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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기 없음

: ○○의 불운의 연대기

점선면 시리즈-05이동
곽예인 | 위고 | 2024년 09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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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08쪽 | 282g | 120*205*15mm
ISBN13 9791193044193
ISBN10 1193044197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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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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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미움을 받았다. 한번쯤 헤집어볼 만한, 이겨볼 만한 여자애였다. 남자들은 모두 내가 본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여자친구가 되어주길 바라면서도 나를 ‘신 포도’로 여겼다. 저 포도는 너덜너덜한 걸레일 거야! 사귀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거절했단 이유로 열일곱 살의 나를 ‘일간베스트저장소’에 박제한 애도 있었다. 반면 여자들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며 다가오다가도 쉬이 돌아서곤 했다. 평범한 주제에 인기가 있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나보다 못난 네가 인기 있을 리 없’으니까. 내게 반한 건 그 애들의 짝남인데 뺨을 얻어맞는 건 매번 나였다.
--- p.21

네 콘셉트는 ( )야. 실장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머리도 자르지 말고 입술엔 틴트만 발라. 살은 더 빼야겠고. 3킬로그램만 더 빼. 안면 윤곽이나 양악도 생각해보자. 덧니는 귀여우니까 내버려두고. 교복 치마도 줄였으면 다시 늘려. 앞머리 자르지 말고. 웃을 때 헤헤 하고 수줍고 해맑게 웃어. 아니 그 느낌 아니고. ‘헤헤’. 포인트가 있어. 거울 보고 연습해 와. 눈에 힘 좀 풀고 다니고. 야하게. 나른한 느낌 알지. 연구해 와. 너 나이 많은 편인 거 알지? 이게 네 마지막 기회야. 됐어. 가봐.
--- p.30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여자 아이돌 몸매 사진과 그들에게 달린 악플을 보며 목표를 곱씹었다. 텅 빈 몸만이 나를 저 길로 이끌 수 있기에 매일 더 날카로워지는 턱선과 이목구비, 줄어드는 몸무게를 보며 고통을 달랬다. 몸무게 정체기가 찾아오면 입이 바싹 마를 때까지 침을 뱉었다. 1그램이라도 더 줄이고 싶었다.
--- p.33

이미지를 팔아 버는 돈은 너무나 달콤하다. 나는 본격적으로 이미지 노동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다짐한다. 다만 엄청난 셀럽은 되고 싶지 않았다. 딱 2천에서 1만 사이의, 이쪽 분야 사람들은 “아, 걔?” 하는, 한 달에 한두 개 협찬을 받고 석 달에 하나쯤 광고가 들어오는, 그 정도의 사람이 되고 싶었고 딱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한다.
--- p.40~41

나는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제공하는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게 분명했는데도, 나의 노력은 노동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었다. 나의 노동을 인정해달라! 너네도 회사 갔다 집에 돌아가면 편하게 있지 않느냐! 나의 단면만 보고 나를 다 안다고 말하지 마라! 여행 소녀도 자살하고 싶다! 건강 섹시녀도 내향적일 수 있다! 삭발녀의 삭발은 4년 된 남자친구와 함께 민 것이다! 풍성한 공주 드레스가 입고 싶은 날이 있다! 사실 90퍼센트 레즈비언에 엉망진창이다!
--- p.42

발리의 밤은 무법 지대였다. ‘열 시가 넘으면 시안 여자는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다’는 게스트하우스 스태프의 말은 인종차별이 아닌 충고였던 것이다. 편의점에 잠시 들렀다 돌아가는 길에 약에 취한 백인 남자들이 쫓아와 캣콜링을 하는 일쯤은 양반이었다. “How much”라며 말을 거는 남자들은 인종 불문이었다. 손목을 쥐여 잡힌 채로 질질 끌려다니다 신혼여행을 온 중국인 부부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다. 밤이 찾아오면 숙소 문을 걸어 잠그고 의자를 문고리 밑에 비스듬히 세워뒀다. 혼자 숙소에 갇혀 벌벌 떨며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 p.50

그녀는 북토크에 왔다. 패널 중 한 명인 활동가 여름은 말한다. “어떤 측면에선, 우리는 모두 숨 쉬듯 성매매 되고 있기도 하잖아요?” 그녀는 와하하 웃는다. 몇 년 전 타지에서 만났던 남자를 떠올린다. 남자를 찾아가 죽일 생각을 매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알았을 뿐이다. 세상엔 어떤 패턴이 있다는 걸. 더 큰 폭력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에 몸을 팔 수밖에 없는 패턴, 재화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패턴이 있다는 걸. 어떤 삶은 그런 패턴의 무수한 반복일 뿐이라는 걸. 그 안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 p.91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나는 여자 곁에서 비로소 살아 있다고 느꼈다. 어떤 남자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자와 있을 때만 숨을 쉬는 것 같았고, 다른 때는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여태껏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정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내내 시달렸던 외로움은 살아 있음을 갈망하기에 찾아오는 공허였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그 외로움은 모조리 사라졌다. 만나는 사람이 연인으로는 최악이라고 해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인정한 것만으로도 오롯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p.108

눈을 감으면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그날은 며칠 전 말했던 그날은 아니다. […] 그 일베충이 나를 좋아해서, 좋아한다고 소문이 다 나서, 내가 친해지고 싶었던 그 여자애가 나를 싫어하게 되고 왜냐면 그 일베충은 그 여자애가 찜한 애니까… 나는 진짜 죽고 싶고 여자애들은 진짜 예민하고 재수 없고 그래서 깜찍하다고 생각하면서 꾸역꾸역 학교를 다니고… 아닌가? 이때는 생각보다 괜찮았던 듯. 아니면 그날일 수도 있다. 존이 소리를 지르고 나를 밀치고 내가 울고 걔가 장난이었다고 달래고 그때인가? 아닌가? 언제임? 도대체? 전부임?
--- p.137~138

스물두 살의 나는 여자들의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다. 당시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여성의 모습은 다소 납작해 보였다. 꿈이 많은 당찬 소녀의 모습 아니면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 그것도 아니면 능숙하고 섹시한 요부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런 모습의 여자들도 존재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아는 여자들은 좀 더 다채로웠다. 틈만 나면 울어재끼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화도 많고 저밖에 모르고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꼴불견이고 시끄럽고 말 많고 실수도 많이 하면서 땍땍거리고…. 나는 그 여자들을 사랑했다.
--- p.149

나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진을 찍거나, 사진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본 세상은 쪼잔하고 치졸했다. 나는 세상이 가진 최악의 면을 몰래 찍어서 길이길이 기억하고 놀려 먹고 싶었다. 내가 찍은 사진 안에는 내가 겪은 모든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나는 미친 여자가 아니라고, 이건 ‘진짜’, ‘정말로’ 일어난 일이라고 꽥꽥대면서 말하지 않아도 사진에는 남아 있었다.
--- p.157

걔들은 잘 살고 싶어서 죽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생각처럼 되지 않는 삶이, 목적을 찾을 수 없는 매일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가 될 수 없어서, 기준에 맞춰 깎이고 변화해야만 했던 그들을 안다. 그럼에도 잘 살아보려 했던 그들을 안다.
--- 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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