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24시간을 온전히 타인에게 맡긴 이 아기들을 지키기 위해 수백 명의 어른이 함께한다. 입양원 직원들은 물론이고 시간대별로 드나드는 이모와 삼촌들이 일주일에 200명 가까이 된다. 이유식을 배달해 주고, 차 태워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날마다 산더미처럼 나오는 옷과 이불, 수건을 세탁하고 건조시켜 정리해 주는 어른들도 있다. 머리를 손질해 주고, 방문 진료를 해 주고, 백일상이나 돌상에 떡을 올려 주고, 사진을 찍어 주고, 집을 수리해 주고……. 한 인간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손길들이 많은 이들의 촘촘한 협력으로 채워진다.
두 시간의 봉사가 보잘것없어 보이다가도 한 아이를 둘러싼 이 돌봄이 거대한 ‘협동의 바느질’ 같다는 생각이 들면 나도 위로를 받는다. ‘아기의 성장’이라는 커다란 조각보를 한 땀 한 땀 함께 만들어 가는 것. 온전히 부모 역할을 하진 못해도 아기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어른들이 함께 아기를 돌본다는 면에서 모두는 사회적 보호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장희숙, 〈주기만 하는 사랑은 없다〉」중에서
박물관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종 안전과 건강을 이유로 많은 곳에서 ‘친절한’ 거절을 당한다. 가장 많이 거절을 당하는 곳이 놀이터와 키즈 카페, 그리고 유치원과 학교라는 공간이라는 게 무척 속상하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 어린이일 때만 갈 수 있는 그곳에서 거절을 당한다. 일부러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몸을 가진 어린이, 다양한 장애를 가진 어린이를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은 ‘장애’와 ‘어린이’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함께 가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어린이라는 사실보다는 장애를 가졌다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공진하, 〈‘어린이’ 이야기에 끼워 넣고 싶은 내가 아는 어린이들〉」중에서
2022년 어린이날, ‘어린이차별철폐의 날’ 선포 기자 회견이 국회 앞에서 열렸다.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며 차별을 서슴지 않는 사회를 향해 어린이들은 “어린이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부모의 소유물이거나 어른들의 부속물로 취급되는 어린이가 아니라, 동시대에 ‘함께’ 살아가는 지구 거주자로. 보호와 육성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법을 익혀 나가는 시민으로. 미래의 꿈나무로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유예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미래를 만들어 나가는 동반자로 여겨 주기를 100년을 넘게 요구하고 있다.
---「서한영교, 〈품의 민주주의〉」중에서
모든 사람이 한때 어린이였음을 기억해야 하는 보편적 이유가 있다면, 바로 ‘어린이’로 대변되는 약자의 위치에 놓였던 경험, 자기 선택과는 무관하게 배정된 세상에서 살아 본 경험을 잊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좋든 나쁘든, 그가 베푸는 자원과 관용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만 했던 한 사람. 내가 바꿀 수 없는 조건들이 내가 부정될 이유가 될지 몰라 전전긍긍했던 한 사람. 인정과 돌봄을 갈구하기에 더 취약해지기 쉬웠던 한 사람. 처음 해 보는 낯선 일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실수가 혹여나 인정이나 지원이 철회되는 빌미가 될까 봐 안절부절못했던 한 사람. 나를 언제든 때릴 수 있는 사람과 한 지붕 아래 살았어야 했던 한 사람. 바로 그 ‘어린 나’와 어린 존재로서 보낸 시간을 품고 지금의 내가 있다. 한때 어린이였던 것이 아니라 그 어린 존재를 품고 인생이 이어진다.
---「배경내, 〈어린 존재를 품고, 지금 여기에〉」중에서
거리에서, 공공장소에서 어린이를 큰소리로 혼내거나 반말로 호통치는 장면을 보면 곧바로 몸이 얼어붙곤 한다. 아무렇지 않게 어린이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게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자리에서 부당한 무례함을 겪어 내고 있는 어린이의 편을 들어 주지 못하고 모르는 척 지나쳐 가는 내가 부끄럽고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작지만 무거운 돌멩이가 가슴 안에 하나씩 쌓이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마음 때문에 학교에 있고 싶은 것 같다. 학교에 있으면 학생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길거리에서보다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 학교의 인권적이지 않은 모습들을 모두 바꾸어 놓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긴장되는 상황에 놓인 학생의 마음을 물어보고 학생의 편에 잠시 서 있을 수 있다. 고립되어 있는 학생에게 말을 걸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현유림,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중에서
지금은 어른이 된 모든 아이들에게 움직임이 이런 놀이의 관점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처음부터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아이는 없다. 세상에 나와 몸이 내 것인지도 모르던 시절을 지나 아이들은 뒤집고, 엎드려 기고, 걸음마를 시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자신을 사랑해 주고 보호해 주는 존재에게 다가가고,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찬 세상을 온몸으로 탐색한다. 애착을 가진 존재에게 가닿으며 필요한 것을 찾는다. 관계 맺고자 하는 욕구,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따라 몸이 동하는 경험. 그런 움직임의 기억이 모두의 몸에 새겨져 있다.
그런데 크면서 움직임과 점점 거리가 생긴다. 근육질의 멋진 몸, 스포츠를 잘하는 강한 몸을 기준으로 몸의 가치를 판단받는 경험이 쌓이기 때문이다. 움직임은 그렇게 점점 몸을 ‘잘 쓰는’ 특정 사람들의 영역이 된다. 세수한 듯 얼굴에 땀이 흐를 정도로 뛰어다니곤 하던 여자아이는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넘어갈 때쯤부터 철봉에 매달릴 때 보이는 뱃살이 신경 쓰인다고 했다. 자신의 속도대로 두려움을 탐색하고 상대를 세심하게 살피던 남자아이는 ‘넌 남자애가 그것도 못 하냐?’라며 비웃는 말에 발끈하며 스포츠를 멀리하게 됐다.
---「김윤일, 〈몸과 놀이로 만나는 어린이의 세계〉」중에서
‘지역 소멸’과 ‘세계 최저 출생률’이라는 문구는 이제 더 이상 사회 구성원에게 별 충격을 주지 않는다. 이제 어느 정도 포기한 것 같기도 하다. 연일 위기를 강조하는 정부 발표와 언론 기사가 쏟아지지만 세상은 언뜻 예전과 다름없이 활기차게 돌아가는 것 같아 무감각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단순한 명제로 그 충격을 느끼고 있다. 아이들이 사라진다. 이 섬뜩한 사실을 나는 수치가 아닌 기자로 일한 15년간 현장에서 시나브로, 하지만 아주 또렷하게 체감했다. 이미 아이들이 사라진 농어촌 인구 소멸 지역에서만이 아니다. “애 하나 죽었다고 이렇게 어른들 불편하게 만드는 게 맞아요?”라고 소리치는 스쿨존 어린이 사망 발생 지역 인근 상인의 말을 들을 때, 고등학교 문제집이 가득 담긴 무거운 캐리어 가방을 끌고 가면서 입에 햄버거를 욱여넣는 초등학생을 만난 밤 10시 반 대치동 학원가에서, 이주민·난민 가정 어린이들을 향해 ‘세금 축내지 말고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끔찍한 댓글들이 수백 개씩 달리는 지옥도 같은 포털 댓글란을 읽어 내려갈 때, 나는 우리 사회에서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삭제’되고 있는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 모두 사라져서 온 세상이 그토록 당신들이 바라던 ‘노 키즈 존’이 돼 버릴 날이 오겠지, 라고 허공에 대고 독하게 비아냥거리면서.
---「변진경, 〈말랑한 어린이, 딱딱한 세상〉」중에서
흔히 아동은 놀면서 자라고 행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아동의 입장에서 행복이 설명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것이다. 행복해야 할 삶의 주인은 아동인데, 무엇이 행복인지에 대한 정의는 아동을 둘러싼 어른들이 제공한다. 공부를 잘해야 하고, 상위권 대학을 가야 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등의 말이다. 어른이 된 뒤의 삶에 인생의 목표를 두게 하고, 아동기는 미래를 위한 준비기인 것처럼 치부된다. 그렇기에 “아동의 인권”이라는 어휘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나중의 성과를 일궈 내기 위한 과정으로 아동기를 보지 않고, 마땅히 중요한 삶의 단계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김희진, 〈아동인권이 모두의 인권인 이유〉」중에서
책이 자유롭지 않으면 어린이의 자유는 불가능하다. 어린이책에서 검열이 시작되면 다른 도서에 대한 검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검열에 익숙해진 어린이는 검열을 받아들이는 비자율적 어른으로 자란다. 성평등 도서에서 시작된 검열은 다양한 철학과 사회 문화를 다루는 다른 도서에 대한 검열을 불러오게 될 수 있다. 검열주의자들은 왜 어린이책을 검열의 첫 번째 표적으로 삼는 것일까? 독자로서 발언의 기회가 적은 어린이가 독서 문화의 생태계에서 가장 고립시키기 쉬운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는 자신을 둘러싼 검열의 시도를 잘 알지 못한 채 사랑하던 책이 어느 날 갑자기 서가에서 사라진 것을 통해 이 사태를 깨닫는다. 몇몇 행정 조치를 통해 순식간에 그가 아마도 읽고 싶었을 책, 장차 즐겁게 읽게 되었을 책의 존재 자체와 격리되어 버린다. 통제된 독서 환경 속에서는 어린이들을 세계 시민으로 기를 수 없다. 어린이에게 책은 민주주의와 다양성을 배우는 교실 그 자체다.
---「김지은, 〈무슨 일이 있으면 책으로 달려와!〉」중에서
모든 돌봄이 그렇지만 아동 돌봄은 특히 돌보는 사람과 돌봄을 받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 돌봄은 어른들이 없는 시간에 아이들이 단지 안전하게 어딘가에 있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아니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돌봄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돌봄의 과정은 사회화 과정과 일치한다. 사실 돌봄과 교육은 칼로 두부 자르듯이 정확히 선을 그을 수도 없다. 지금 국가에서 한다는 돌봄, 그리고 교육의 공통점은 그 안에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돌봄은 학교 담장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 안에서 보호받으며 공화를 배워야 한다. 그러면서 시민으로서 자랄 수 있다.
---「김중미, 〈함께하는 그 모든 순간에 자란다〉」중에서
할아버지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함께 쓰고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단다. ‘어떻게 살아야만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깨끗하고 고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을까?’ 좋은 상상이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하지. 그러니까 오늘부터 좋은 상상부터 해 볼까 해. 그리고 그 상상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주어진 자리에서 있는 힘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까 해.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지치고 힘들 때도 있겠지만, 그때마다 옥수수처럼 쑥쑥 자라는 ‘서로’를 떠올릴 거야. 돈과 편리함에 빠져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함부로 살아온 어리석은 어른들이 만든 세상을 바로잡아야 하니까. 어리석은 어른들 속에 할아버지도 들어 있으니까 말이야.
---「서정홍, 〈어린이날에 태어난 산골 할아버지가 어린이들에게 띄우는 편지〉」중에서