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몇 살이 되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건, 그녀를 잊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조금 전 우연히 가닿은 작은 인터넷 기사에서 그 이름을 볼 때까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녀의 이름도 존재도 함께 보낸 시간도,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한 일도 말끔히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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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고사하고 고개조차 저을 수 없었다. 요즘 세상에 초등학생도 하지 않을 유치한 장난에 매번 상처받는 자신이 한심해서 속상했지만, 그보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이런 꼴을 들킨 것이 죽을 만큼 창피했다. 당장 어디로 꺼져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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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집으로 다시 들어오라면 어쩐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고 궁리하는 사이 가슴이 먹먹해져서, 앞으로 엄마 혼자 잘 해나갈 수 있을까, 성가신 일에 말려들진 않을까, 지금쯤 심히 내 걱정을 하진 않을까 갖가지 불안이 찾아와서, 말없이 집을 나온 걸 자책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부 부질없었다. 내가 집을 나간 것을 엄마는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알아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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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색, 병아리색, 바나나색, 레몬색. 노랑에도 여러 노랑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 모두의 공통점은 아무튼 다 노란색이란 것, 그리고 노란색은 노란색인 것 자체로 우리에게 용기와 안도감을 주는 특별한 색이라는 것이었다.
--- p.125
다마모리 모모코는 작은 결심이라도 하듯 두툼한 가라오케 선곡집을 부여잡고 진지한 얼굴로 페이지를 넘겨, 쪽지에 번호를 적어 란에게 건넸다. 잠시 후 가라오케 화면에 ‘X JAPAN 쿠레나이紅’라는 글자가 떠오르고, 발라드풍의 중후하고 서글픈 느낌의 전주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천천히 영어 가사가 표시되고 다마모리 모모코가 노래를 시작했다. 순간, 나와 란은 저절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우와, 하고 탄성이 튀어나올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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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비단 가족에 한해서가 아니라 기미코 씨는 자기 얘기를 통 하지 않았고, 나 또한 나에 대해 할 만한 얘기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평소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더라. 잠시 생각해봤지만 알 수 없었다. 그저 같이 밥 먹고, 일하고, 돌아와서 잠자고, 란과 모모코도 끼어서 실없는 수다를 떨며 웃을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다.
--- p.199
왜 그런 것도 못 하니, 몇 번 말해야 알아들을래, 남의 집 애들은 잘만 하던데,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환경에 엄마는 이렇게 열심이건만 얘들은 어째 이 모양이람. 걸핏하면 히스테리 일으켜서 사람을 아주 잡아. 기껏 배 아파서 낳아주고 시간도 돈도 아낌없이 들이부어 밥상 다 차려주면 뭘 해, 머리 나쁜 못난이들 엄마밖에 못 된 나만 불쌍하지, 그저 사랑하는 딸들 꽃길 걷게 하려고 갖은 정성 바쳤건만 왜 보답을 못 받을까, 이러면서 진짜로 운다? 웃기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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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코야키를 먹는 나는 먼 여름밤 속에 있었다. 어느 여름도, 그 여름도, 반짝이는 사과 사탕과 솜사탕, 물속에서 하늘하늘 헤엄치는 빨간 금붕어, 알록달록한 고무공, 흙냄새, 소스 냄새. 쉴 새 없이 올라가는 연기와 사람들의 환성이 뒤섞여 밤은 한없이 부풀어갔다.
--- p.237
그랬나, 돈 때문이구나. 나는 바닥에 남은 갈변한 우롱차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좀 웃긴 기분이 들었다. 같이 살자거나 돌아오라는 게 전혀 아니고, 병이 심각하다거나 중요한 얘기가 있는 것도 물론 아니고, 그건 그것대로 충분히 다행이지만, 그래도 그렇구나, 엄마는 돈 때문에 나를 만나러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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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간 것도, 정보량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말이 빨랐던 것도, 내 이해력이랄까 반사 신경이랄까 일머리 같은 걸 시험하는지도 몰랐다. 얘는 틀렸다는 인상을 줘서는 안 된다. 의욕을 어필하고, 싹수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나는 최대한 냉정을 가장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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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엄마? 엄마, 나 큰일 났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있잖아, 엄마, 엄마는 어떻게,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어? 내가 어렸을 때, 아직 한참 어린애였을 때, 돈도 없는데 어떻게, 무슨 수로 살았어? 다들 매일 어떻게 살아가는지 모르겠어, 모르겠어, 엄마.
--- p.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