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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의 비결

: 미국 민주당의 역사

[ 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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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3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568쪽 | 950g | 153*224*33mm
ISBN13 9788946075313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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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학적으로 볼 때, 민주당이 과거의 우위를 되찾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을 승리로 이끌었던 유권자 연합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 유권자 연합은 한때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대선 4연승을 이끌었고, 1930년대의 대공황부터 시작해서 1980년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 승리를 거둘 때까지 거의 반세기에 가까운 기간 동안 민주당이 의회와 많은 주를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이 민주당 성향 유권자 연합의 핵심에는 모든 인종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백인 임금 노동자들은 점점 공화당 지지자로 넘어갔다. 이후 흑인과 히스패닉 노동자 가운데 상당수도 비슷한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민주당의 지지층은 주로 대학교육을 받고 문화적으로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와 함께 백인이 아닌 가난한 미국인들은 여전히 민주당 지지자로 남아 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민주당 성향 유권자들은 사회의 상층과 하층 사이의 연합인 셈이다.
---「한국어판 서문」중에서

1928년, 언론인 프랭크 켄트(Frank Kent)는 민주당에 대한 책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냉철한 언급을 남긴 바 있다. “민주당은 미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치조직이다. 그러한 정당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쓰는 일은 무지막지한 작업이 될 것이다. 특정한 시기 혹은 몇몇 걸출한 인물에 대해서라면 이미 많은 저작이 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민주당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책 한 권에 담으려는 시도는 터무니없는 짓이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보다 제한적이다.
---「서문」중에서

21세기에 들어온 지금, 민주당 인사들은 더 이상 제퍼슨의 신화를 추종하지 않는다. 번쩍이는 대리석으로 기념관을 짓고, 그 안에 6미터에 달하는 제퍼슨 동상을 세웠던 민주당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민주당은 지금도 후원의 밤 행사를 개최하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행사 명칭에서 제퍼슨이나 잭슨의 이름은 삭제되었다. 신년 만찬회의 명칭 역시 당의 인종주의적 과거에 때 묻지 않은 보다 후대 인사들의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 남자가 남긴 역설적 유산과 씨름하고 있다. 제퍼슨은 정당을 이끌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나, 미국의 정치적 미래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미래는 그가 알던 그 시절의 정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
---「프롤로그」중에서

이 시기 민주당이 이룩한 성취는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민주당은 대중 유권자 전체를 끌어들이려고 시도했던 최초의 정치조직이었다. 그들은 역사상 최초로 후보 공천을 위한 전당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했고, 최초로 당의 신문을 발행했으며, 최초로 전국위원회와 의회 코커스를 설립했다. 또한 그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정당들 사이의 경쟁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현실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그러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예찬했던 정치조직이었다. 강력한 당 조직은 민주당이 창당 후부터 남북전쟁 전까지 미국 정치를 지배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그들은 1828년부터 1856년 사이에 단 두 차례를 제외하고 모든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이 기간 동안 대부분 상하 양원을 통제했다.
---「1. 민주당의 탄생」중에서

잘 훈련된 정치 활동가의 역할은 인구가 많은 경합주들에서 특히 중요했다. 1840년 당시 뉴욕은 미국 최대의 주였고, 오하이오는 세 번째로 큰 주였다. 잭슨 퇴임 이후 열린 다섯 차례의 대선 결과를 보면, 뉴욕에서 이긴 후보는 모두 선거에서 승리했다. 만약 뉴욕의 결과가 조금만 달랐다면, 1836년의 밴 뷰런도, 1844년의 제임스 포크(James K. Polk)도, 1848년의 휘그당 후보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도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었다. 오하이오의 경우에는 다섯 번의 선거 중 세 차례나 패배한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나 딱 한 번을 제외하고 모든 선거에서 득표율 격차가 5% 이내였다. 이 두 주에서 양당은 단 한 번도 주지사를 연임하지 못했으며, 연속으로 4년 이상 주의회를 장악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불확실성으로 인해 양당은 유권자들을 동원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840년대 내내 오하이오와 뉴욕의 투표율은 두 주 모두에서 92%에 육박했는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치였다.
---「1. 민주당의 탄생」중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논리가 스스로도 인종적·종교적 편견에 시달렸던 아일랜드계 가톨릭들이 민주당의 충직한 지지자가 된 이유였다. 소위 “광신적” 개혁가들은 한편으로 노예해방과 여성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1840년대와 1850년대 동안 파멸적인 감자기근을 피해 대규모로 미국에 건너왔던 아일랜드 사람들을 멸시했다. … 그들은 대개 헐벗고 굶주리고 무식한 자들이었다.
---「2. 백인 남성의 공화국을 수호하라」중에서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남부의 민주당 정치가들은 표리부동한 행태를 계속해 나갔다.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흑인 투표권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대신 공화당이 부패한 연방과 주 정부를 유지하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고 있다고 공격하는 데 화력을 집중했다. 하지만 뒤로는 KKK단(Ku Klux Klan)을 비롯한 여러 자경단의 행패를 못 본 척했다. … 민간 무장단체는 제대로 된 민주적 선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덕분에 민주당은 남부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2. 백인 남성의 공화국을 수호하라」중에서

브라이언이 닦아놓은 정책과 지지층의 토양 위에, 윌슨이 뉴프리덤(New Freedom)을 싹 틔웠고,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뉴딜을, 해리 트루먼이 페어딜(Fair Deal)을 꽃피웠다. 브라이언의 1896년 대선 이후 반세기 동안, 민주당은 대부분 전국 단위 선거에서 스스로를 임금 노동자와 중소 자영농의 이익에 봉사하고 대기업의 힘을 견제하는 세력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정부의 규모와 역할이 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이 통치할 것인가(Shall the People Rule)?” 1908년 선거에서 브라이언이 물었다. 잭슨 이래 민주당 인사들은 바로 이 질문을 묻고 또 물었다.
---「4. 진보 정당으로의 변신」중에서

남부 농촌의 변함없는 중요성을 별개로 하고, 이 시기 민주당은 그래도 새로운 집단을 하나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비록 수는 많지 않았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민주당의 핵심 지지층으로 남아 있는 그들은 바로 북부 도시들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었다. 잭슨의 시대 이래 학계 내외를 가릴 것 없이 미국의 내로라하는 문인과 예술가들은 모두 민주당을 경멸했다. 그들에게 민주당이란 아일랜드 술주정뱅이와 인종주의자 깡패, 부패한 보스들, 멍청한 촌뜨기의 집합소였다. 물론 한때 월트 휘트먼이나 너새니얼 호손과 같은 저명한 지식인들이 민주당의 『데모크라틱 리뷰』에 글을 쓰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이 민주당 언론이 이후 노예제를 열렬하게 옹호하고 멕시코와의 전쟁을 부르짖고 다니자 북부의 독자는 하나둘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4. 진보 정당으로의 변신」중에서

이 팔랑크스에 속한 여성 가운데 그들 공동의 목적을 추구해 나가는 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 하나 있었다. 물론 그녀가 본격적으로 재능을 꽃피우게 되는 것은 아직 몇 년 이후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엘리너 루스벨트(Eleanor Roosevelt)는 그녀의 남편이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1910년까지 철저하게 사적인 삶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이후로도 10여 년 동안은 정치가의 아내에게 기대되는 일들 이상은 하지 않았다. … 신문에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도 없었다. 당시까지 엘리너는 “남자가 보다 우월한 존재”이며 “여자에 비해 정치에 대해 더 잘 안다”고 믿었고, 따라서 남편이 먼저 나서서 여성의 투표를 지지하기 전까지 여성 참정권조차 옹호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공화당의 전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였기 때문에, 대놓고 민주당을 표방하는 것도 꺼렸다.
---「5. 여성들에게 달려 있다」중에서

하지만 스미스의 노동 친화적 진보주의도, 인종차별에 대한 외면도 그를 승리로 이끄는 데는 어림도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고작 87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남부는 “교황의 졸개 뉴욕 주지사”를 대선후보로 지명한 “신부님의 정당”을 벌하기로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실제로 남부 다섯 주〔버지니아,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 플로리다, 텍사스〕의 다수 유권자들은 그들이 보기에 헌법을 무시하고, 말도 이상하게 하는 민주당 후보를 끝내 외면했다.
---「5. 여성들에게 달려 있다」중에서

1936년 대선에서 FDR에 대한 지지는 부유층을 제외하고 모든 집단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공장 지대와 대도시의 유권자들 사이에서 특히 투표율이 높았고, 이들은 예외 없이 민주당에 몰표를 던졌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 이전까지 거의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럽 출신 이민 노동자들과 자녀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몰려갔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 씨는 지금까지 모든 백악관 주인장들 중에서 우리 사장이 개새끼라는 걸 알아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소.” 한 공장 노동자가 말했다.
---「6. 미국의 노동당?」중에서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했던 이들은 1936년에 잠깐 루스벨트를 찍었다가 4년 후 다시 그들의 옛 정당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남부 텃밭이 아직 건재했고, 대도시 노동자들의 압도적 몰표는 FDR에게 대선에 이기고도 남을 넉넉한 선거인단을 안겨주었다. 이를 보고 당대의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자야말로 민주당이라는 건물의 대들보이다.”
---「6. 미국의 노동당?」중에서

“노동자들이 해냈어!” 이 한마디 말은 도대체 어떻게 여론조사와 정치 분석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승리를 거두었는지 묻는 한 “친한 친구”에게 1948년 대선 직후 트루먼이 던진 대답이었다. 실제로 70%에 달하는 노조 조직원들이 트루먼을 찍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의 대역전승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6. 미국의 노동당?」중에서

1963년 6월 11일, 케네디 대통령은 전국 TV 방송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절박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우리는 정녕 세계를 향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서로를 향해, 이곳은 흑인만 빼고 자유로운 땅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흑인만 뺀다면 미국에는 이등 시민이 없다고 말할 것입니까? 흑인만 제외하면, 이곳에는 신분도 카스트 질서도 없고, 게토도 없고, 지배 인종도 없다, 우리는 진정 이렇게 말할 것입니까?” 이어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민권법이 될 법안의 윤곽을 제시했다. 이 법안은 한 해의 시간이 흘러 JFK가 암살당하고 난 이후에야 통과되었다. 그것은 모든 공공시설에서 인종 분리를 불법으로 규정했고, 고용과 교육에서 인종 및 젠더에 따른 차별을 금지했다.
---「7. 자유와 분열」중에서

이에 더해 후보자 자신도 기가 질릴 정도로 많은 TV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을 홍보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1960년 대선 토론에서 침착하고 잘생긴 존 F. 케네디는 진땀을 뻘뻘 흘리던 리처드 닉슨에 우위를 점했다. 이러한 미디어상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해 대선에서 케네디는 역사상 가장 박빙의 승부 끝에 겨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당의 내부 개혁 이후 대권을 꿈꾸는 모든 인사는 이제 TV 화면에서 능숙하고 매력적인 배우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그렇지 못할 경우 더 나은 배우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1977년에 정치학자들이 작성한 한 보고서는 이렇게 물었다. “무엇이 앞으로 정당의 자리를 대체할 것인가?” 그들은 걱정스러운 예측을 내어놓았다. “그 자리에는 유명인 중심의 정치와 과도한 미디어의 영향력이 들어설 것이다. 혹은 정책 대신에 후보자 개인의 ‘개성(personalities)’에만 집중하는 … 일종의 이달의 인기 정치인 클럽 같은 것이 들어설 것이다.”
---「8. 누구의 정당인가?」중에서

선거 결과는 의미심장했다. 오랜 기간 동안 민주당은 임금 노동자와 그들 가족의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이번에 민주당 대선후보는 노동계급 밀집지인 뉴욕의 퀸스(Queens)나 LA 교외 산업단지인 사우스게이트(South Gate)보다 비벌리 힐즈(Beverly Hills)나 맨해튼 어퍼이스트사이드(Upper East Side) 같은 부유층 선거구에서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나는 뭔가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대선 직후 『뉴요커』의 영화 비평가 폴린 케일Pauline Kael은 이렇게 썼다. “내 주위에 닉슨을 찍은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닉슨을 찍은 사람들은 퀸스나 사우스게이트에 살았다.
---「8. 누구의 정당인가?」중에서

일단 백악관에 입성하고 나자, 전직 원자력 엔지니어이자 땅콩 농부였던 카터는 형편없는 정치가로 판명되었다. … “원래부터 대통령이라는 직책은 선거를 위한 정치와 통치를 위한 정치를 칼로 자르듯이 나눌 수 없는 자리입니다. 만약 대통령이 국민 다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말이죠. 그런데 카터의 경우에는 그저 국민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에 실패한 것만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는 그걸 원하지도 않았어요.” 카터의 부통령을 지낸 월터 먼데일(Walter Mondale)은 후일 이렇게 회고했다. “그분은 정치를 사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8. 누구의 정당인가?」중에서

펠로시는 원내총무에서부터 하원 소수당 대표까지 당 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2007년, 그녀는 마침내 미국 최초의 여성 하원의장에 올랐다. 그날 하원의장 선거에서 51명의 민주당 여성 의원이 그녀를 지지했다. 4년 후 하원 다수당의 지위는 공화당에 빼앗겼으나, 당내 여성 의원의 수는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2019년 펠로시가 하원의장로 복귀했을 때, 무려 87명이나 되는 민주당 여성 의원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시기 즈음에 오면 19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던 양당 간의 젠더 격차는 더욱 벌여져 여성들은 이제 민주당을 공화당에 비해 무려 20%나 더 지지하게 되었다. 실제로 여성의 표는 민주당이 하원을 탈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9. 국제주의자들, 새로운 승리의 비법을 찾아 나서다」중에서

정당을 재건해 나가는 과정에서 펠로시는 어떤 후보가 특정 사안에서 자신과 같은 의견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일절 문제 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가 중시했던 것은 그 후보가 자기 지역구에서 먹힐 만한 인물인가 하는 문제였다. “펠로시는 결코 우리가 어떤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지 묻는 법이 없었어요.” 칼럼니스트인 미셸 골드버그(Michaelle Goldberg)가 말했다. “그녀는 항상 표는 어디서 가지고 올 것인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9. 국제주의자들, 새로운 승리의 비법을 찾아 나서다」중에서

좌파 진영의 모든 미국인이 전반적으로 밥 딜런의 정서에 공감했다. 거의 7000만에 가까운 유권자가 흑인과 백인 혼혈의 이 세련된 멋쟁이 젊은 정치가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반대하는 활동가였고, 지역 공동체 조직가였으며, 이라크 전쟁의 비판자였다. 이제 그가 미국을 다스리게 될 것이었다. 1936년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당선 이후, 이토록 열정적인 진보 유권자들을 하나로 단결시켜 선거를 승리로 이끈 민주당 대선후보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아가서 이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은 창당 이후 오랜 기간 말과 행동에서 백인 우월주의를 실천했던 정당 소속이었다. 민주당에게 오바마의 당선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심지어 남부를 제외한다면 그는 백인 유권자로부터도 과반의 득표를 달성했다.
---「9. 국제주의자들, 새로운 승리의 비법을 찾아 나서다」중에서

사실 2008년 대통령 당선 당시 오바마는 동성 결혼의 반대자였다. 4년 후 그는 마음을 바꿨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불고 있던 정치적 바람을 더욱 강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15년 6월, 연방대법원은 오버게펠 대 호지스(Obergefell v. Hodges) 판결에서 단 한 표 차이로 혼인에 있어서의 평등을 미국의 법으로 인정했다.
---「9. 국제주의자들, 새로운 승리의 비법을 찾아 나서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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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이고 … 명쾌하다. 케이진은 민주당의 목표를 둘러싼 오랜 논쟁에 대해 풍성한 역사를 제공한다. 저자는 묵직한 주제에 관한 연구자의 안목을 보여줌과 동시에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도 보여주었다.”
- 제닛 후크 (LA타임스)
“중요한 책이다. … 기민하면서도 매우 흥미로운 역사를 들려준다.”
- 티머시 노아 (뉴욕타임스,‘편집자의 선택’)
“이 훌륭한 책을 통해 마이클 케이진은 … 194년에 달하는 민주당의 역사에 대한 총체적 분석틀을 제시하는 야심을 보여주었다. … 학술성과 대중성을 아울러 갖추었다.”
- 더 이코노미스트
“이 책은 오늘날 민주당에게 일반 사람의 편에 서서 부유한 기득권과 맞서 싸웠던 과거 그들의 투쟁을 다시 되찾으라고 조언한다.”
- 존 디커슨 (더 애틀랜틱)
“미국 민주당에 대한 매우 훌륭한 신작 역사서. 풍성한 이야기에 대중성까지 갖추었다.”
- 샘 로젠펠드 (뉴 리퍼블릭)
“적시에 나온 생동감 있는 저작 … 지금 당장 읽어볼 만한 역사.”
- 커커스 리뷰 특별 서평
“케이진은 민주당의 전체 역사를 멋지게 들려주었다.”
- 조지 캔들 (북리스트 특별 서평)
“세계 최장수 정당에 대한 모범적일 만큼 생동감 있는 역사책. … 이 책은 케이진의 오랜 팬들만이 아니라 많은 독자들의 흥미를 끌 것이다.”
- 라이브러리 저널
“마이클 케이진은 … 왜 미국의 성공이 노동의 존엄성을 위한 민주당 투쟁의 성패에 달려 있는지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 세러드 브라운 (민주당 상원의원 (오하이오))
“케이진의 놀라우면서도 흥미로운 이 저작은 우리가 어떻게 오늘 여기에 이르렀는지 안내한다.”
- 제이미 라스킨 (민주당 하원의원 (메릴랜드))
“미국 민주당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관한 마이클 케이진의 굉장히 중요한 저작.”
- 질 르포어 (하버드 대학교 사학과 교수)
“케이진의 책은 대중적이면서도 전문적이고, 자세하면서도 압도적이며, 주장이 강하면서도 다양한 의견을 존중한다. 위대한 스타일의 역사책.”
- 랜들 케네디 (하버드 로스쿨 교수)
“존경스러운 저자 마이클 케이진이 쓴 이 생동감 넘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나이 드신 작은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다.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가족은 밥상에 앉을 때면 종종 그분 할아버지, 즉 민주당 이야기를 하곤 했지만, 이제야 마침내 온전한 뒷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할아버지께서 결코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 불미스러운 에피소드들을 들려주는 한편, 동시에 우리가 반쯤 잊고 있었던 훌륭한 업적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케이진은 할아버지가 전적으로 사랑하기만 하거나 혹은 전적으로 미워하기만 하기에는 우리에게 너무도 큰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분 없이는 우리 가족이 지금처럼 살아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애덤 호스차일드 (UC 버클리 저널리즘 스쿨 교수)
“말 그대로 최상의 역사책. 허심탄회하고, 비판적이며, 아름다운 동시에 많은 영감을 준다.”
- E. J. 디온 (워싱턴 포스트 칼럼니스트)
“민주당의 역사에 관한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이야기.”
- 리자베스 코언 (하버드 대학교 사학과 교수)
“세계 최장수 정당의 역사에 관한 재미있으면서 통찰력 넘치는 연대기.”
- 알렉산더 키서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교수)
“도덕적 자본주의와 선거 승리를 동시에 이루기 위한 민주당의 투쟁, 그리고 그에 대한 가슴 뛰면서도 압도적인 저작.”
- 줄리엔 젤리저 (프린스턴 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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