무나도 사랑한다고 말하자.
--- 「15장 공동체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