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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입술에 입술을 맞대면

: 시전문계간지 신생 100호 기념 시선집

신생시선-64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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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24쪽 | 308g | 125*195*14mm
ISBN13 978899094416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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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사람 고루 잘 살게 하는 일에 온힘 바치겠노라
고루라 새 이름 붙였던 이극로 나신 두실 가는 길
땅길도 물길도 고루고루 흙먼지 속에 누워 있다
애기마름에 세모고랭이 흐린 물풀 위로 주시경 박승빈
고루 이름을 붙여 보아도 고루 밟을 자리가 없다
고루는 고루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오늘은 내가
고루댁 담장에 서서 탑도 없는 건너 탑골을 바라본다
기장의 김두봉은 집안이 벌고 김해 이윤재는 그 삶이 또한 그득했으나
고루 살아 나오는 길에 기쁜 일 크게 없어
고루고루 눈 내리는 겨울밤 고루는 지나나라 어디서
흰소머리산*이며 소머리강**을 생각했을까
배달겨레 배달말이 떳떳하고 마땅하다며 배달노래 지어 불렀던
고루를 만나러 가는 봄도 오월
고루 옛마을 땅콩잎은 파랗게
닿소리 또 홀소리 낙동강 물소리로 귀를 열고.
*백두산. **우수리강.
---「박태일- 두실 /1999년 가을(창간호)」중에서

나는 왜 칼을 길로 택했을까
몸살 앓으며 자꾸
허공의 길을 생각했던 나날들

나이라는 거
상처로 된 계단 아닌가 말하는 친구를 따라
무등산을 향하네

등 굽은 짐승 같은 산이 보이고
그 산의 자락마다 깃털처럼 피어난 꽃들
저 큰 산 어느 순간
하늘에 세 들 것 같네

산은 절로부터 시작되네
나는 반쯤 엎드린 자세로 산을 오르네
살아 있는 것이 왠지 눈물겨워

숨소리도 함부로 키우지 못하겠네
풀을 만나면 풀에게
나무를 만나면 나무에게 돌에게
고맙다 고맙다 절하며 길을 걷네

두리번거리며 느리게 걸음을 옮기네
큰 나무를 돌아서 가기도 하고
가파른 지름길을 걷기도 하네
가다 보니 직선의 길이 더 느리네

산을 오르며 지친 나는 기어가기도 하네
높은 곳의 억새들은 나보다 먼저 엎드려
바닥에서 울어본 자만이
더 높이 오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네

뒤돌아보니 지나온 길이
산에게는 상처라는 생각
상처를 길로 내 준 산은 말이 없네
낮아지고 낮아져 무등은 둥그네
---「이대흠- 무등산을 만나다 /1999년 겨울호」중에서

읽은 책의 밑줄로부터
장미빛 새벽 여섯 시로부터
보라빛 불안의 멍울로부터
새파란 겨울 냉이꽃으로부터
끙끙거리며 떨어진 눈물기름, 한 종지에
얼굴 마주 비추이며
나눠 웃고 싶은데, 나눠 울고 싶은데
이 눈물가까지 당신 데려오는 일
서산으로 해가 지듯 하지 않아

기름눈물 머리에 혼자 바르고
거꾸로 걸어 봅니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뒷모습 보며
거꾸로 걸어 봅니다
가까이 있던 당신, 실은 저토록 머나먼
옛날의 단 한번 나타남이었습니다
단 한번을 아슴프레 보여주신 당신
빠르게 멀어져 가십니다
빠르게 가실수록 고맙습니다
눈물기름에 충분히 녹아 계신 당신
---「한영옥- 눈물기름 /2000년 겨울호」중에서

윗집 앵두나무 아래에서 우리집 지나 꽤나무 밑까지 두들겨맞으며 그애의 엄마가 쫒겨 내려오는 날이면 불콰해진 얼굴로 그애의 아버지 어디론가 또 사라지고 한 달포 평화롭고 서럽게 앵두나무 잎새 간질이는 달이 뜨곤 하였네
꽤나무 밑에 주저앉아 울던 그애의 엄마가 피터진 입가를 혀로 쓱 훔치며 일어설 때면 확 지펴올린 아궁이 속 삭정이들처럼 꽤나무 밑둥치가 와글와글 뜨거워지곤 했네
그날은 우리집 안택날이어서 팥시루떡과 백설기 찌는 냄새에 가족이 봉당의 물그릇처럼 오목해진 날이었네
어스름녘 백설기 나눠 담은 접시를 동네에 돌리고 마지막으로 그애네 올라갔을 때 마당가 앵두나무를 타고 내린 달빛이 고요히 흙을 적시고 두꺼운 나무문 조금 열린 부엌에서 간간이 물소리 차오르고 있었네
아궁이 가마솥 수증기가 조금씩 피어오르고 등 돌려 앉은 젊은 엄마의 하얗게 벗은 등에 뜨거운 수건을 대어주는 그애의 작은 손이 보였네
그애네 집에 아무도 없어 백설기를 전할 수 없었노라고 엄마에게 말하고, 김 오르는 희디흰 네모난 것을 미어지게 먹은 나는 급체를 앓았네 바늘로 딴 하얀 손가락 끝에서 스며나온 자줏빛 핏방울이 무서웠네
시루 하나 가득 김구멍마다 숭숭 숨을 뱉던 백설기
희고 네모난 그 속내엔 아내의 머리채를 잡아채는 시끄러운 한낮이 있을 것 같고
고깃배가 돌아오는 달포마다 온동네가 고등어 등처럼 퍼릇퍼릇해지는 우울한 축제가 있을 것 같고
또 뭔가 시루 하나 가득 뜨겁게 쪄내리던 붉은 상처 자국이 있을 것도 같은,
가족에게 백설기 한 조각씩 돌아가면 시루는 이제 뜨거운 숨구멍 하나 둘 닫고 밤별들의 난망함 속으로 들어가네
우물 속 물바가지가 밤새 우물벽을 치닫는 소리
가지꽃 보라색 슬픈 낯빛이 희디흰 재처럼 식어가고 아린 잎사귀 뒤에 숨어 어린 꽤들이 서둘러 익어 갔네
---「김선우- 백설기 /2001년 봄호」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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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섬이다. 외로이, 오롯이 하나의 세계를 궁구하는 섬이다. 여기에 그 섬들의 언어가 모여 따듯한 풍경이 되었다. 선한 사람들이 윤슬처럼 반짝일 수 있도록 응원하는 풍경이다. 이 풍경의 기록은 추억하기, 기억하기를 위한 작업이며 독자와 함께 공명하려는 소망의 표현이다. 신생과 인연을 맺어온 시인들이 함께 만든 섬이란 언어의 숲, 이 한 권의 시림詩林이 전하는 삶의 온기가 독자들에게 온전히 가닿길 바란다.
- 이은주 (시인, 신생 편집위원)
25년간 축적된 방대한 자료를 더듬어나가는 일은 감동과 공감의 연속이었다. 지금 대중에게 널리 애송되고 있는 십 수 년 전의 시를 발견하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걸작을 뒤늦게야 만났을 때, 또는 몇몇 중견 시인의 초창기 시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을 때의 은밀한 기쁨이란! 한 문예지가 오랜 세월동안 횡적으로나 종적으로 걸어온 발자취를 훑어보는 일은 많은 의미를 갖는다. 이 시선집이 독자에게 그 시간들을 한 번에 여행할 수 있게 하는 뜻깊은 선물이길 기대해본다.
- 김미령 (시인, 신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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