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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

현대시 기획선-104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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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9월 25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36*216*20mm
ISBN13 9788961043632
ISBN10 8961043633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시간이 확장되고 공간이 연속되는 그곳은
해 뜨고 달 지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멀어진 길만큼 시간이 늘어나고 있으니
그대를 오래 그리워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습니다

늘어나는 시간만큼 좁아진 길을 마주하면서
들찔레 개망초 번지는 바람 속으로
나는 날마다 그대와 나란히 걷는 일을 생각합니다

빛과 어둠을 넘어 나이와 황금과 무관
세상에서 가장 길고 향기로운 그곳은
내가 멀리 가고 싶어 높이 둔 곳입니다
---「사랑」중에서

뒤란 감잎을 쓸자
흙투성이가 된 그늘이 딸려 나온다

달아날 수 없는 거리를 두고
떨림이 있던 자리 반경엔
감미롭고 환한 증거들이 뒹굴기 마련

밟힐수록 단단히 박히는 씨앗부터
물러터진 흔적의 꼭지까지
한 그루 감나무의 기록이 수북하다

감잎 그늘을 비질하는 걸음 위로 무지개가 뜬다
촉촉한 계단을 디디고 가면
풋감 담가둔 항아리가 열리고 감꽃이 필 거라는 예감

별을 품다가 천둥을 새긴 파란 그늘에서
마른 울음을 흘리다가 홀연 정신을 놓은 주홍 그늘까지
빗자루가 쓸지 못한 그늘을 바람이 쓸어 담아
가지가지 끝에 매단다

뒤란엔 숨죽인 그늘의 역사가 살고
그늘을 비질하면 수북수북 감꽃이 핀다
---「그늘을 비질하면 꽃이 핀다」중에서

빛이 그리운 대낮에 불쑥 찾아간다. 촌집은 비어 있고 고작 여물통을 채워놓거나 비질 외엔 할 게 없는 나는, 어스름이 내릴 때까지 달과 별이 뜨기를 기다린다.

낮달은 들녘에서 별은 다방에서 따로 들어오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어쩐 일로 한번은 반짝반짝 네발 오토바이에 앉아 나란히 귀가한다. 그 장면을 본 후로,

하늘에는 수시로 달과 별이 뜬다. 별의 허리를 꽉 붙든 낮달과 헬멧을 눌러쓴 별이 빛난다. 네발 오토바이 탈탈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고사리를 꺾어와 삶고 말리는 냄새가 난다.

빈집에 앉아 낮달과 별의 고무줄 같았을 거리를 잰다. 집 나가는 낮달 꿈과 돌아오지 않는 별 꿈에서 아직 깨지 못한 아이를 위해 긴 착각의 시간을 끊어낸다.

고스톱이나 내기바둑마저 시시해진 낮달과 별이 나란히 네발 오토바이에 앉아 귀가하는 해거름, 그 장면에 나를 데려다 놓는다. 집에서 멀어지고 있는 반짝반짝 작은 별의 거리를 가늠하면서,
---「낮달과 별이 뜨는 집」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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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관계가 종료된 후 함께 했던 추억을 회상하면서 사랑의 “떨림이 있던 자리”를 나뒹구는 “감미롭고 환한 증거들”을 발견하는 사람, 그 사람이 최석균의 시적 화자다. 지나간 시간에 서로를 향한 원망이 왜 없겠냐마는 그는 “감잎 그늘”에서 “감미롭고 환한 증거들”만을 음미한다. 그래서 그는 안다. 감나무가 보낸 어느 한 시절의 흔적이 가득한 그늘, 그 “그늘을 비질하면 수북수북 감꽃이 핀다”는 사실을. 아무렴 어떨까. 감꽃은 분명 다시 필 테다.
- 박다솜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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