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가장 명쾌한 저술가는 아니다. 또한 그의 목적은 스피노자나 헤겔 혹은 콩트 같은 사상가들처럼 모든 것을 포괄하는 단일한 총체적 사상 체계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루카치 같은 사람들은 마르크스가 추구한 것은 일련의 학설을 또 다른 일련의 학설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 방식과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고 실제로 그러한 목표를 달성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만일 그들이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서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찾으려고 한다면, 많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신념의 의의와 진실성 여부는 신념 자체가 아니라 그 표현인 실천에 달려 있다고 평생 동안 역설했기 때문에, 많은 수의 상당히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핵심 주제들에 관한 그의 생각들이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지 않다는 것, 따라서 그의 저술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구절들이라든가 그가 지지를 보내거나 창시한 구체적인 운동 양식들을 그러모아 추론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19세기 사상가 중에 카를 마르크스만큼 인류에게 직접적이고 심각하고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없다. 그는 살아서만이 아니라 죽은 뒤에도 추종자들에게 지적,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유럽의 민주적 민족주의의 황금시대였다. 이때는 대중적 영웅, 순교자, 낭만주의자 등 거의 전설적인 인물들이 그들의 삶과 언어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새로운 혁명적 전통을 만들어내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도 그의 영향력은 단연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당대에든 그 이후에든 간에, 결코 마르크스를 대중적 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는 결코 대중적인 저술가나 연설가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이전 세대들보다 더 열심히 그리고 더 의식적으로 상상력을 함양한 세대에 속한 데다가 사실보다는 관념을 더 실재적인 것으로 보고 외부 세계의 사건보다는 인간관계를 더 중시하고 사회생활을 자신들의 내밀하고 복잡한 사적 경험의 세계의 시각에서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천성은 내적 성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개인의 인격이라든가 마음이나 영혼의 상태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너무나 많은 동시대인들이 갑작스런 부의 증가와 사회적, 문화적 혼란을 수반한 급속한 기술 진보 때문에 당시 사회의 혁명적 변화의 중요성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는 분노와 경멸을 금치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상이 아니라 역사에 의거해 현존 질서를 공격한다. 즉 그는 부정의하다거나 불행을 초래한다거나 인간의 악함이나 어리석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이유로 현존 질서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 단계에서 한 계급이 합리성의 정도를 바꿔가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다른 계급의 재산을 빼앗고 착취하고 그 결과 인간을 억압하고 불구화하도록 만드는 필연적인 사회 발전 법칙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현존 질서를 공격한다. 억압자들을 위협하는 것은 피억압자들의 계획적인 보복이 아니라 사회적 책무를 다했기에 인류 역사의 무대에서 곧 사라질 억압자 계급을 위해 역사가 (억압자 계급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회 집단의 이익에 근거한 활동의 형태로) 마련해 놓은 불가피한 파멸의 운명이다.
마르크스는 낭만주의, 주정주의 및 모든 종류의 박애주의적 호소를 혐오했으며, 청중이나 독자들의 이상주의적 생각에 호소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전 문건에서 오랜 민주주의적 수사(修辭)를 모조리 제거하고자 애썼다. 그는 모든 형태의 타협을 거부했기 때문에 양보를 하지도 않았고 양보를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조금이라도 성격이 불분명한 정치 세력과는 동맹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의 이름이 들어간 성명서, 선언문, 행동강령에는 한때는 정말로 이상들을 표현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시대에는 민주주의 운동들의 상투어가 된 도덕적 진보, 영원한 정의, 인간의 평등, 개인이나 민족의 권리, 양심의 자유, 문명을 위한 투쟁 등의 문구들이 거의 없다.
마르크스 이론의 독창성은 자주 의심을 받아 왔다. 물론 마르크스의 이론은 이제껏 표현된 적 없는 개인적 경험을 형상화한 예술작품을 가리켜 말할 때의 의미에서 ‘독창적’이지는 않다. 그것은 새로운 가설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존의 견해를 수정하고 결합함으로써 이제껏 해결되지 않고 있었거나 아예 형식화도 되지 않았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제공한 과학적 이론을 가리켜 말할 때의 의미에서 독창적이다.
당시에 사람들을 가장 사로잡고 있던 이론적 문제들에 관해 알기 쉬운 경험적 용어들로 분명한 대답들을 제시하고 그로부터 분명한 실천적 지침들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 것이야말로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이론이 이후 수십 년간 경쟁 이론들을 물리치고 독보적인 생명력을 계속 발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주위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문이나 책 이외의 것은 거의 보지 않았고, 죽을 때까지 자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건강이나 행복 혹은 사회적, 태생적 배경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책, 신문, 잡지, 정부보고서 등을 정기적으로 구할 수만 있다면 마다가스카르에서 망명 생활을 보냈어도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시대의 적들을 차분하고 느리지만 효과적인 방법들로 파괴한 시대, 칼라일과 쇼펜하우어를 멀리 떨어져 있는 문명이나 이상화된 과거로 도피하게 만들고 시대의 최대의 적인 니체를 히스테리와 광기로 몰고 간 시대에, 오직 마르크스만이 확고함과 강력함을 잃지 않았다. 다가올 조화로운 사회에 대한 분명하고 확고한 믿음을 바탕으로 내적 평정 속에서 하늘이 명한 임무를 수행하는 고대의 예언자처럼, 마르크스는 자신이 사방에서 본 쇠퇴와 파멸의 징후들을 증언했다.
18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들은 물었다. 만일 인간이 자연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면, 인간 행동을 지배하는 법칙들은 무엇인가? 만일 어떤 조건에서 물체가 낙하하고, 행성이 회전하고, 나무가 자라고,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는지를 경험적 수단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 인간이 먹고, 마시고, 잠자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서로 싸우고, 가족?부족?민족을 구성하고, 군주제?과두제?민주제를 채택하게 되는지도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뉴턴이나 갈릴레오 같은 인물이 이를 발견해내기 전까지, 진정한 사회과학은 출현할 수 없었다.
헤겔의 진정한 중요성은 사회적, 역사적 연구 분야에 미친 영향에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사회 조직들을 구성 요소인 개인들로 환원해 기술할 수 없는 고유의 삶과 성격을 가진 일종의 거대한 집단적 인격체로 보고 그 조직들의 역사를 연구하고 그 조직들을 비판하는 새로운 분과학문들을 만든 데 있다. 이 같은 사유 혁명은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신화들--- 이를테면 국가, 인종, 역사, 시대 등을 어떤 영향력을 가진 초인격체로 취급하는 태도 ---을 낳기도 했지만 인문과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건들을 성격이나 의도의 결과로 설명하거나 왕이나 정치가의 개인적 패배나 승리로 설명하는 모든 저자들을 순진하고 비과학적으로 보이게 만든 독일 역사학파의 출현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유 혁명의 영향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사회주의의 모든 소책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문건이 탄생했다. 현대의 어떤 정치 운동도 유창함이나 힘에서 『공산당 선언』에 필적할 만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공산당 선언』은 대단히 놀라운 힘을 가진 글이다. 『공산당 선언』은 형식으로 보면 장차 복수에 나서게 될 미래 세력들의 이름으로 기존 질서를 고발하는 데까지 이르는 대담하고 흥미로운 역사적 일반화들의 체계이다.
『자본』은 중세 이후에 쓰인 어떤 저술도 갖지 못한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본』은 이 책을 한 줄도 읽지 않았거나 읽었더라도 곳곳에 있는 모호하고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문장들을 이해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맹목적 숭배나 맹목적 증오의 대상이 되어 왔다. 『자본』의 이름으로 혁명들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반혁명들은 적의 무기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무기인 『자본』을 집중적으로 탄압했으며 그러한 탄압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반면에 『자본』의 주장들을 내세우면서 『자본』에 자신들의 신념이 최종적이고 영구불변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고 보는 새로운 사회 질서가 실제로 수립되었다. 『자본』은 수많은 해석자와 궤변가들을 출현시켰다. 이들은 그 영향력에서 신성한 원본을 능가하는 해설서들을 백 년 이상 동안 끊임없이 만들어냈고, 그 결과 『자본』은 산더미 같은 해설서들에 파묻히고 말았다.
그는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거의 없었고 자신의 태생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생전에는 그도 엥겔스도 직접 입 밖으로 꺼낸 적이 없었다. 마르크스의 저술들 속에는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그나마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 두 군데 정도 있을 뿐이다. 그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개별적인 유대인들에 관해 언급한 내용들은 상당히 적대적이다. 그가 유대계라는 사실은 분명 낙인이었고, 이러한 낙인은 그가 다루는 것들에서 어쩔 수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크스는 자기 시대의 천박하고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사회에 맞서 싸웠다. 그가 보기에 기존 사회는 극심한 혐오에 입각해 모든 인간관계를 저속하게 만들고 타락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의 정신을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마르크스는 외부의 영향에 민감하지 않았고 자신감이 넘쳤으며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마르크스를 불행하게 한 원인들은 자기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 있었다. 그것은 빈곤과 질병 그리고 적의 승리였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