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 책을 쓰는 것은 그들 모두의 범죄 행각을 기리기 위함이다.
--- p.10
이제는 죽은 몸인 저 살인자들은 그럼에도 나에게로 와주었다. 애도의 별들 하나씩 나의 감방으로 떨어져 그때마다 내 가슴 몹시 뛰고, 내 가슴은 두방망이질한다. 두방망이질이 도시의 항복을 알리고자 둥둥거리는 북장단이기나 한 듯 말이다.
--- p.11
그들은 텅 빈 극장이나 썰렁한 감옥들, 휴식중인 기계장치와 사막들처럼 내게 최면을 건다. 사막들은 폐쇄되어 무한과는 교류가 없으니 말이다.
--- p.12
웃는 표정들, 불만스러운 표정들, 몰인정한 표정들이 내 몸의 온갖 구멍을 통해 안으로 들어오고, 그들의 활력이 나를 뚫고 들어와 나를 일으켜세운다. 나는 이 구렁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 pp.13~14
내가 여기서 나가게 될지, 나간다면 그게 언제일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그렇담 미지의 연인들에게 도움을 받아 나는 이야기를 하나 쓸 것이다. 주인공은 벽에 붙은 저들과 여기 족쇄를 찬 나.
--- p.15
어쩌면 이 이야기가 순전히 지어낸 걸로만은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 안에서 피의 목소리를 포착할지도 모른다. 이는 밤에 이마로 문짝을 들이받아가며 세상 시작 이래 나를 못살게 굴어온 힘겨운 기억을 쏟아내버리곤 했기 때문이니, 그런 나를 용서하시라. 여하튼 이 책은 나의 내밀한 삶의 한 조각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 pp.15~16
디빈이 죽었기에, 시인은 그녀를 노래할 수 있고, 그 전설을, 무용담을, 디빈의 연대기를 읊을 수 있다. 디빈의 무용담은 모름지기 섬세한 지시 사항이 수반되는 춤과 연기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걸 발레로 형상화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정확한 개념들을 탑재한 묵직한 단어들을 활용할 수밖에 없는 대신, 진부하고 공허하며, 선명하지 못한 표현들은 과감히 덜어내도록 노력할 것이다.
--- pp.32~33
이 이야기를 만드는 입장에서 내가 유념할 점은 무엇인가? 나의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그 흐름을 거슬러오르면서, 사소한 결핍 때문에 내가 놓쳐버린 존재의 관능으로 내 감방을 가득 채우는 일. 지하의 천국, 그 함정의 복잡한 구획들에서 내가 방황하던 순간들을 마치 캄캄한 구덩이라도 되듯 이 몸 던져 되살아내는 일. 악취 머금은 다량의 공기를 천천히 움직여가기, 꽃다발 모양의 감정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실을 끊어버리기, 심야의 선술집, 촉촉이 젖은 몸에 기름 바른 머리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며 진홍빛 벨벳 휘장 너머 귀신같이 사라지던 그 집시가 혹시 어느 별빛 가득한 강물에 떠오를까 살펴보기. 이제 나는 그대에게 디빈에 관하여, 남성과 여성을 내 멋대로 뒤섞어가며 이야기하겠다.
--- p.33
맨틀피스 위, 색칠한 목재 프리깃 범선을 덮고 있는 페노바르비탈 약병 하나만으로도 이 방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로부터 충분히 차별화되고, 하늘과 땅 사이에 마치 새장처럼 경쾌하게 매달릴 수 있다.
--- p.43
나는 사랑이 불현듯 사람에게 엄습하는 방법을 창안하는 역할에 충실하고 싶다. 그것은 격정적인 사람의 가슴속으로 마치 예수님처럼 납시지만, 동시에 도둑놈처럼 은밀하게 잠입하기도 한다.
--- p.55
사랑은 최악의 덫을 이용한다. 가장 고급스럽지 못한, 가장 보기 드문 수단들을. 그리고 우연의 일치들을 적극 활용한다. (....) “너는 나의 밤으로 들여온 태양. 나의 밤은 너의 밤으로 들여놓은 태양!” (....)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각자 떨어지기 전, 두 젊은 복서의 난투극(경기가 아니라)과도 같은 것 (....) 그레코로만 레슬러들처럼 근육과 근육이 정확히 맞물리도록 부둥켜안고, 양탄자에 허물어지듯 널브러져, 뜨뜻미지근한 정액을 드높이 뿜어대니, 하늘을 가로지르는 그 은하수를 따라 나는 읽어내린다. 뱃사람의 별자리, 권투 선수의 별자리, 자전거 타는 사람의 별자리, 바이올린의 별자리, 아프리카 원주민 기병의 별자리, 그리고 단검의 별자리를. 디빈이 매번 수음 행위를 끝낸 직후 자신의 좆물을 내갈긴 다락방 벽에는 그렇게 새로운 하늘나라 지도가 그려진다.
--- pp.56~57
심지어 감옥 안에서도 그들은 마치 담배처럼, 문신용 잉크처럼, 달빛이나 햇빛처럼, 축음기 음악소리처럼 남몰래 잠입한 것 같다. 그들은 가장 작은 몸짓으로도, 가옥과 램프, 요람, 세례성사의 세계, 바로 인간 세상 전체가 주먹이 이따금 은빛 거미를 박아넣는 수정 거울 속에 감금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 pp.65~66
예수회 수도자들이 말했듯, 하느님이 영혼 안으로 진입하는 방법은 수없이 많으므로. 금가루, 백조, 황소, 비둘기, 누가 알겠는가? 공중변소를 어슬렁대는 남창이라면 어떤가? 혹시 신학이 미처 정리하지 못한 방법론을 들고 나오진 않을까?
--- p.91
나는 소리친다. “나를 붙잡아! 나를 단단히 붙잡으라고!” 나는 독방들의 밤, 저주받은 정신들의 밤을 가로지르고, 심연의 구렁과 교도관들의 입을 파고들어, 판사들의 가슴팍을 관통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감방이 뿜어대는 병든 공기가 만들어낸 거대한 악어로 하여금 나를 아주 서서히, 서서히 집어삼키게 할 악몽을 향해 돌진한다. 그건 판결에 대한 두려움.
(....) 내가 에고이즘적 자위행위를 종교적 의식의 경지로 격상시킨 것은 잘한 일이다! 내가 동작을 개시하기만 하면, 추잡하고 초자연적인 전환에 따라 진실이 변위한다. 내 안의 일체가 찬미자로 변한다. 내 욕망의 장식물들이 가진 외적 비전이 나를 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떼어놓는다.
--- pp.106~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