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주인공 관세음보살에는 통상 ‘넓고 큰 자비’를 가진, 즉 ‘대비’라는 형용사가 동반됩니다. 문수, 보현, 지장보살 등, 그 어떤 보살이 자비롭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관세음보살이 더욱더 ‘자비’에 힘을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 p.22
이때 관세음보살은 긴급 상황 속에서 구제해 주시는 구제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미지의 관세음보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요? 이 글을 쓰는 저의 성불이고,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들의 성불입니다. 이 ‘긴급 구제’와 ‘성불’ 사이에서 관세음보살은 활동하고 계신 것입니다.
--- p.24~15
오히려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바로 그곳에 종교의 역할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기도 성취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없어.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안심입명일 것입니다. 저는 안심입명이야말로 종교의 정의라고 봅니다. 종교는 안심입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안심’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고, ‘입명’은 인생관을 정립하여 생사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 p.35
그러므로 그대들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할 때, (…) 그러한 마음이 곧 부처이다. 모든 부처님의 깨달음의 바다는 [부처님이 들어와 있는] 중생들의 마음속 생각으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 p.37~38
우리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이 함께 계시는 극락세계는 진짜 있는가?” 이렇게 묻는데,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은 오히려 우리에게 물어옵니다. “자네들이 살고 있는 사바세계는, 세상은 실재하는가?”
--- p.59
원래 중생들은 자기 그릇에 따라서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형상을 떠나서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런 수승한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 즉 범부들을 위한 대책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로 수많은 관세음보살, 수많은 변화관음의 존재를 제시한 것입니다.
--- p.86
우리가 관세음보살이라고 이름을 외기 전에 먼저 관세음보살의 목소리가, 손짓이 있었던 것 아닐까요? 우리를 부르는 소리이고, 우리를 재촉하는 손짓입니다. 우리를 향하여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러 달라고 요구한 것이지요. 이를 초청이라고 할 때,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칭명은 그 초청에 대한 응답이 아니겠습니까.
--- p.119
관세음보살의 서원은 물론, 그 능력이나 마음(자비심)에 있어서도 관세음보살과 같아지기를 발원하는 것이 「백화도량발원문」의 내용입니다. 그렇게 세 가지 측면에서 따져볼 때, 중생이 관세음보살과 같아진다는 것은 곧 관세음보살이 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관음입니다.
--- p.124
관세음보살이 소년 선재에게 제시한 가르침을 『화엄경』에서는 ‘대비법문광명지행’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큰 자비를 실천하여 중생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관세음보살의 주특기이자 전공입니다.
--- p.146
이웃을 돕고, 사회 속에서 좋은 일을 하는 것이 다 보살행이고 보현행입니다. 즉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관세음보살을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 p.147
극락에 가는 것은 거기서 계속 머물러 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중생 제도를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준비가 곧 성불입니다. 성불한 뒤 관세음보살처럼 수많은 몸으로 변화하여 온 누리, 모든 국토에 다니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토불교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대승불교의 진정한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환상회향’이라고 합니다.
--- p.175~176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일심칭명’하는 일 역시 그 주체는 바로 관세음보살입니다.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칭명염불은 관세음보살과 우리 중생들의 협주입니다.
--- p.214
그 여인의 이름으로 알려진 ‘희명’ 역시 ‘밝음을 희구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밝음이 담겨 있는 것이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이라고 『관음경』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상징되는 관세음보살을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의지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고난을 넘어가는 힘을 얻게 됩니다.
--- p.228
칭명 이전에 문명이 있고, 문명 이전에 바로 호명이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관세음보살의 한없는 자비를 느끼게 해 줍니다. 그렇게 자비를 느끼는 마음,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들어와 있음을 알아차리고 좋아하는 것, 그것이 곧 신심입니다.
--- p.253
부처님의 지혜를 안다, 이해한다는 말은 부처님의 지혜를 믿는다, 믿어서 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지 않음으로써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안락국에 가서도 화생이 아니라 태생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러한 태생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살 때는 선근을 많이 심었습니다. (…) 요컨대, 불지를 믿지 않고서 그저 선근을 쌓는 것만으로 복이 되고 악을 행하는 것은 죄가 된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 p.270
“무진의보살이여, 관세음보살은 이러한 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갖가지 모습으로 온 누리에서 활동하시면서 중생을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시느니라. (…) 이 관세음보살마하살은 두렵고 긴급한 어려움에 처한 중생에게 능히 두려움 없음을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바세계에서는 모두 ‘두려움 없음을 베푸시는 분(Abhayandada)’이라 부르는 것이다.”
---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