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담배도 다 타버렸다. 한숨을 내쉬며 들어가려는데 저만치 대문이 열리고 웬 여자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미호인가 하고 생각했다가 금세 은하라는 것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갑자기 은하가 왜 여기?
어찌 됐든 지금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덩어리들을 시켜서 돌려보낼 생각으로 황급히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은하가 불렀다.
“오빠.”
지환은 걸음을 멈췄다. 방금 뭐라고 불렀지? 내가 잘못 들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현우 오빠.”
지환은 얼어붙었다.
“내가 몰라봐서 그동안 많이 서운했지?”
지환의 등에 뺨을 기대고 은하는 울먹였다.
“진작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뜨거운 눈물이 입고 있는 옷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환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누구에게서 들었지? 그토록 철저히 숨겼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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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가 눈물을 글썽여서 일영도 덩달아 마음이 아팠다. 진심이 아닐 거라는 건 확실히 알겠는데, 워낙 속 얘기를 잘 안 하시는 분이니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있나.
“진짜로 제가 싫어진 거라면, 계속 쫓아다녀봐야 민폐만 끼치는 거잖아요.”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영은 잠시 갈등하다 마음을 결정했다.
“큰형님이 뭐라고 하시면 일단 귀로 들으시고.”
일영은 은하의 귀를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고, 이어서 머리를 톡톡 쳤다.
“머리로는 거꾸로 해석하시면 됩니다.”
“네?”
“꺼지라고 하면 제발 곁에 있어달란 소리로, 싫다고 하면 좋아서 아주 미쳐버리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으시면 된다는 겁니다.”
은하의 얼굴에 서서히 홍조가 떠올랐다.
“고마워요.”
일영은 다시 은하에게 기대어 절뚝이며 걷기 시작했다.
“근데 누님, 정말 누님 믿고 기다리면 해결이 되는 겁니까?”
“글쎄, 누가 누님이냐고요,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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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 사람이 저한테 약을 먹여서 납치했어요. 발목에 족쇄를 채워서 자기 집에 감금했고요. 저를 죽이려고 목까지 졸랐다고요.”
“그래그래, 알아. 세상에 얼마나 무서웠겠니?”
잡은 손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어머니는 달래듯 말했다.
“하지만 절대로 감정대로만 움직일 게 아니야. 생각해보렴, 이 일이 기사화라도 되면 넌 무사하겠니? 며칠 동안이나 장 검사 집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네가 이미 몸을 버렸다고 생각할 거 아니니. 그러면 앞으로 어떤 남자가 널 좋다고 받아주겠어, 응?”
가족들이 짜고서 아버지가 아프다고 자신을 속였을 때, 이미 환멸은 느낄 만큼 느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닥이라고 생각한 밑에 또 바닥이 있을 줄이야.
“엄마!”
은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손을 뿌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 경찰 신고까지 다 했는데 저더러 대체 뭘 어쩌라는 거예요?”
하지만 어머니는 끈질겼다.
“은하 너만 입 다물어주면 조용히 무마할 수 있어. 세훈이가 다 맡아서 처리하기로 했다.”
오빠도 한패라는 뜻이다.
“아버지도 안절부절못하고 계셔. 선거가 몇 달 남지 않았는데 괜히 이런 일로 입방아에 오르게 되면 어쩌니?”
아버지도.
“은영이도 마침 혼담이 오가고 있는데, 이런 흉한 일이 벌어졌으니 말은 안 해도 지금쯤 얼마나 불안하겠니?”
언니도.
은하가 대답하지 않자 어머니는 초조한 모양이었다.
“너도 그렇고, 네 언니 오빠도 그렇고, 우리 가족 모두를 위해서야. 엄마가 무릎이라도 꿇고 빌게.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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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리지 마!”
은하는 어머니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엄마가 왜 이 사람을 때려? 대체 무슨 자격으로!”
겨우 지환에게서 떼어놓자, 분이 덜 풀렸는지 어머니는 이번엔 은하의 머리채를 잡았다.
“미친년이 아주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딸의 머리채를 단단히 휘어잡고 욕설을 내뱉는 그 모습에서 법조인의 아내이자 교수다운 품위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모님, 그만하십쇼!”
“은하 누님!”
결국은 덩어리들이 달려들어 붙잡고 겨우 떼어냈다.
“이거 놓지 못해?”
팔을 뿌리치자마자 어머니는 방금 자신을 은하에게서 떼어낸 민규에게 사정없이 따귀를 날렸다.
“더러운 것들이 감히 어디다 손을 대!”
어머니는 부들부들 떨며 폭언을 퍼부었다.
“너희 같은 새끼들은 죄다 감방에 집어 처넣어야 하는데!”
어머니뻘 되는 어른의 폭언에 덩어리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사회의 암 덩어리 같은 것들! 너희 같은 범죄자들은 이렇게 뻔뻔하게 햇빛 보고 살면 안 되는 거야! 알아들었어, 이 더러운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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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바람이 부는 7월의 여름밤. 덩어리들의 축하 공연도 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샴페인도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들고 즐기는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하고 완벽해서 은하는 은하는 몇 번이나 생각했다. 이게 혹시 한여름 밤의 덧없는 꿈은 아닐까. 정말 내가 백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가 되고,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이 생기고,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 게 맞을까. 잠시 눈을 감고 은하는 기도했다. 꿈이라면 부디 언제까지나 깨지 않기를.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눈앞의 풍경이 여전히 그대로여서 안도의 미소를 짓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내가 나가볼게.”
동생들은 모두 저희끼리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어서, 결국 지환이 달려가 문을 열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대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눈앞에 신분증을 내밀었다.
“경찰입니다. 서지환 씨 되십니까?”
순간적으로 지환은 생각했다. 얼마 전에 소방서에서 표창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경찰서에서 주려는 건가.
“그렇습니다만.”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지환은 남자의 등 뒤에 경찰 수십 명이 더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가 지환의 손목을 잡아 수갑을 채웠다.
“당신을 범죄단체 가입 활동 등의 혐의로 체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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