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진한의 소국 중 오늘날 경주 위치에 자리한 사로국斯盧國이 발전한 국가로 박혁거세朴赫居世(신라 제1대 왕, 재위 BC 57-BC 4)에 의해 건국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초기 신라를 운영한 세력은 사로국을 세운 사로 6촌족장들이었다. 사로 6촌족장은 박혁거세가 신라(서라벌)를 세우기 전부터 사로국을 통치한 6부족의 족장으로,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운 뒤에도 통치력을 유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했다. 그래서 박혁거세 이후 초기 신라 왕위는 6촌족장중에서 선발되거나 선대왕의 사위에게 승계되었다. 이후 마립간麻立干대(356년부터 514년까지)에 이르러 장자계승이 정착하면서 왕권이 확립되었다.
---「신라」중에서
거서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쓴 왕호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거서간은 진한 언어로 왕 혹은 귀인을 부르는 칭호다.’라고 하여 박혁거세에게만 한정된 왕호였다. 『삼국유사』에 ‘박혁거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신을 알지거슬한閼智居瑟邯(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크게 일어난다고 하였으니, 그 말에 따라 거슬한(거서간)을 임금의 존칭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거슬한과 거서간은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며 달라졌을 뿐 같은 단어를 가리킨다. 거서간은 부족사회에서 족장의 호칭으로 쓰이는 간干에서 파생된 호칭으로 여러 수장들 중에 대표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신라 왕실」중에서
경위는 왕경(수도)에 거주하는 중앙귀족에게 수여한 관등이다. 경위는 상위부와 하위부로 나뉜다. 상위부는 신라 초기 소국 연맹체의 6부족장 직계에게 부여한 이벌찬伊伐?, 이찬伊飡, 잡찬?飡, 파진찬波珍飡, 대아찬大阿飡, 아찬阿飡, 일길찬一吉飡, 사찬沙飡, 급벌찬級伐飡이다. 하위부는 6부 부족의 가신이거나 하급 귀족에게 부여한 관등인 대나마大奈麻, 나마奈麻, 대사大舍, 소사小舍, 길사吉士, 대오大烏, 소오小烏, 조위造位가 있다.
---「신라 관등」중에서
진평왕眞平王(신라 제26대 왕, 재위 579-632)대부터 본격적으로 궁중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이 등장했고, 이를 총괄하는 관청인 내성이 설립되었다. 진평왕은 왕실과 궁궐 행정을 위한 기구들을 설치하여 내부적인 조직화를 통한 왕권 강화에 돌입했다. 진평왕 후대에 내성이 설치된 후에는 ‘궁’조직이 내성 산하 기구로 편제된 것으로 보인다. 즉 진평왕은 진흥왕대까지 양부와 사량부가 담당하던 왕실관련 업무를 한 곳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통일하고, 궁궐 내 독립된 관서들을 총괄할 수 있도록 내성을 설치했던 것이다.
---「신라 기관 1」중에서
병부는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중앙행정관부로 신라중앙행정 재정비 과정에서 설치되었다. 516년(법흥왕 3년)에 병부 장관직인 병부령을 먼저 설치하고 이후 517년(법흥왕 4년) 4월에 병부를 세웠다. 병부는 병마 업무뿐만 아니라 군정권?군령권을 관리했다. 군정권과 군령권은 병부령에게 부여하여 병부를 총괄하게 했다.
---「신라 기관 2」중에서
대일임전은 654년(태종무열왕 4년)에 설치된 관청이다. 정확히 어떤 관청인지 기록상 확인이 어렵지만, 경주에서 중요한 의례를 맡은 전읍서와 함께 경주의 도서 행정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이라는 견해와 군신회의가 열릴 때 소식을 전하는 일 또는 왕이나 귀족의 행차를 알리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은 관청이라는 견해가 있다. 현재로써는 어떤 업무를 담당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대일임전이 경덕왕 때(8세기 중엽)부터 전경부(전읍서)와 통합되어 경주를 관리했음은 분명하다.
---「신라 기관 3」중에서
사천왕사성전은 사천왕사四天王寺의 관리와 보수를 담당한 관서다. 670년(문무왕 10년)에 당나라가 수군水軍을 동원해 신라를 공격했는데, 이때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679년(문무왕 19년) 밀교密敎 승려 명랑明朗(?-?)의 주도하에 사천왕사를 창건했다. 경주시 낭산에 있었던 사천왕사는 수미산須彌山 중턱 사왕천四王天 의 네 수호신을 모시는 사찰로 오방신五方神 과 사천왕이 지키는 불국토佛國土 의 입구이자 신과 인간의 경계 지점으로 인식되었다. 문무왕은 사천왕사의 불교의례를 통해 당나라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신라 기관 4」중에서
감전은 제사 때 사용되는 음악을 관장한 관서로 책임자인 대사 2명, 중위급 실무관직인 사지 2명, 말단 실무 관직인 사 4명이 소속되었다. 감전에는 악사 관리를 담당한 도관都官 4명, 도관을 보좌하는 최하위 말단 관직인 종사지 2명이 있었고, 악기를 연주하는 악자樂子(악사)는 인원수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신라 기관 6」중에서
육정은 신라 수도인 경주에 주둔한 대당大幢, 경상도 상주지역에 주둔한 상주정上州停, 경기도 광주지역에 주둔한 한산정漢山停, 전라북도 전주지역에 주둔한 완산정完山停, 강원도 강릉지역에 주둔한 하서정河西停, 강원도 춘천지역에 주둔한 우수정牛首停이다.
---「신라 무관」중에서
도독은 주의 장관으로 주의 행정권과 군사권을 관장했다. 505년(지증마립간 6년)에 지증마립간이 나라 안에 주, 군, 현을 나눌 때 주의 장관으로 군주軍主라는 관직이 처음 등장했다. 661년(문무왕 1년)에 군주를 총관摠管으로 고쳤다가 785년(원성왕 1년)에 도독으로 개칭했다. 도독은 9개 주에 각각 1명씩 배치되었고, 6관등 아찬에서 9관등 급벌찬까지의 관등 중에서 임명되었다.
---「신라 지방직」중에서
삼변수당은 690년(신문왕 10년)에 설치된 세 군부대로 변수邊守라고도 불렸다. 삼변수당은 한산변漢山邊(지금의 서울), 우수변牛首邊(지금의 강원도 춘천), 하서변河西邊(지금의 강원도 강릉)에 설치되어 신라 변경 지방을 지켰다. 삼변수당은 군복 옷깃 색이 따로 없다.
---「신라 지방 부대」중에서
발해의 통치 계층은 고구려 출신 귀족, 관료, 지주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말갈족 출신은 많지 않았다. 통치 계급자들은 모두 지주로 많은 부곡민部曲民을 소유했다. 이들은 가난한 고구려 유민에게 소작료를 징수하는 대가로 땅을 빌려줬다.
---「발해」중에서
마진의 관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으로만 확인되는데, 당시 품계가 정확히 어땠는지 알 수 없다. 대신 995년(성종 14년)에 고려가 관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향직鄕職(지방 관리직) 품계가 정해졌는데, 모두 마진?태봉의 관등 명칭과 동일했다. 그래서 학자들은 고려 향직을 태봉대부터 이어진 관등으로 판단하여 동일하게 보고 있다. 궁예가 만든 관등은 총 9관등으로, 2품 정광正匡, 4품 원보元輔과 대상大相, 6품 원윤元尹과 좌윤佐尹, 7품 정조正朝, 8품 보윤甫尹, 9품 군윤軍尹과 중윤中尹이 있다. 2품부터 9품에 해당하는 관등은 정치 기구에서 장관직부터 실무직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고구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