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의 경계에서 숨을 몰아쉬던 아빠의 의지, 잠을 못 자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에서 후배에게 소리를 지르던 자신의 모습. 숨 쉬고 살기 위해 필요한 건 다정함만은 아니었다. 살아남는다는 건 징그러운 일인지도 몰랐고, 그 징그러운 모습을 미워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 p.26
“아빠. 이제 내가 계속 같이 있지 못해. 돈 벌러 가야 돼. 아빠가 있어야 내가 버텨. 무슨 말인지 알지.”
자경은 아빠의 텅 빈 눈동자에 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지금처럼 열심히 숨 쉬어. 들숨에 자경이, 날숨에 자경이.”
자경은 아빠의 손을 말아 주먹을 쥐게 한 뒤 자신의 주먹을 살짝 가져다 댔다. 수능 시험장 앞에서 했던 것처럼.
“파이팅.”
--- p.38
스스로 결정한 것들로 시간을 채우던 나날들이 남의 인생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자경은 삶이란 자유의지로 끌고 나아가는 거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삶이 자경을 끌고 갔다.
--- p.51
의사의 사망선고가 끝나자 빠르게 돌아가던 자경의 시계가 멈춘 듯, 세상이 지나치게 고요해졌다. 자경은 양손으로 아빠의 머리칼을 빗질해 넘기며 아직 따듯한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고 말했다.
“잘 가, 아빠.”
--- pp.52~53
“표정이 밝아지니까 아버지를 닮았어요.”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까, 아빠도 혼자여서 그랬던 것 같아.”
친구와 알료샤는 자경이 말하지 않은 가족관계를 눈치챈 듯 조금은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아빠도 의지할 사람 없이 너무 긴 세월을 보냈으니까. 누구한테 뭘 말할 생각을 못 한 거지.”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고, 그런 실없는 사람이 된 거지.”
--- p.66
아침이 되어 장례식장 복도가 소란스러워지고 나서야 까무룩 잠에 빠지며, 자경은 자신이 두려워한 건 죽는 것이 아니라 혼자 남겨지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67
중학교 때였나 고등학교 때였나, 아빠의 일기장을 훔쳐 읽다가 들킨 기억이 났다. 그때 아빠는 자경을 불러다 앉혀놓고 진지하게 타일렀다. 궁금한 마음은 자연스러운 거지만 다시는 그러면 안 된다고 말했다.
“어른도 수치심이 있어.”
자경의 기억 속에서 아빠는 한번도 노크하지 않고 자신의 방문을 연 적이 없었다.
--- p.96
나의 딸 자경이 졸업 후 변변한 직장도 없이 영화를 찍는다고 돌아다니다 내게 돈 좀 가진 게 있느냐 물었을 땐 예술을 빌미 삼은 인면수심이 될까 싶어 걱정하였으나 그것은 나의 철저한 오산이었다. 자경은 예술수양을 통해 정신적으로 아비를 뛰어넘어 인생의 진리가 담긴 영화를 만들어낸 감독님이 된 것이다.
아아, 인간을 기어이 살아가게 하는 삶의 소중한 빛은 언제나 멀고 희미한 곳에 있다! 이러한 통찰은 어떠한 교육으로도 가르칠 수 없는 인생의 선물이리라. 그렇다면 자경이는 어떤 태양 아래서 이렇듯 성숙하게 도약한 것인가. 자식이야말로 부모의 선생이라는 말을 가슴으로 헤아린즉, 이 한장의 CD에 담긴 자경의 고뇌를 가보로 물리리라 결심한다……
--- p.98~99
자경은 앞서 일어난 상황들에서 많은 것을 포기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망한 영화라도 완성은 하겠다는 의지. 자경은 그것만 내려놓지 않으면 다음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소리 죽여 한걸음 한걸음. 자경의 발은 카메라를 든 표다르의 뒤꿈치에 달라붙은 듯 움직였다. “컷” 하고 작게 말한 자경이 뒤돌면 스태프들이 그런 자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 pp.119~120
표다르가 사라진 거리에서 고장 난 가로등은 그냥 고장 난 가로등일 뿐이었다. 쓰레기도 그냥 쓰레기였다. 어떠한 영혼도 얼굴도 없는, 수많은 골목 중 하나의 골목이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모든 것이 끝난 어느 겨울, 자경은 이제껏 다른 것들과 그래왔듯 극단적으로 영화와 멀어졌다.
--- p.128
과거가 현실 같고, 현실은 꿈같았다. 크레디트 속 이름들의 얼굴이 영화보다 더 생생한데, 그렇게도 선명한 사람들이 어느 틈에 자신의 삶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버린 건지, 또 자신은 어째서 이토록 낯선 삶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 p.129
“보여?”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던 기억.
“빨간색이 아니라 파란색이구나.”
저 멀리 산 중턱, 헐벗은 나무들 사이에서 세개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게 진짜 도깨비불이라는 걸 자경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눈을 하도 부릅떠 눈물이 흐르는 걸 손등으로 훔쳐가며 자경은 그 빛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메라를 켜 그것을 담으려던 표다르도 이내 관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덜컹거리는 차가 좁은 산길로 들어설 때까지 눈앞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푸른빛을 계속해서 눈에 담았다.
--- p.131
아빠의 감상은 지나친 낭만만은 아니었을지 몰랐다. 희망을 갖고 불빛에 가까이 다가가려 했던 소녀의 마음은 가짜가 아니었으니까. 멀고 희미한 곳에서 반짝이는, 인간을 기어이 살아가게 하는 빛 또한 영화 속에 있었다.
--- p.132
잠든 자경의 머리 위로 뚫린 창밖에는 어둠뿐이었으나, 자경은 환한 대낮과 대낮보다 밝았던 어느 밤들을 지나는 중이었다. 너무 꼭 쥐어 시들어버린 꽃 같은 순간들. 불을 환히 밝힌 할머니 집과 먼지처럼 작아지던 도깨비불, 툇마루에 앉아 마늘을 빻으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아빠, 잎, 눈, 구름 한조각, 계절을 입은 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감나무 아래를. 다시 멀리서 보면, 모두 거기에 있는 것들을.
--- pp.136~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