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동안 도저히 잊히지 않던 이미지가 있다. 붉은 토사와 건물 잔해가 도로로 쏟아져 내린 처참한 풍경. 23층부터 38층까지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린 아파트. 2021년과 2022년에 학동과 화정동에서 일어난 붕괴 사고의 이미지다. 학동에서 처음 참사가 일어났을 때 나는 『릿터』에 ‘광주 2순환도로’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막 연재하고 있었다. 2년이 지났고 나는 붕괴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 이미지는 쉽게 잊을 수 없었다. 도시라는 스크린 위에 언제든 다시 상영될 수 있는 필름처럼 뇌리에 박혀 버린 탓이다. 다른 이들도 아직 그 이미지를 잊지 않았다면, 광주가 표상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문화예술의 도시라는 구호는 이미 설득력을 잃었을 공산이 크다. 우리는 판촉 뒤에서 벌어지던 일을 뒤늦게 목도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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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종태에게 사진은 고정된 시공간이 아니다. 유동하는 이미지이자 역사의 이미지이고 파괴와 소멸 바로 직전에 놓인 동시대의 이미지다. 아우슈비츠가 현재한다는 감각, 곧 신체 반응(이는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해석이다.)이 일으키는 ‘행위’가 기존에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세계를 다르게 명명하도록 추동한다면, 사진 기록의 ‘고정성’은 역사를 통해서 변주될 수 있는 것이다.
--- p.37
강봉규가 살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간 개발의 논리는 중앙과 지방의 시간적 거리를 한참 줄여 놓았지만, 수도권과 지방의 삶의 거리는 그 둘 사이의 땅값 차이로 환산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 중앙과 지방 사이, 도시와 고향의 이미지의 거리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지금, 그 틈을 메우기란 쉽지 않다. 그 가운데 대낮의 광장에서 레드 콤플렉스의 유령이 출몰하고, 금이 간 벽과 풀, 냄새와 느린 생활은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
--- p.51
언제부턴가 구도심의 공기에는 먼지가 끼기 시작했다. 공기 속에 떠나지도 정착하지도 못하는 먼지가 미끄러지듯 날리고 있다. 해가 갈수록 빈 동네가 늘어 가고 친구들은 흩어지고 가족들도 헤어진다. 다시 오겠다는 기약 없이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헤어짐의 반복이 지역 소멸이라는 의제로 만들어진 지 오래다. 빈 공간을 채우고 사람들을 살게 하려고 여러 방책이 시행되고 있다. 끊임없이 도시를 브랜딩하고 이미지를 만든다. 이를 위한 주된 방법은 재개발, 재건축, 도시재생을 하면서 도시의 외관을 바꾸는 일이다. 공사가 반복되고, 아무 일 없을 것 같았던 도시에 커다란 균열이 갔다. 2021년과 2022년, 학동과 화정동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 p.76~77
우리가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다시 출발하자. 지금의 마주침을 1980년 5월처럼 만들고자 애써 조직할 필요는 없다. 도로 위에서 서로의 생존을 챙겼던 두 운전자처럼 서로가 어떤 생존의 조건에 있는지 알면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그 조건을 감각하면, 이 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눈에 띈다는 엄마의 희망이 존재한다. 그게 함께 호흡하는 숨이 된다. 생존이 전부가 아닌 삶은 서로의 숨으로부터 비롯한다. 도시의 커다란 도로와 빌딩들, 아파트 단지, 구도심을 걷는 중 서로 보이지 않게 될지라도 언제나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p.129
도시를 걷는 사람 없이 도시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도시를 살고 또 걷는 누구나가 도시의 주체다. 도시의 길이 지어진 데에는 어떤 목적이 있겠지만, 사람이 그 길을 걸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실현된다. 도시가 마치 머릿속 관념대로 만들어진 환상처럼 느껴질 때, 그 안에서 내가 무력한 존재라고 느껴질 때, 세르토를 떠올리며 어디든 나가 걸어 본다. 걷는 시간만큼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가 가리키는 대로 걸으면서 연이어 일어나는 기억을 되새길 수 있다.
--- p.141
수십 년 동안 수천, 수만의 노동자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공장의 역사는 목포나 나주에 비해 큰 도시가 아니었던 광주를 대도시로 만든 중요한 자산으로 꼽힌다. 일제 때에는 도시제사 공장 외에도 약림제사 공장, 종연제사 공장이 각각 광주의 유동과 학동에 있었다. 목포항까지 연결된 호남선이 1922년에 생긴 이후 대형 섬유공장들이 광주에 들어섰고, 이는 광주가 지금과 같은 대도시가 된 기반이었다. 그렇다면 광주는 섬유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만든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