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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 끄다, 물에 타오르다

문예바다 서정시선집-019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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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48쪽 | 140g | 100*160*20mm
ISBN13 9791161152554
ISBN10 116115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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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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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수 없는 별에 닿기 위하여,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는, 돈키호테가 늘 내 안에서 끓고 있었다.
채워도 허기진, 채울 수 없는 사막 같은 ‘아가리’가 늘 입 벌리고 있었다.
인간이라는, 거기 더하여 여자라는 삶의 덫에 치여서 내 꿈의 별은 바라보지도 못한 채 고개 숙여 땅만 보면서 동동거리며 살아온 지난 삶의 날들이, 시선집을 엮으려고 펼쳐 본 젊은 날의 시집 속에서 아프게 걸어 나왔다.
---「서정抒情을 향하다」 중에서

봄 오면 보랏빛 눈물송이 뚝뚝 지고
가을 오면 둥근열매눈물로 뚝뚝 지는 나무

귀 밝은 사내 하나 물관부에 흐르는 그 마음 알아듣고
한 생을 바쳐 갈고닦은 나뭇결 윤나는
열두 줄 명주실 가락, 내 손끝에 실려 천년바람 불어 나온다
죽어서야 비로소 가지는 제 소리 애닯은,
흥에 겨운 제 가락

바람소리 산울음 물울음 소쩍새노래
둥기둥 둥둥 둥 둥
웃녘 저수지에 해 머금은 명왕성이 뜬다
눈물 머금은 큰 별 귀 밝은 그 사내

오동꽃 보라꽃 지는 밤
머리맡 바람벽에 세워둔 열두 가야금
열두 가닥 명주실에서 제각기
비어 있는 절터 한 채씩, 파르라니 걸어나오는
그 속눈물을 듣는다
---「명왕성이 뜬다」 전문

이불을 널어놓은 창문으로
날아든 왕벌 한 마리
활짝 열려 텅 빈 문으로 나갈 줄 모르고
온 집안을 붕붕 날아다닌다
닫힌 창문에 이리저리 머리 부딪고 다닌다

어디가 길인지, 나락인지
허방지방 흙탕길 헤매온 내 모습이다
지하철 2호선 순환선 타고 깊은 잠 들어
온종일 돌고 도는 노숙자, 캄캄 밤하늘 돌고 돌다가
충돌하여 떨어지는 별똥별, 우주의 노숙자 내 모습이다

그러다가 지칠 때쯤
누군가 손 내밀면 좋아라 덥석 잡고
어디든 따라가는 나, 지옥이라도,

기진맥진하여 창틀에 널브러진 그를
부채로 날려서 창문으로 내보낸다
나도,
그분이 내밀어주는 그 부채를 잡고 싶다

길 잃은 그 자리, 생명이 아프니
공기가 아프다
---「불이不二, 공기가 아프다」 전문

누가 나뭇잎 푸른 손 흔들어
날 오라 부르나
누가 풀잎가슴 풀어헤쳐 날 부르나

우리 속에 갇힌 짐승 나를
포효도 잊어버린 나를
누가 자꾸 손짓해 숲으로 가라 하나

저 빗줄기 속에 몸 섞어 풀뿌리 되라 하나
잔뿌리 실뿌리 얼크러져,
무너지는 땅 몸으로 감싸안으라 하나

던져 주는 먹이만 먹으면 배부른 나를
배부르면 젖은 땅 어디서나 잠드는 나를
잠들면 구겨져 꿈도 꿀 줄 모르는 나를
앙상한 손가락을 펴고
동강 난 뼈마디로 흔들어 깨우나

굵은 장대로 등허리 후려치면서
지금은 잠들 때가 아니라 하네
아직은 잠들어선 안 된다 하네
아, 누가 있어 온몸 후려치면서,
---「장대비 오는 날」 전문

소금물 속에 녹아

살과 뼈 다 내주고

까만 눈만 뜨고 기다리는 새우

새우 몸을 받아 안아

제 살과 뼈 함께 녹여

흔적 없이 사라지는 소금

둘이 무르녹아 태어나는 둥근 새누리

너와 나의 사랑누리
---「새우젓사랑」 전문

아버지
어젯밤 당신 꿈을 꾸었습니다
언제나처럼 한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지게를 많이 져서 구부정한 등을 기울이고
물끄러미, 할 말 있는 듯 없는 듯 제 얼굴을
건너다보시는 그 눈길 앞에서 저는 그만 목이 메었습니다

옹이 박힌 그 손에 곡괭이를 잡으시고
파고 또 파도 깊이 모를 허방 같은 삶의
밭이랑을 허비시며
우리 오 남매 넉넉히 품어 안아 키워주신 아버지

이제 홀로 고향집에 남아서
날갯짓 배워 다 날아가버린 빈 둥지 지키시며
'그래, 바쁘지?
내 다아 안다'
보고 싶어도 안으로만 삼키고 먼산바라기 되시는 당신은
세상살이 상처 입은 마음 기대어 울고 싶은
고향집 울타리
땡볕도 천둥도 막아주는 마을 앞 둥구나무

아버지
이제 저희가 그 둥구나무 될게요
시원한 그늘에 돗자리 펴고 장기 한 판 두시면서
너털웃음 크게 한번 웃어보세요
주름살 골골마다 그리움 배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은 우리 아버지
---「둥구나무 아버지」 전문

한 송이
잘 피어난 단풍나무로
불타오르다, 죽고 싶다

진홍빛 선지피 뚝뚝 흘리며
살점마다 살점마다 불타올라
이승의 옷가지 훌훌 벗어던지고
앙상한 뼈마디마저
희디희게 불타올라,

잘 닦여진 청하늘 아래
꿈꾸던 종잇장 갈피갈피
한 줌 재도 남기지 말고
머리칼 한 올도 남기지 말고

한 송이 잘 피어난 단풍나무로
오로지 까마득히
불타오르다, 죽고 싶다
---「가을 일기 1-재도 남기지 말고」 전문

넓은 가로수길 비워둔 채
좁디좁은 사잇길
등 굽은 빗줄기 하나 허위허위 가고 있다

어린 날 잡았던 손 놓고 헤어진 사람
하마 저만치 오는 가을빛 속에
날 그리다그리다 등이 굽어,

이제 곧 바람 싸늘해지고
마음빗장 굳게 닫은 도시의 겨울밤을
그대, 굽은 등허리 허기진 가슴으로 어이 견디리
가득한 사람의 섬에서
눈보라 한 알갱이 바람에 불려 어디로 가리
---「사람의 섬에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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