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에게는 ‘진짜’보다 ‘진짜스러운’ 게 필요하다. 실제보다 실감이 필요하다. 사랑보다 사랑스러운 게 필요하다. 거짓말 같다고 말하는 건 그것이 한없이 진실이기 때문이고, 실감이 안 난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또렷하게 도래해버린 지금이기 때문이다. 사는 것 같지 않다고 웅얼거리는 것은 너무나도 살아있기에 나오는 말이다.
- 이옥토,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척들〉, 65쪽.
나는 빛에 열등감을 느낀다. 빛은 투명한 것에게 새처럼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부서진 얼음의 경계를 통과하여 온 힘을 다해 부딪히기 때문이다. 깨져서 생긴 수백 개의 면면에 어떠한 고통도 없이 계속 부딪히기 때문이다. 빛은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달려든다. 투명한 것의 마술쇼에 참여하고, 마술을 마법으로 탈바꿈하고, 충실한 관객이자 주인공이 된다. 빛에겐 의식이 없기 때문에 기절하지 않고, 그리하여 투명한 물질이라는 무대가 존재하는 한 무한히 마법을 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빛에겐 의식이 없기 때문에 빛은 마법을 전유하지도 않는다.
- 김승일, 〈투명한 물질의 마술과 관객〉, 100쪽.
나는 정지한 세계를 사랑하려고 했다. 정지한 세계의 고요함을, 고요한 세계의 명료함을,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세계를, 가만히 바라보려고 했다. 견고한 침묵에 매혹되었으며, 내부를 투명하게 드러내고도 단단한 세계에 이끌리고는 했다. 의심도 굴절도 왜곡도 없는 투명한 세계 앞에서 숙연해지고는 했다. 그게 바라보는 자의 착시나 투사에 불과하더라도 상관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 이장욱, 〈얼음처럼〉, 106쪽.
눈은 비와 달리 멈춰 서 있는 듯 보일 때가 있고, 때로는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빗방울이 직선의 운동을 한다면 눈송이는 곡선의 운동을 하는 셈이다. 빗방울은 지면이나 사물, 사람에게 닿은 순간 그대로 스며들지만 눈송이는 얼마간 뭉친 형태로 머무른 뒤 녹으며 소멸한다. 빗방울은 이미 액체이므로 그대로 기화하여 구름의 성분이 될 수 있지만 눈송이는 쌓이고 어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는 셈이다. 눈송이는 존재의 자의적인 시간에 퍽 어울리는 셈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두 명의 인물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황망히 죽었다는 것도 다시 생각해 보면 ‘눈 한 송이의 시간’과 연결된다. 우리는 영원 속을 헤매는 것 같지만 실은 순간을 살다 녹아버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 조해진, 〈구름과 기화〉, 114쪽.
우리에게는 엄마가 있었다. 단지 누구나의 마음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일 뿐. 쏟아지는 눈처럼 아름답고 모질고 포근한 엄마가 우리에게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닦아놓은 통유리창 같은, 끝없이 투명한 빙판 같은, 나를 슬프게 했던. 나를 이상한 세상에 던져놓은 존재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하염없이 그리워하다가 이해하려고 발버둥 치다가 드디어 용서하려다가, 무한반복, 용서하고 자시고 할 장르가 아닌 걸 알게 된다. 보이지 않아도 이토록 깊이 사랑하니까. 모든 게 무한히 사라지니까.
- 김이듬, 〈투명한 것과 없는 것을 혼동하지 않을 때까지〉, 121쪽.
물질로서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투명성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물가에서, 유리창 앞에서, 유리컵에 여러 종류의 액체를 따르며, 투명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거듭 이야기를 나누었고 수없이 많은 참고 문헌을 살폈다. 그리고 투명성이란 관계 안에서만 발생할 수 있는 성질이므로, 투명한 물질이란 관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단 한 겹의 설명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깨끗한 언어로 투명성을 설명하는 대신, 단단하고 투명한 껍질 안에 투명성을 부연하는 말들을 욱여넣고 보관하는 대신 우리는 투명성이 맺고 있는 관계들을 관찰하고 싶었다.
- 김리윤, 〈유리 상태〉, 123쪽.
관람객은 방문객으로서 영화관이라 불리는 영화의 집에 간다. 이 방문은 실체화 과정을 개시하는데 이렇게 해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현실만도 아니고 허상만도 아닌 사이적 실체로서 영화다. 어셔 가문의 마지막 후예 로더릭처럼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영화를 이루는 온갖 시청각적 기호를 독해하는 일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를 우리는 한때 ‘시네필리아’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단 이런 상태에 놓이면 영화의 집에서 실체화한 것들을 현실로까지 끌어들여 뒤섞곤 한다. 현실에서도 온갖 유령들에 둘러싸여 사는 〈비틀쥬스 비틀쥬스〉의 위노나 라이더처럼 말이다.
- 유운성, 〈고스트 하우스 리모델링〉, 196쪽
우리는 보고 있지만 그것은 비릴리오가 위대한 현상학 철학자들의 주장에 기대 말하듯이 시각적 ‘경험’이 아니다. 보기란 것이 단순히 지각 활동이 아니라 보이는 존재와 보는 주체 양자의 심원한 경험을 가리킨다는 점을 뜻한다면, 우리는 눈을 뜨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 셈이다. 많이 보았다는 것은 많은 시각적 데이터를 지각했다는 것이 아니라 본 것을 통해 많은 식견과 반성을 쌓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보기를 인간적 시지각을 넘어 이미지-센싱으로 확장한다. 보기의 주도권은 점차 후자 쪽으로 넘어가는 추세이다. 그러기에 비릴리오가 이미지가 모든 곳, 모든 순간을 채우고 있는 오늘의 세계를 “시각의 저 끝 너머”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반응하지만, 그것은 보기도 아니며 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시각성의 세계도 아니기 때문이다.
- 서동진, 〈센서처럼 보기〉,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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