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생각은 새롭지도 않을뿐더러, 국제법 특유의 것이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우리의 지적 깨달음이 확장되는 과정을 겪은 후에 얻게 되는 것이다. 국제법의 성격 및 기능에 대한 의문을 허용하지 않는 매우 전통적인 환경에서 훈련받은 법률가라면 이 메시지를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항상 다른 것을 시도하고, 관계를 형성해야 하며, 우리가 하는 것과 그 방법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 설령 의문을 제기한 후에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지라도 말이다. 한편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이론들이 발전시켜 온 가장 불편한 핵심 원리 중 하나는 ‘나머지 다른 것’을 배제하는 경향이다. 하지만 ‘나머지 다른 것’에 관심을 가지고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학문 분야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고방식을 개선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 「1장 국제법을 바라보는 다양한 방식」 중에서
국제법의 주류 이론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국제법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과 이론적 이해 방식까지 고려한다면, 그 ‘주류’ 이론을 콕 집어내기는 더욱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심지어 오랜 시간 동안 국제법이라는 학문에 기여해 온 많은 관점 중 주류를 찾아내서, 이에 대한 지적 분석을 하는 건 쓸모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실증주의(positivism), 현실주의(realism), 형식주의(formalism), 도구주의(instrumentalism), 그리고 실용주의(pragmatism). 이 모든 관점들은 ‘낡은 것(old)’일 수도 있고 ‘새로운 것(new)’일 수도 있다. 다만 모두가 국제법 분야의 주류적인 흐름에 다양한 영향을 미쳐왔기에 그동안 깊이 있게 다루어져 왔다. 인식의 다양성은 세계 각지의 다양한 법문화와 역사적 발전 과정에 기인한 정도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국제법을 바라보고 연구하는 특정 방식을 찾아내는 것은 어떤 인식론적 야심이 없더라도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이는 너무 쉽게 그 관점들을 동일시하지만 않는다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일이다.
--- 「2장 전통적 관점」 중에서
입헌주의의 주요 매력 중 하나는 정치적 논쟁과 정책 선택이 가지는 우발성과 불확실성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겠다는 약속에 있다. 얀 클라버스(Jan Klabbers)가 말했듯이, 입헌주의는 ‘모든 위대한 이념에 내재된(항상 명시적이지는 않더라도), 정치 종말에 대한 약속을 활용한다.’ 법령과 다른 법률이 전문적인 로비, 정당 정치, 그리고 다른 우발적 요소들에 의해 쉽게 영향을 받는 반면, 헌법은 보통 일련의 기본 규칙에 내재된 가치와 원칙들에 대한 정치적 합의를 승인한다. 헌법의 안정적인 특성은 그 틀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다른 규범적 선택의 우발성보다 오래 지속되는 데 있다. 헌법은 이러한 고려 사항들을 상회하며, 법적 힘이나 가치 면에서 더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의 변동성(volatility)은 이를 방해할 수 없다.
--- 「3장 입헌주의와 글로벌 거버넌스」 중에서
소비에트의 국제법 이론은 서구 학자들에 의해 다양하게 설명되어 왔다. 이 이론을 두고 어떤 이들은 국제법에 대한 자연법적 접근으로 간주했고, 또 다른 이들은 정치적이라고 보거나 사회학적 법학의 변형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대체로 소비에트 이론은 거의 실증주의의 캐리커처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실증주의의 극단적 형태이며, 이 이론은 국가의 의지와 더불어 국가의 동의가 국제적 의무의 배타적 근거로서 가지는 의미를 강조한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 경향이다. 마르크스주의 접근법과 소비에트 이론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국제법의 형성 과정뿐만 아니라 국제법의 규범적 내용에도 영향을 미치는 ‘법 외적 요소’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임을 고려할 때, 국가 동의(state consent)와 관련된 이러한 자격 조건의 부정확성은 자명하다. 국제적 의무를 설명하는데 국가의 의지가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그 의지가 법 외의 고려 사항들에 의해 형성되고, 다른 법과 마찬가지로 국제법도 그를 둘러싼 주변의 사회적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은 소비에트식 접근법을 다룰 때 법 외적 요소나 과정을 고려하기를 꺼리는 주류 실증주의와 명확하게 구분된다.
--- 「4장 마르크스주의」 중에서
‘법은 정치다’는 아마도 비판법학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유명한 주장일 것이다. 이 구호는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하는데, ‘법은 정치다’라는 것이 단순히 법률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권력 정치의 역할을 인정하는 공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웬 피스(Owen Fiss)는 비판법학운동에 대한 그의 초기 비판에서 바로 이 실수를 범했다는 것을 인정했으며, 후에 이 구호의 ‘정치적’ 주장은 단순히 ‘관심과 선호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재고했다. 사실, ‘법은 정치다’는 소위 주장되는 법의 객관성과 중립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법적 주장은 외부와 단절된 진공상태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도덕적, 인식론적, 경험적 가정’의 복합적인 요인들로 특징지어지는 특정 환경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 맥락에서 분석되어야 한다. 게다가, 대부분의 경우 법적 주장은 ‘일부 특정할 수 있는 정치 집단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많은 사람이 정치가 법을 오염시키고 그 시행을 방해하기 위해 ‘외부’ 환경으로부터 침입한다고 믿으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특히,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치 및 다른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맥락으로부터 법을 구분하는 데 익숙한 전통적인 접근법은 정치가 바로 그 법의 구조 안에 있다는 주장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정치는 외부의 도구가 아니라 법의 내부에 있다.
--- 「7장 비판법학운동과 뉴스트림」 중에서
성폭력을 여성에 대한 신체적, 심리적 폭력 행위라기보다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명예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는 국제인도법 조항처럼, 일부 국제법 규칙만 편향된 것은 아니다. 이처럼 국제법 질서의 근본적인 구조는 젠더 균형의 부족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결함이 있다. 예를 들어, 국제법의 법원(法源)이 계층적 추상 모델(hierarchical abstract model)로 잉태되고 제시된다는 생각은 젠더 기반의 행동 모델을 토대로 기호화(coding)하는 페미니즘적 관행에 따라 남성으로 기호화된다. 같은 이유로, 잘 알려진 ‘경성’법과 ‘연성’법의 구분은 명백히 젠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경성법은 ‘남성’이고, 반대로 연성법은 ‘여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국제법이 연성법보다 경성법에 따른다는 우선순위는 그 시스템에서 젠더 중립성이 부족하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유사한 맥락에서, 페미니즘 학자들은 동의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인 국제 의무 모델이 본질적으로는 남성적인 행동 모델을 반영하는 특징을 갖는다고 보았다. ‘의무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전제는 사회적, 젠더적 구조에 따른 의무 부과로 흔히 고통받는 여성의 경험을 부정한다.
--- 「9장 페미니즘」 중에서
의심할 여지 없이, 이 새로운 세대의 제3세계 학자들은 뚜렷한 관점의 변화를 가져왔다. 20세기 후반 국제연합에 의해 역사적으로 종식된 형식적 식민지주의 체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더 넓은 의미로 이해되는 식민지주의의 현상은 더 이상 체제 외부의 사고, 불행한 일탈 또는 역사적 예외로 여겨지지 않는다. 국제법과 식민지주의는 후자가 국제법 체제에 의해 정당화되고 합법화되었다는 점에서 상호구성적(mutually constitutive)이라고 여겨진다. 제3세계의 ‘타자성(Otherness)’은 노골적으로 유럽 중심적이며 ‘타자’의 배제를 목적으로 설계된 국제법의 ‘자아(Self)’를 해석하는 데 있어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이는 국제법 체제에 대해 다소 자비롭고 때때로 비판적이었던 TWAIL 1세대 학자들의 인식과 비교하면 극단적으로 다른 관점이다. 보편성에 대한 국제법 체제의 주장은 서구 세계가 체계적으로 추구하고 냉소적으로 육성한 헤게모니 설계의 산물에 불과하다.
--- 「10장 제3세계직 접근법」 중에서
법다원주의는 스스로가 속해 있는 보편적인 틀에서 발생하며 무정부 상태와 반복되는 충돌이 야기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고자 한다. 이를 ‘상호 연결된 섬들의 세상’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세상에서는 반드시 파편화와 통일성을 연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특징은 ‘정당한 차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며, 특정한 수준으로 수렴하는 틀 안에서 다양성을 보존하는 원칙으로 설명된다.29 이러한 다원주의 개념은 파편화가 초래한 불안과 통일성 및 일관성의 이상을 포기할 가능성에 대항하는 강력한 해결책으로 작용한다. 다원주의와 다양성은 긍정적인 가치이며 그 안에서 국제법 체계는 번성할 수 있다. 파편화는 불안을 완화하고 현재 상황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바뀐다.
--- 「11장 법다원주의」 중에서
피스가 선택한 법경제학의 모토인 ‘법은 효율적이다’를 통해 국제법률가들 사이에서 법경제학이 비교적 성공을 거두고 있음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국제법 학계는 국제법이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에 기반한 열등감에 오랫동안 시달려 왔다. 집행 메커니즘의 부재와 국제법 규칙들을 도덕적 사회적 규범으로부터 분리하며 겪게 되는 어려움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이는 환영받지 못하는 단점인 동시에 종종 법과대학의 동료들에 의해, 더 일반적으로는 대중들에 의해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런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상대방에게 국제법도 효율적일 수 있으며, 경제학에서 활용하는 신뢰할 만한 과학적 방법론으로써 증명이 가능하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가정은 국제법률가들에게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고도로 기술적이고 전문적인 지식에 대한 경의는 가치로부터 자유로운 이론이나 방법론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논의의 반대쪽에는 자신의 학문 분야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는 경제학 같은 다른 지적 분야로부터 기준을 빌리는 것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하거나 저항하는 학자, 전문가도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비록 어떤 가정을 전제로 하지만, 국제법이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외부 세계에 보여주기에는 법경제학이 이론적으로 타당하고 방법론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국제거래법이라는 제한된 범위에서 논의를 시작해 보면, 법경제학은 1990년대 국제법에서 탄력을 얻었으며 매우 빠른 속도로 국제법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 중 하나로서 그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 「제13장 법경제학」 중에서
문학은 법률가 스스로 형식주의와 경직성의 족쇄에서 벗어나 너무나 빈번히 이성적이고 객관적이며 가치중립적인 전문가의 행위로 여겨지는 영역에 윤리적 가치를 주입하는 강력한 동력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를 전제로 와이스버그(Weisberg)는 ‘자신의 분야에서 한발 한발 나아갈 때마다 윤리적으로 올바름에 대한 감각을 유지하고, 사려 깊은 의사소통의 미와 기술을 발휘하여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가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학(poethics)’에 대한 그의 생각은 ‘법의 윤리적 요소를 다시 활성화’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이다. 문학은 법을 단순히 기술로 생각하는 태도에 대한 해결책으로서도, 법학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과 사회과학적 방법론의 적용 빈도가 증가하는 현상에 대한 대응책으로서도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마사 미노(Martha Minow)에 따르면 스토리텔링과 스토리는 ‘인간과 인간의 감정을 상기시킴으로써 합리화하고 일반화하는 분석 방식을 방해하며, 특이한 전개이면서도 짜임새 있는 생명력을 제공한다. 스토리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적용을 추구하는 지배적인 분석 방법에 대해서는 취약하지만 바로 그 약함이 추구할 만한 스토리의 장점이다.’
--- 「14장 법문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