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왜 그래?” 남자가 물었다.
“경찰, 경찰 부를 거야.” 휴대폰 배터리가 제발 남아있기를 바라며 가방을 뒤졌다. 하지만 있어야 할 휴대폰은 보이지 않고 낮에 공방에서 만든 작은 선인장 화분만 떡하니 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화분 밑에서 불빛이 깜박거렸다. 가방을 마구 헤집어 휴대폰을 꺼냈다. 순간 휴대폰 잠금화면이 로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해변을 배경으로 선 자신, 그리고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은 한 남자. 그 남자가 바로 눈앞에 서있었다.
--- pp.8~9
“그래. 알았어.” 로렌이 주방으로 들어갔다. 사다리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에 오래 산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사다리를 한쪽으로 확 잡아 뺄 때 나는 소리였다. 냉장고를 열었다. 귀리 우유, 캐슈너트 우유, 일반 우유, 우유가 세 가지 종류나 있었다. 남편은 차에 우유를 넣지 않을 수도 있다. 남편은 건축가다. 잠시 망설이다가 우유를 넣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남편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유 넣을까?” 로렌이 파란색 머그잔을 들고 다락방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라고?” 전혀 다른 남자가 다락방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 p.30
이제 집에 돌아가면 또 다른 남편을 만날 것이다. 모퉁이를 돌자 집이 보였다. 이번엔 집이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남편도 여느 남편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는 그저 보통의 남자일 것이다.
현관문을 열었다. 계단에 카펫이 다시 등장했다.
“자기야, 나 왔어.” 로렌이 소리쳤다.
“아름다운 아가씨, 어서 오시옵소서.” 몸에 딱 붙고 붉은색 수가 놓인 더블릿에 다이아몬드 무늬가 들어간 타이츠를 신은,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짙은 머리칼을 어마어마한 리본으로 묶은 남자가 로렌을 맞았다.
“어디 다녀오십니까? 그 이상야릇한 옷은 다 무엇입니까?”
이런 빌어먹을!
--- pp.99~100
로렌이 침대에 누워있으면 이마에 손을 올리고 손가락을 쫙 펼쳐 꾹 눌러주는 남편도 있었다. 그러면 어지러운 생각들이 진정되는 것도 같았다. 그 행동이 생각 나 새 남편에게 설명했지만, 이전 남편처럼 제대로 하지 못했다. 또 매일 아침 팔굽혀펴기를 40개씩 하는 남편도 있었는데, 그에게 “오늘 하루는 어땠어?”라고 물어보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적어도 팔굽혀펴기 40개는 했어”라고 대답했다. 또 어떤 남편은 한쪽 다리로 서서 양치를 했는데 끝까지 그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다. 또 어떤 남편은 발톱을 작은 유리병에 모았다가 병이 가득 차면 젤라틴을 만들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 말이 장난인지 아닌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 pp.226~227
새로운 남편이 내려오고 있었다. 슬펐다. 슬프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레몬 꿀차를 내려놓고 쳐다보지 않았다. 마침내 돌아보니 마이클은 사라지고 없었다. 달라진 집 안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자신이 좋아하던 냄새,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주던 냄새가 사라지고 없었다. 슬픔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올라 목구멍을 타고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새 남편이 내려와 돌아섰다. 남자, 그저 또 다른 남자. 로렌은 남편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새 남편과 며칠을 보내고 다락방으로 올려보냈다. 그다음도. 마이클이 아니라면 누가 평생의 반려자일까? 이제 평생을 함께할 남편을 찾아야 한다.
--- p.314
다음 남편은 로렌이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책만 보면 얼굴을 들이밀고 진지한 눈빛을 발사하며 말했다. “내가 당신의 책이야. 나만 읽으면 돼.” 장난이었지만 책을 못 읽게 하니 그저 장난으로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번 생에 로렌은 고가의 전자책 단말기를 가지고 있었다. 남편은 가끔 전자책 단말기를 잡고 있던 로렌의 손을 가져다가 자신에게 올려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방수 기능도 있고 터치 기능도 훌륭해.” 코털 남편보다는 별로였지만, 출처를 대라는 남편보다는 나쁘지 않았다.
다음 남편은 자신의 대변 상태를 매번 문자로 보냈다. “오늘 아침엔 너무 커서 미친, 죽는 줄 알았어.”
다음 남편은 빈 컵을 입으로 옮겼다. 컵을 입에 물고 흡입력을 이용해 치웠는데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였다.
--- pp.388~389
마당이 엉망이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 위로 들쭉날쭉한 꽃잎을 가진 노란색 꽃 한 무더기가 눈에 띄었다. 엉금엉금 기어가 꽃들을 살펴보다가 어느 한 꽃에서 멈췄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가장 크고 가장 밝은색 꽃을 골라 줄기 부분을 손톱으로 찍어 눌러 꺾었다.
그러곤 꽃잎 하나를 떼어냈다. 한 번 더.
또 하나를 떼어냈다. 여기서 그만.
언제까지 다락방만 믿을 순 없었다. 남편을 계속 바꿔가며 살 수도 없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며칠 뒤 깡그리 지워버리는 짓을 계속할 순 없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녀 앞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 pp.441~4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