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눈부신 성공을 거둔 후, 파브르는 왜 나중에 경력을 쌓아가며 마주한 수많은 실망을 피할 수 있는 교수 자격시험 과정에 들어가지 않았던 걸까? 파브르의 이상적인 미래는 다른 길에 놓여 있고,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막연히 느꼈으리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파브르에게 전달된 모든 요청에도 파브르는 “자연사 부문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연구”만 생각했다. 파브르는 선발시험을 준비하느라 이미 시작한 연구와 코르시카에서 진행한 탐구와 “무의미하다고 느꼈을 이런 노동을 절충”하면서 소중한 시간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무서워했다. 파브르는 자연과학 박사학위를 위해 준비하던 첫 번째 독창적인 연구로 바빴다.
--- 「아비뇽에서」 중에서
동물만큼이나 사람을 잘 관찰하는 파브르는 조용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꽤 단순한” 황제는 파브르와 몇 마디를 나눴는데 눈은 반쯤 감겨 있었다. 파브르는 “짧은 바지를 입고 은색 버클이 달린 신발을 신고 의례를 갖춘 걸음걸이로 움직이는 카페오레 색 겉날개를 걸친 커다란 풍뎅이 같은 시종들”이 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파브르는 벌써 후회의 한숨을 쉬었다. 지루했다. 몹시 괴로웠으며,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져도 두 번 다시 그 경험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 「아비뇽에서」 중에서
파브르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스스로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파브르 같은 학자, 탐구자, 야외 관찰자에게 자유와 여가 생활은 필수적인 것 이상의 의미였으므로 그것들이 없다면 자신의 과업을 절대 완수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충분한 여가 생활을 누리지 못해서 삶을 헛되이 보내고 그토록 많은 정신이 홀연히 사라졌는지! 토양에 뿌리 내린 학자, 한시가 급한 치료에 녹아든 의사가 얼마나 많은지!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이들은 계획을 세우고 늘 사라지는 기적적인 내일로 원하는 바를 미루는 것만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 「은신처」 중에서
파브르는 스스로 자신의 발견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다. 신물이 날 정도로 대상을 관찰하고 또 관찰한 후에야 그 실체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바로 파브르가 자신의 연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논쟁에 거의 관여하지 않은 이유다. 파브르는 논쟁을 신경 쓰지 않았고, 비판과 논쟁을 피했으며, 자신을 둘러싼 공격에 절대 답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연구가 충분히 무르익고 발표될 준비가 됐다고 느낄 때까지 침묵을 지키고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 「진화 또는 “생물변이설”」 중에서
이것이 바로 파브르가 늘 자신은 곤충학자가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이유다. 그리고 실제로 곤충학자라는 단어는 종종 파브르를 잘못 설명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파브르는 자신을 박물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생물학자 말이다. 생물학은 사전적 정의상 살아 있는 생명체를 모든 관점에서 전체적으로 고려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생명체에서 고립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은 서로 연결돼 있고, 모든 관계 속에서 각 부분은 관찰자의 시선에 무수히 많은 측면으로 비치기에 철학자가 되지 않고는 진정한 박물학자가 될 수 없다.
--- 「자연의 해석」 중에서
파브르의 초상화나 그를 묘사한 글에서 파브르는 단순하고 정확하며 타고난 다정함으로 가득했다. 파브르는 자신이 관찰한 작은 생명체를 살아 움직이는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을 만큼 적절하게 말을 다뤘다. 작은 생명체들의 사랑과 싸움, 교활한 책략, 먹이를 쫓는 행동 등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감정을, 모든 곳에서 창조의 고통을 동반하는 그 어마어마한 드라마를 해석할 방법을 찾을 때 파브르의 표현법은 더 높은 수준에 닿아 색채를 띠고 상상력은 풍부해졌다. 특히 파브르는 과학이 시에 제공할 수 있는 심오하고 무궁무진한 자원이 무엇인지, 아직 탐험이 이루어지지 않은 심오한 지평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알이나 번데기가 깨지는 일은 그 자체로도 감동적이다. 어떤 생명체든 “빛으로 다가가는 것은 정말 엄청난 수고”이기 때문이다.
--- 「동물 삶의 서사시」 중에서
보잘것없는 메뚜기조차 자신의 행복을 표현하기 위해 옆구리를 문지르고 삐걱댈 때까지 날개를 정강이에 비볐고, “빛과 그늘의 움직임에 따라” 갑자기 시작하거나 끝내는 자신의 음악에 도취했다. 모든 곤충은 저마다의 리듬이 있다. 어떤 리듬은 강렬하고 어떤 리듬은 거의 알아차릴 수 없다. 그것은 태양이 어루만지는 덤불과 휴경지의 음악, 즐거운 삶의 물결 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음악이다. 곤충들은 즐겁게 지낸다. 시끌벅적한 축제를 일으키고 끝도 없이 짝짓기한다. 심지어 서로 친분을 쌓기도 전에 “동물의 유일한 즐거움이 사랑”이며 “사랑하는 것이 곧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맹렬하게 삶을 살아간다.
--- 「동물 삶의 서사시」 중에서
뒤푸르의 호기심은 방대한 수집품을 모으게 했지만, 파브르가 생각한 것처럼 수집은 “눈으로만 말하고 생각이나 상상력으로는 침묵하는 거대한 유골 안치소의 황량한 묵상일 뿐”이며, 곤충의 진정한 역사는 이들의 습성, 노동, 전투, 사랑, 사생활과 사회생활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땅 위에서, 땅 아래에서, 물속에서, 대기 중에서, 나무껍질 아래에서, 깊은 숲속에서, 사막의 모래 속에서, 심지어 동물의 몸속까지 모든 곳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
--- 「평행 우주」 중에서
인구 감소라는 고통스러운 문제로 신음하는 사람이라면 뿔소똥구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자. “이들은 풍요로운 시기에 습관적으로 새끼를 많이 낳고, 궁핍한 시기에는 먹고 살 정도의 재력을 지닌 도시의 장인 또는 더 많은 욕구를 충족하는 데 점점 더 큰 비용이 들어서 자원이 부족해지지 않도록 자손의 수를 제한하는 중산층을 흉내 내며 종종 새끼를 한 마리만 낳았다.”
--- 「세리냥에서 보내는 말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